기청해가 이유안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뒷마당이 소란해서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이 들을까 겁난 유안이 청해의 어깨를 탁 때렸다.
"그런 소리는 둘만 있을 때 하십시오. 괜히,"
"어어! 아저씨랑 미술 선생님도 뽀뽀 해?"
차건오의 품에서 꺄륵거리던 윤슬이 둘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유안이 다급하게 도리질을 치며 기청해를 때렸다.
"뽀뽀 아냐! 그냥 귓속말만 했어."
"우응··· 근데 엄~청 가까웠어!"
"기청해 씨, 빨리 아니라고 말하시죠?"
"흠···."
청해가 재미있는 건수를 물었다는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다분히 의도적인 손동작으로 제 입가를 매만졌다.
입술 위로 붓질하듯 살랑살랑 움직이는 손가락에 유안은 뒷골이 당겼다.
'···그냥 죽일까?'
기청해에게서 생명력 아이템을 도로 빼앗고 제주 앞바다에 퐁당 빠트리고 싶어졌다.
그 생각을 실천할 수는 없으니 유안은 그저 가증스러운 청해의 등짝을 때리기만 했다.
'등급 빼앗아오는 스킬은 없나. 내 손만 아프네.'
멀찍이서 아저씨와 미술 선생님을 지켜보던 윤슬이 도도도 달려왔다.
"나도오, 나두 뽀뽀!"
"응, 알았어."
유안이 윤슬을 받아 안아 이마, 콧잔등, 양 뺨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기분이 좋아진 아이가 눈을 접어가며 웃는다.
그 모습에 이유안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히이··· 아저씨, 그런데 저기서 밥 먹는 사람이 아저씨 또 괴롭혔어?"
"응?"
윤슬의 짧은 검지가 정확하게 중앙 카페 2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냐, 오늘은 안 괴롭혔어. 그리고 앞으로 착하게 살 거래."
"···정말? 이제 착해졌어?"
"응. 저번에 못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어."
"우아! 그럼 이제 친구야?"
"그럼, 친구지."
유안은 어린이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남발했다.
어차피 곧 사실이 될 터니 크게 문제는 없었다.
"아저씨 친구면 내 친구도 되는 거잖아!"
말랑말랑한 아저씨가 어디 가서 괴롭힘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윤슬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유안의 품에 안겨 있다가 주르륵 내려온 이윤슬이 테이블 위에서 베리 파이 하나를 챙겼다.
개중 가장 큰 것이었다.
"친구한테 이거 갖다주고 올래!"
"윤슬, 착하네."
"맛있는 건 친구들이랑 나눠먹어야 더 맛있는 거라고 아저씨가 그랬잖아."
"맞아. 뛰어 올라가지 말고 조심해서 천천히 갔다 와."
"웅!"
이유안은 바르게 자라고 있는 어린이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
"오늘 초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싸장님~! 음식도 짱이었어요! 비조 길드장님이 하셨다면서요. 나중에 제 방송에 특별출연 해주세요!"
"이유안 사장에게 허락받아야 해. 자유로워 보여도 구속당한 몸이라서."
"그럼 싸장님을 열심히 공략해 봐야겠네요!"
정태영은 유안을 향해 사랑의 총알을 빵야빵야 날렸다.
마음대로 데려다 쓰려고 말하려던 유안은 비조 길드장의 얼굴이 더 알려져서 좋을 거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르니까···.'
대형 길드장이 던전 공략을 소홀히 한다는 식의 소문이라도 돌면 곤란하다.
정태영은 아쉬워하겠지만 당분간 태양TV에 기청해가 출연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저도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해장은 깔끔하게 됐어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중앙이가··· 음, 잡아당기면 아프시겠죠?"
이중앙은 새로 길드장이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눈치 채고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었다.
앞발과 뒷발로 야무지게 차건오의 머리채를 붙잡은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억지로 떼어내려 하면 건오의 머리카락이 수십 가닥은 빠질 것이다.
"중앙아, 금방 또 올게. 착하지, 응?"
-크흥!
"거짓말 아닌데. 음···."
차건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인벤토리에서 강아지풀 하나를 꺼냈다.
아르네스 유적 던전 외곽에서만 드물게 자라는 것이었다.
"선물이야. 다음에 올 때 또 가져올 테니까 오늘은 봐주라."
-크우응.
"마음에 들어? 던전 갔다가 중앙이 주려고 일부러 꺾어 왔어."
-크, 흐응···.
별로 안 좋아하는 척하면서도 이중앙의 통통한 꼬리는 이미 살랑거리고 있었다.
'다 넘어갔네.'
유안은 중앙이의 앞발과 뒷발에 스르르 힘이 풀린 것을 보고 냉큼 안아들었다.
차건오는 탁월한 선물 센스 덕에 소중한 머리카락을 지킬 수 있었다.
단골 손님들은 직원들을 도와 뒷마당 정리를 끝내고 떠날 채비를 마쳤다.
다음에 또 초대하겠다는 유안의 말에 짧게 환호가 터졌다.
축제를 닮은 식사 자리는 언제든 환영이었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유안이 손님들을 배웅하는데 마침 2층에 올라갔던 윤슬이 내려왔다.
그런데 어쩐지 작은 발걸음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저씨이···."
"응, 윤슬. 왜 그래. 넘어졌어?"
"아니··· 친구가 내가 만든 초밥 안 먹었어···."
"······."
베리 파이를 갖다주는 김에 별 모양과 하트 모양 초밥도 야무지게 만들어 간 윤슬이었다.
그런데 성여진 대표는 아이가 건넨 초밥을 테이블 가장자리 접시에 살포시 올려놓더니 더 이상 젓가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윤슬이 빤히 바라보는데도 끝끝내 베리 파이에만 입을 댔다.
이윤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윤슬, 더 자세하게 말해 봐. 2층에서 생긴 일."
이유안이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고 차분하게 물었다.
윤슬이 놀라면 안 되니 대놓고 화난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유안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어린이의 친구
이윤슬이 울상을 짓는 바람에 집에 가려던 손님들의 발이 몽땅 묶였다.
다들 어떻게든 아이의 속상함을 걷어내려고 인벤토리에서 갖가지 아이템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 초밥··· 맛이 없나···?"
"아냐, 윤쓸! 맛있어, 맛있어! 내 방송에서 소개하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는데!"
정태영이 인벤토리에 곱게 모셔둔 막대사탕을 꺼내 윤슬의 입에 물려주었다.
[디저트 아일랜드]라는 던전을 공략하면 보상 상자에서 랜덤으로 나오는 사탕이었다.
'비싼 건데.'
능력치 상승 효과가 붙어 있어서 돈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아이템이다.
경매장에 올리면 사려는 사람이 넘쳐날 텐데, 윤슬을 달래겠다고 그런 아이템도 턱턱 내놓는 단골 손님들이었다.
"윤슬아, 이것도 가져. 아까 맛있는 초밥 만들어줘서 고마워."
차건오가 인벤토리에서 반투명한 날개 아이템을 꺼냈다.
어른이 착용하기에는 어렵지만 윤슬 정도의 체구라면 충분히 어깨에 매달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요정 같은 아이가 날개까지 다니 정말 요정 나라로 가버릴 것 같았다.
"짧게 비행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아이템인데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만 써야 돼."
"으응."
윤슬이 날개를 팔랑거린다.
어느새 목소리에서 슬픔이 많이 빠져 있었다.
"다들 감사합니다."
이유안이 보호자 대표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사장님도 참, 뭐 이런 걸 가지고~!"
류민희는 비각성자라서 가진 게 돈뿐이라며 윤슬의 옷 주머니에 지폐 다발을 꾹꾹 담아주었다.
유안이 고개를 모로 돌리고 살짝 미소를 흘렸다.
'윤슬, 이런 식으로 효도를 하는구나.'
어차피 이윤슬의 돈은 유안이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꼭 돌려주겠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도 했다.
"아저씨이··· 이거 아저씨가 갖고 있어! 너무 무거워."
"응, 알았어."
윤슬은 유안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새로 얻은 재산을 전부 넘겼다.
아저씨가 등 뒤에서 웃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윤슬은 단골 손님들과 프리 허그 타임을 가지기 바빴다.
따뜻하게 꼬옥 안기고 나니 기분이 거의 다 풀려서 헤실거리는 미소가 작은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때였다.
"···다들 파하는 분위기네요. 식사는 괜찮게 했습니다."
아이를 슬프게 만든 장본인이 1층으로 내려왔다.
단골들에게 차례로 안겼다가 마지막으로 기청해에게 달랑 들려 있던 윤슬이 움츠러들었다.
"성여진 대표님."
유안은 성 대표를 부르며 뒤쪽의 기청해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청해는 눈치 좋게 윤슬의 얼굴을 제 품으로 당겨 안고 성여진 대표가 있는 자리를 벗어났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뭐, 만족한 것까지는···."
아니라고 말하던 성여진이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 이곳에는 S급 헌터가 너무 많다.
그들 모두 성여진을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는 것인데 여진은 큰 압박감을 느꼈다.
"그, 음··· 대체로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자존심을 세우느라 끝까지 완벽한 칭찬을 하지는 않았다.
이유안은 그런 여진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출구 쪽을 손짓했다.
"다음에 또 괜찮은 식사 자리가 있으면 부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표님."
"···예."
여진은 그 흔한 묵례 하나 없이 성큼성큼 정문으로 나갔다.
침묵의 눈으로 성여진의 뒷모습을 좇던 단골 손님들이 막혔던 숨을 파- 하고 동시에 쏟아낸다.
"으휴,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대요! 주현 씨하고 소라 씨한테 얘기만 들었는데 직접 보니 더 진상이네요!"
정태영이 얼굴까지 발갛게 물들이며 유안 대신 씩씩거렸다.
기청해가 윤슬을 데리고 진작 3층 침실로 올라가서 다행이었다.
어린이가 성여진 대표의 마지막 태도까지 보았다면 더 큰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다음에 또 부른다는 건 빈말이겠죠, 사장님?"
서정원이 눈을 휘어가며 따뜻한 음성으로 물었다.
말투와 다르게 살벌한 느낌이 들어서 유안은 잠깐 어깨를 떨었다.
"빈말 아니었습니다."
"···진심이시라고요?"
"예."
"사장님."
정원이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유안을 똑바로 보았다.
동공 안쪽의 이글거리는 분노와 시선이 마주친 이유안은 서정원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화내지 마시죠."
"화 안 났어요."
"아닌 것 같은데."
"음, 사실 약간은 났어요."
약간도 아닌 것 같은데!
유안은 본점 매니저를 진정시킬 생각으로 탄탄한 팔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정원 씨.'
당장 성 대표를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그러나 먹음직스러운 스윗박스를 생각하면 좀 더 봐줄 필요가 있었다.
*
"씻기고 재운 거죠?"
"그럼. 이제 양치질은 혼자서도 곧잘 하던데. 유치가 빠진 쪽으로 칫솔질할 때는 좀 어색해했어."
"윤슬이 똑똑해서 뭐든 금방 배웁니다."
유안은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에서 잠옷을 입고 잠든 윤슬의 이마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꼭 친구로 만들겠다고 하던데."
"성 대표를요?"
기청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안은 아이의 귀여운 발상에 미소를 지었다.
'교섭하면 괜찮게 쓸 수 있기는 하지.'
윤슬은 그런 어른들의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잠든 어린이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귀여워 보였다.
"요즘 스윗박스가 공격적으로 해외 지점을 늘리고 있어. 그 작업이 끝나면 인수하는 게 좋을 거야."
"···뭐야, 어떻게 아셨습니까?"
"기업 정보라면 간단한 검색만으로,"
"그런 뜻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유안이 은근슬쩍 말 돌리려는 기청해를 냉큼 붙잡았다.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려던 청해가 싱글싱글 웃기만 한다.
'말해주기 싫을 때 짓는 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