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은 인벤토리에 실과 바늘이 없나 살펴보았다.
기청해의 입을 꿰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음식도 안 먹잖아. 열렸다 하면 헛소리만 뱉는 입이니까 아예 막아두는 게···.'
이유안이 엑스 자로 봉해진 기청해의 입을 상상하며 화를 조금 누그러트렸다.
윤슬은 아저씨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며 어깨를 콩콩 때렸다.
"아저씨이··· 무서운 생각 해···?"
"아니야. 오늘 저녁에 뭐 먹을지 고민했어."
"으응··· 그래? 나는 물고기 먹고 싶어!"
"기청해 씨, 들으셨죠?"
"안타깝게도 나는 곧 미술관에 매일 몸이라 중앙 카페 뒷마당까지는 갈 수 없어."
기청해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유안은 콧방귀를 뀌며 윤슬의 뺨을 쿡 찔렀다.
"윤슬, 속박 스킬 범위 조절 가능하지?"
"웅!"
"그럼 중앙 카페까지는 올 수 있게 해줘."
"알았어, 아저씨!"
이윤슬은 유안이 제게 처음으로 스킬 사용을 부탁해서 신난 상태였다.
여태까지는 불을 쓰는 것도, 물을 쓰는 것도, 심지어 잠깐 회복계 스킬을 쓰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다.
유안은 윤슬이 던전 밖에서 스킬 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게이트 밖은 마나가 풍부하지 않으니 혹시나 어린이의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아저씨의 마음을 알긴 하지만, 윤슬은 내심 유안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속박 스킬의 강도를 높여 사용했다.
[속박(SS급) 상태에 걸렸습니다.]
"내 제자가 나한테 SS급 스킬을 걸 줄은 몰랐어."
"등급 높으면 튼튼하고 좋죠. 그러게 던전을 왜 들어갔습니까."
이유안이 2차 잔소리를 시작하려 하자 기청해가 인벤토리에서 냉큼 생선 한 마리를 꺼냈다.
물고기들이 싱싱하게 팔딱팔딱 뛰었다.
"던전에 괜찮은 호수가 있어서 잡아 왔어. 마침 윤슬이도 물고기 요리를 원하니까 저녁은 매운탕 어때?"
"···예, 뭐."
"양이 많아. 이유안 사장의 친구들도 부르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회를 좀 칠까? 하는 김에 초밥도 만들고."
"······좋죠."
던전에 들어간 건으로 잔소리를 더 하려던 유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기청해가 말하는 메뉴마다 이유안의 취향에 완벽히 부합해서 싫은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뒷마당에 조리도구 준비하고 부르겠습니다. 연락하면 오세요."
"응."
"아저씨, 그럼 나는 미술 선생님이랑 놀고 있을게!"
윤슬이 유안의 품을 벗어나 기청해에게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저녁 식사 초대장을 누구에게 보낼지 고민했다.
'그냥 다 부르는 게 낫겠다.'
평소 자주 쓰던 단체 채팅방이 있으니 일일이 연락할 필요는 없었다.
중앙 카페의 단골 손님들이 모인 채팅방에 저녁 식사 공지를 띄웠다.
채팅방 인원의 대다수가 곧바로 읽고 참석하겠다는 의견을 비춘다.
'요리 많이 해야겠네.'
기청해를 더 열심히 굴려먹기로 다짐하며 헌터 디바이스를 품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괜찮은 계획 하나가 이유안의 머리를 스쳤다.
헌터그램 어플을 실행시킨 유안이 스윗박스 공식 계정으로 들어갔다.
'메시지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손에 거침이 없었다.
매운탕과 별 초밥
저녁 식사를 하러 오라고 부르는 일이 워낙 잦다 보니 다들 익숙하게 유안의 연락에 답했다.
다행히 못 오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잘됐다.'
유안은 뒷마당에 설치된 거대 냄비를 보며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홍소라의 도움이 필요한 작전이었다.
"네, 네··· 왜 부르셨어요, 사장님···?"
"소라 씨, 헌터그램에 가끔 일상 사진도 올리시죠?"
헌터그램은 신메뉴나 이벤트를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쓰지만, 가끔 중앙이 사진이나 소소한 중앙 카페 일상 사진을 업로드하기도 했다.
단골들을 불러 저녁 식사하는 장면을 찍어 올리는 것도 홍소라의 취미 중 하나였다.
"이, 일상 사진 반응이 진짜 좋거든요···!"
중앙 카페의 단란한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난 막대 과자 이벤트 때는 꽃다발에 파묻힌 이유안 사진의 인기가 특히 좋았다.
"그럼 지금 뒷마당 사진 업로드 좀 부탁드립니다."
"네, 에···? 아직 음식도 없는데요···!"
"음식이 다 완성되고 난 후에는 늦습니다. 오늘 저녁에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을 거다, 하고 기대감을 심어주는 게시글이 필요합니다."
"사, 사장님, 혹시······."
홍소라는 무언가 눈치 챈 것처럼 헉 하고 놀랐다.
'역시 소라 씨 눈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유안은 소라가 제 계획을 알아봤을 거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세, 셀라 매니저님이랑 밀당 하시나요···?"
"······예?"
소라의 입에서 전혀 다른 얘기가 나오자 유안이 손을 삐끗했다.
냄비 안에 넣어두려던 국자가 모래 바닥에 툭 떨어진다.
"아앗, 모래 묻었겠다···. 국자 새 거 가지고 올게요···!"
"소라 씨, 잠깐만요. 오해입니다."
"흐흐··· 괜찮아요···! 저만 알고 있을게요···!"
"셀라랑 밀당하는 거 아닙니다!"
유안은 또 이상한 오해를 받을까 싶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소라가 입가에 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어떡해요···! 쉬잇···!"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쉿, 쉿···! 국자, 국자 가지고 올게요···."
소라는 짓궂은 표정을 하고 주방으로 총총 사라졌다.
이유안은 혈압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셀라 근무 시간이라서 못 부르는 건데 밀당은 무슨 밀당이야.'
그러나 진실을 말해도 제대로 듣지 않고 뱀처럼 쉿쉿거리기만 할 홍소라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그냥··· 조용히 있자.'
변명하면 할수록 놀림받을 일만 늘어나니 앞으로 직원들 앞에서는 셀라의 시옷 자도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찰칵.
뒷마당에 설치한 대형 요리 테이블과 도마를 기청해에게 찍어 보냈다.
청해가 계속 미술관에 눌러붙어 있었기 때문에 헌터 코드를 교환한 후 오늘이 첫 메시지였다.
할 말이 있으면 바로 찾아가면 되니 디바이스로 연락을 주고받을 일이 딱히 없었던 것이다.
기청해는 윤슬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아저씨이!"
이윤슬이 유안에게 돌진했다.
기청해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요리를 위해 팔을 걷어부쳤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십시오.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린이 요리사가 있으면 좋겠어."
"으응? 나?"
"애한테 뭐 시키려고요. 위험해서 안 됩니다."
"아냐, 아저씨! 나 아저씨보다 칼도 잘 써!"
"윤슬."
지금보다 더 어릴 때 던전을 홀로 공략하던 윤슬이다.
그때부터 각종 냉병기를 손에 익혔으니 칼을 다루는 데에도 익숙했다.
중앙 카페에 오고 나서는 무기를 쓴 일이 없었으나 지금도 몸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칼은 안 돼."
그러나 이유안은 열 살짜리의 손에 날카로운 것이 들리는 일을 용납하지 못했다.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자 윤슬이 시무룩하면서도 납득했다.
아저씨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안다.
싸한 분위기가 되자 기청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초밥 만들기 체험을 시키려고 했어."
밥 위에 생선을 얹는 일만 맡길 생각이었다.
그마저도 윤슬이 지루해하는 순간 기청해가 나머지 것들을 책임질 테다.
얘기를 들은 유안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우아! 재밌겠다! 나 할래! 아저씨, 그건 안 위험하니까 해도 되지?"
"···칼 근처에는 절대 가면 안 돼. 알았지?"
"웅, 알았어!"
새로운 일을 경험할 생각에 신난 윤슬이 손을 씻으러 갔다.
그사이 기청해는 대형 수조에 물고기를 풀며 유안에게 손짓했다.
"몇 마리 골라 봐."
"저 녀석 살이 많아 보이니까 회 뜹시다. 작은 놈들은 매운탕에 넣죠."
"그래."
청해는 유안이 고른 물고기를 맨손으로 콱 붙잡았다.
S급 악력에 던전 호수산 물고기가 맥도 못 추고 기절해버렸다.
'맛있겠다.'
이유안은 다가올 저녁 시간을 기다리며 군침을 삼켰다.
*
가장 먼저 완성된 건 회와 초밥이었다.
매운탕도 조금만 더 끓이면 먹을 수 있었다.
"아저씨! 이거 내가 만든 거야!"
윤슬이 작은 손바닥 위에 별 모양 초밥을 올려 내밀었다.
'기청해가 장단 잘 맞춰줬나 보네.'
이윤슬이 직접 뭉친 별 밥은 각이 맞지 않았으나 그 위에 올려진 생선 살점은 완벽한 별 모양이었다.
"나 주는 거야?"
"응! 먹어 봐!"
유안은 입을 벌려 별 초밥을 먹었다.
회 상태는 완벽했으나 아래쪽의 밥은 어린이가 지나치게 조물락거려 질척거렸다.
그래도 이유안은 군소리 없이 씹어 삼키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네."
"그치! 내가 미술 선생님보다 더 잘 만드는 거 같아."
윤슬은 진지하게 자신의 진로를 요리 쪽으로 잡아야 하나 고민했다.
아무래도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별 모양 초밥을 여태 아무도 만들지 않았다니, 어른들은 정말이지 상상력이 부족하다!
"맞아, 윤슬. 기청해 씨가 만든 것보다 훨씬 맛있어."
유안은 수월한 거짓말을 위해 기청해가 만든 초밥에는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고급 일식집에서 나온 것처럼 생긴 초밥이 저 멀리 아른거렸다.
"분발해야겠어."
능숙하게 적당한 강도로 밥알을 뭉치던 기청해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기저기서 별 초밥이 인정받자 뿌듯해진 윤슬은 좀 더 만들겠다며 밥솥 쪽으로 달려갔다.
"하트 초밥도 만들어야지!"
저녁 식탁 위에 질척한 별과 하트가 잔뜩 올라가게 될 것 같았다.
유안은 신난 윤슬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른 요리를 구경하러 갔다.
보글보글 끓는 냄비 두 개가 자꾸 시선을 끈다.
'하나는 빨갛고 다른 건 하얗네.'
그 짧은 시간에 매운탕을 두 종류로 끓인 정성이 대단했다.
지하 레스토랑에서 장다온 셰프와 제자들을 부르지도 않았으니 기청해 혼자 다 한 것이었다.
'비조 길드 리모델링 끝나면 그냥 기청해를 거기 주방에 묶어놓을까···.'
청해가 먼저 중앙 카페 알바를 원하기도 했으니 시키면 잘할 것 같았다.
유안은 앞치마 두른 기청해를 상상하며 매운탕 맛을 보았다.
'엄청 시원하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속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빨간 것은 얼큰한 맛이 있었고, 지리로 끓인 건 생선뼈가 푹 우러나 담백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났다.
'얼른 밥 먹고 싶다.'
식사 시간이 이렇게까지 기다려지는 건 오랜만이었다.
유안은 열심히 초밥 만드는 어린이를 구경하며 뒷마당 소파에 앉았다.
"기다리기 힘들면 이거 먼저 먹고 있어."
"그렇게 힘든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 다시 가져갈까?"
"줬다 뺏는 게 어딨습니까. 치사하게."
유안은 기청해가 들고 온 접시를 낚아채듯 붙잡았다.
푸르고 흰 일식 접시 위에 지느러미 회가 몇 점 있었다.
제일 맛있는 부위만 넘겨준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기다란 살점을 입에 넣자 쫄깃하고 고소한 맛이 가득 느껴진다.
이유안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정말 맛있는 것을 먹으면 감탄보다 미소가 먼저 지어지곤 했다.
"이유안 사장이 만족하니 다행이야."
"중앙 카페가 아니라 중앙 일식집이었으면 기청해 씨를 고용했을 텐데 아쉽게 됐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잖아. 일식집도 열면 되지."
"한다면 여기 말고 비조 길드에 오픈해야죠. 아, 기청해 씨. 그러고 보니 건물은 언제 주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