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37)

운전대를 잡은 유안은 지우의 말에 동의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 건설을 허가한 것도 협회장인 류지우였으니 건물이 잘 지어졌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따로 시간을 빼서 다시 다녀올 거 없이 한 방에 해결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여럿이 가야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거 아냐."

이유안은 셀라를 살살 타일렀다.

뚱하게 차창 밖을 내다보던 셀라는 유안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다음에는 진짜 단둘이 데이트 해! 파트장 있으면 은근 불편하단 말야."

지금은 중앙 카페의 매니저로 강남점에 정착했다지만, 프리 헌터 시절에는 여기저기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서 헌터 협회의 집중 감시를 받던 셀라다.

그시절 류지우는 하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어서 조금이라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내가 협회에 갖다 바친 벌금만 얼만지 몰라~. 벌금으로 건물 한 채는 뚝딱 세울 걸!"

"그건 셀라 헌터가 잘못해서 낸 거잖아요."

"파트장이 너무 빡빡하게 군 것도 있잖아!"

"저 이제 파트장 아니고 협회장입니다."

"···저것 봐, 유안. 엄청 깐깐해. 유안은 어떻게 저런 사람이랑 친구를 하지?"

다같이 있을 때는 별 마찰 없이 잘 지냈으면서 둘만 똑 떼어두니 자꾸 투정을 부린다.

유안은 운전에 집중한 채 둘 사이를 대강 조율했다.

"그래도 협회장님이랑 사이 좋게 지내. 류지우 씨도 괜히 까칠하게 굴지 마십시오."

"유안~! 이럴 때는 내 편 들어줘야지!"

"유안 씨, 저는 평소처럼 말했을 뿐인데 오해를 받으니 속상하네요."

"···계속 싸우면 둘 다 갓길에 버리고 갑니다."

'셀라랑 지우 여기 두고 갈 거야'를 시전하자 비로소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첫 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조용했다.

'얌전하니 좋네.'

유안은 부드럽게 핸들을 꺾어 고속도로 휴게소 방향으로 빠졌다.

휴게소에 꼭 들를 필요는 없었으나 저녁 이후 아무것도 안 먹은 셀라가 신경 쓰여서 차를 세웠다.

류지우도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바로 온 것이니 슬슬 출출할 것 같았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습니까?"

"사실 유안 인벤토리에 있는 중앙 카페 음식이 제일 맛있긴 하지."

"뭐··· 그래도 가끔 기분전환으로 바깥 음식 먹는 거 괜찮잖아."

"저는 배 채울 수 있는 거면 아무거나 상관 없어요."

지우는 고속도로 휴게소가 오랜만이라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셀라 역시 한국의 휴게소는 처음이라 신이 났는지 야생마처럼 저 멀리 달려갔다.

유안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들르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유안 씨는 뭐 드시려고요?"

"음··· 카페나 가 볼까요."

"방금까지 카페에 있었으면서 또 카페요?"

"그거랑은 다르죠."

가끔 시장 조사도 필요하다.

유안은 금세 휴게소 한 바퀴를 빙 돌고 돌아온 셀라에게도 제안했다.

"셀라, 우리 카페 갈래?"

"유안만 옆에 있으면 어딜 가든 좋아~."

"내가 이상한 곳 가자고 하면 어쩌려고."

"하하, 유안~ 나 S급인 거 까먹은 건 아니지?"

휴게소에 오니 놀러 온 기분이라 유안도 평소보다 들떴다.

셀라의 장난을 받아주고 있자니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류지우도 그런 둘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카페로 갑시다."

셋 다 저녁은 먹었으니 간단하게 배를 채우기에는 음식점보다 카페가 나을 것이다.

셀라가 장군처럼 앞장서고 이유안과 류지우가 천천히 뒤를 따랐다.

휴게소의 카페는 하나뿐이었다.

"스윗박스네~."

한국에 본점을 둔 글로벌 기업.

카페를 잘 다니지 않는 사람도 스윗박스의 분홍색 선물 상자 로고는 알아볼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어느 나라에든 있어서 자주 다녔는데. 멤버십 레인보우 등급도 찍어봤어~!"

셀라는 지갑에서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카드를 꺼내 보였다.

스윗박스의 멤버십 최고 등급을 달성하면 발급해주는 전용 카드였다.

"이제 중앙 카페에만 있어서 카드 기한 만료되긴 했지만."

다른 카페는 안 가고 스윗박스만 계속 방문해야 레인보우 등급을 유지할 수 있다.

셀라는 크게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카드를 톡톡 치더니 스윗박스 카운터로 달려갔다.

"다들 뭐 먹을래? 내가 살게! 못 고르겠으면 일단 하나씩 다 시킨다?"

"응, 좋아."

어차피 시장 조사도 해야 하니 유안은 통 큰 셀라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

밤 늦은 시간이라 스윗박스에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중앙의 가장 큰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세 사람은 주문한 메뉴가 나오길 기다렸다.

'알바생들 울고 싶겠는데.'

마감을 한 시간 앞둔 시간에 들이닥쳐서 전메뉴를 하나씩 주문했으니 착잡한 심정일 것이다.

스윗박스는 일반 재료를 쓰는 카페이니 중앙 카페처럼 인벤토리에서 미리 만들어둔 음식을 꺼낼 수도 없었다.

드르륵, 드륵.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라인더 소리가 적막을 뚫었다.

"에스프레소, 아이스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카페라떼, 카페모카 먼저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알바생 중 한 명이 노련한 경력자인지 커피 베이스 음료를 한꺼번에 가져다주었다.

유안은 문득 서정원 생각이 났다.

'정원 씨도 일 참 잘하지.'

주문 수십 개가 몰아닥쳐도 침착하게 미소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면 프로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원이 매장 관리를 압도적으로 잘해서 유독 눈에 띠는 것이지 다른 직원들이 못한 것도 아니었다.

어디서 이렇게 일 잘하는 사람들만 쏙쏙 모였나 싶을 정도로 중앙 카페 직원들의 업무 역량은 완벽했다.

'셀라도 그렇고.'

손님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경계심을 허무는 영업 방식은 셀라가 가장 잘 쓴다.

셀라 덕분에 강남점이 헌터그램에서 유명해질 수 있었다.

유안은 왼쪽에 앉은 셀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바로 눈이 마주친다.

"응, 유안~. 왜? 이거 마셔보고 싶어서 그래?"

카페모카의 휘핑 크림을 빨대로 쿡쿡 찔러 침수시키던 셀라가 말했다.

유안은 사양할까 하다가 맛이 궁금해서 얼굴을 살짝 내밀었다.

빨대 끝이 입술에 닿고, 살짝 빨아들이자 갈색 음료가 쑤욱 올라온다.

"어때?"

"음··· 달아."

"그럼 유안 취향이겠다~. 하나 더 시킬까?"

"아냐, 됐어."

달콤한 맛이 나쁘지 않았으나 크림이 조금 느끼했다.

중앙 카페에서는 서정원과 홍소라가 수십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낸 수제 크림을 사용하기 때문에 뒷맛이 느끼하지 않고 깔끔하다.

그것에 익숙해진 유안의 혀가 자연스럽게 스윗박스의 커피를 거부했다.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얼 그레이, 자몽 허니 블랙, 히비스커스, 유자 민트 티 나왔습니다."

커피 다음으로 차 종류도 한꺼번에 배달되었다.

잔을 완전히 비우는 건 불가능하니 종류별로 적당히 맛만 보기로 했다.

유안이 눈앞의 얼 그레이 잔을 들었다.

"음···."

홍차의 떫은 맛을 느낀 이유안은 찻잔에서 금세 입을 떼었다.

"유안 씨, 그거 말고 이거 마셔요."

"이건 뭡니까?"

"꿀 들어간 거라 좀 나을 거예요. 그건 제가 마시겠습니다."

"굳이 마실 필요는 없는데···."

유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류지우가 찻잔을 가져갔다.

씀쓰레한 차를 빼앗긴 유안이 솜사탕 잃은 너구리처럼 허우적대다 다른 찻잔을 집어들었다.

'이건 좀 낫네.'

류지우가 추천해준 차는 확실히 달달하고 마실 만했다.

그래도 한 모금만 마시고 내려놓았다.

앞으로 먹고 마셔야 할 게 산더미다.

"벨벳 초콜릿 케이크, 애플 시나몬 바움쿠헨, 마스카포네 에클레어, 크렘 드 마롱 타르트 드리겠습니다."

매장에 남아 있는 디저트만 하나씩 시켰는데도 양이 상당했다.

디저트류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유안의 양옆에서 각자 포크를 들었다.

셀라는 케이크를, 지우는 에클레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유안의 입가에 가져다 댄다.

"뭐 하는 겁니까···?"

"유안, 얼른 둘 중에 하나 골라!"

"유안 씨, 이게 더 맛있을 거예요."

"······."

부담스러워진 유안은 두 사람의 포크를 모두 거절하고 밤 잼이 가득 얹힌 타르트를 입에 넣었다.

"유안은 튕기는 맛이 있어서 더 매력적이라니까!"

"유안 씨가 안 드셨으니까 이건 그냥 제가 먹어야겠어요."

"장난 그만 하고 맛이나 평가하시죠."

유안이 단호하게 끊어내자 셀라와 지우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

스윗박스 알바생들에게 미안해진 유안은 카페 쇼케이스에 남아 있던 디저트류를 전부 포장해 왔다.

이걸로 오늘 매상은 톡톡히 올랐을 것이다.

셀라도 다시 스윗박스 레인보우 등급을 찍을 수 있었다.

"한 입씩만 먹었는데도 엄청 배불러~!"

"맛은 어땠어?"

"다 아는 맛이라서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았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했어요."

딱히 깎아내릴 구석은 없으나 그렇게 칭찬할 부분도 없는, 세상의 모든 카페를 줄지어 세워놓고 점수를 매긴다면 딱 중간에 자리할 것 같은 맛이었다.

유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평범한 맛인데 그렇게 유명한 이유는 역시··· 매장 수로 밀어붙인 걸까.'

전국 어디를 가든, 심지어 해외여행을 가도 스윗박스는 있었다.

높은 접근성이 손님들의 방문 심리를 자극한 것 같았다.

'기업이 크니까 자잘한 이벤트도 많이 하는 것 같고.'

유안은 셀라의 헌터 디바이스로 확인한 스윗박스 전용 어플을 떠올렸다.

분홍색 로고가 선명한 어플을 클릭해 들어가면 이번 달에 진행하는 이벤트가 우르르 뜬다.

'배울 점은 확실히 많지.'

중앙 카페도 본격적으로 배달 서비스를 시작하고 천천히 지점을 늘려가면 스윗박스처럼 체계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맛은 우리가 훨씬 나으니까 경쟁 상대가 되지는 않아.'

문제가 있다면 가격이다.

헌터 상대로 책정된 중앙 카페 메뉴 가격은 비각성자가 보기에 부담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처음부터 대량 생산해서 단가를 낮추면···.'

휴게소에서 창고까지 가는 길의 운전은 셀라가 맡아주어서 유안은 편하게 경영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도착했어~!"

끼이익, 핸들을 거칠게 틀며 창고 앞마당에 주차한 셀라가 말했다.

서정원의 차가 묵직해서 흔들림이 적어 다행이었다.

"셀라, 이거 오토바이 아니다."

"응~ 그래서 얌전히 운전한 건데?"

평소에는 차에 날개라도 달고 다녔나 보다.

유안은 차에서 내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 강해민의 피, 땀, 눈물이 녹아든 건축물을 보았다.

일반 건물이라서 공사 작업 중에 강해민의 손을 덜 타기는 했지만, 그래도 총책임자로서 완전히 신경을 끌 수는 없었다.

유안은 창고가 다 지어지는 동안 해민이 수도 없이 서울과 이곳을 왕복했음을 알고 있었다.

'해민이는 역시 대단해.'

리모델링을 앞둔 건물 내부는 깔끔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길게 시간을 보내게 될 배달원을 위해 휴게 공간이 넓게 빠졌다.

"유안, 나도 이런 집 하나 지어주라~. 강남점 근처에!"

"해민이 좀 덜 바빠지면 지어줄게."

"진짜? 진짜 약속한 거다!"

"응."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강해민이 언제쯤 한가해지려나···.

은퇴를 기다리는 게 빠를 수도 있다.

건물 한 바퀴를 쭉 돌고 나온 유안이 셀라에게 말했다.

"셀라, 너도 봐서 알겠지만 여기에 게임 센터랑 볼링장이랑 아쿠아리움을 다 넣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응~ 맞아. 그러기엔 좀 좁지!"

"그러니까 친구들한테 가서 타일러 봐. 네 말은 잘 듣잖아."

"알았어, 유안."

셀라는 유안을 번쩍 들었다 놓아주며 답했다.

알았다는 대답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나오는 것이 영 불안했지만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공사 일정이 빠듯해서 걱정했는데 튼튼하게 지어진 것 같아 안심이에요."

"누가 총괄했는데 당연하죠."

"며칠 전에 해민 씨가 저한테 건강 주스를 나눠달라고 하더라고요."

"······."

"그냥 그렇다고요."

류지우는 싱긋 웃으며 먼저 차로 돌아갔다.

'그래도 이번에 잔뜩 만들어서 줬으니까 괜찮겠지.'

유안은 해민이 앞으로는 덜 피곤할 것이라 확신하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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