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37)

"···비조 길드장한테 뭘 한 거야?"

"그냥 좀 도와줬더니 고맙다면서 주던데."

그사이의 길었던 공갈 협박 과정은 시간상 생략하기로 했다.

"어쨌든 내 건물 됐으니까 리모델링 싹 하고 싶거든. 가능하지?"

"······."

"혹시 처음부터 큰 건물 하는 게 부담스러우면 연습삼아 작은 것부터 해볼래?"

"···비조 길드장한테 받은 건물이 더 있어?"

해민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유안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래도 양심상 연습용 건물은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걸로 할 생각이었다.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이거, 창고 완성된 거 보고 셀라 친구들이 건의한 사항들인데."

창고 겸 주유소 겸 주택이 얼추 지어지자 셀라의 친구들도 어떤지 구경하겠다고 우르르 찾아갔었다.

전체적인 평가는 '건물은 무척 완벽하나 밋밋하다'는 것이었다.

롤링 페이퍼처럼 커다란 종이에는 다양한 언어로 적힌 건의사항이 있었다.

게임장과 사격장을 꼭 넣어달라는 의견, 창고 앞에 작은 보드장을 만들어달라는 의견을 비롯해서 평범하지 않은 것들을 요구했다.

꼭 전부 들어줄 필요는 없지만, 유안은 배달원들의 복지를 위해 가능한 선에서는 건의를 수용하기로 했다.

'원래는 번역해서 주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왔으니까 지금 주는 게 낫겠지? 어차피 해민이는 다 알아볼 거고.'

유안은 학창 시절 1등을 놓친 일이 없는 친구의 외국어 실력을 믿었다.

"이게 다 무슨··· 야, 집안에 아쿠아리움 수조를 어떻게 넣냐."

역시나 강해민은 번역 프로그램이 설치된 기계처럼 건의 목록을 쭉쭉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설마 다 들어준다고 한 건 아니지?"

"진짜 말도 안 되는 건 넘어가도 돼."

"······."

"잘 해줄 수 있지? 난 해민이 너 믿어."

유안이 반질반질한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하자 해민은 할 말을 잃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오지 말걸, 하는 강렬한 후회가 뒤늦게 밀려온다.

"···알았다. 하는 데까지 해 볼게."

그러나 이미 늦었다.

강해민은 유안 앞에만 서면 거절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만다.

제 입술을 한 대 치고 싶었다.

"고마워, 해민아."

"어···. 건강 주스 몇 병만 포장해줄 수 있냐."

류지우가 마시는 걸 보니 효과가 좋아 보였다.

"당연히 되지. 조금만 기다려, 금방 만들어 올게."

유안이 강해민에게 한 부탁에 비하면 건강 주스 정도야 새 발의 피였다.

이유안은 곧장 주방으로 향해 냉장고를 뒤적였다.

오븐에서 한창 머랭 쿠키를 굽던 홍소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뭐, 뭐 하시려고요···?"

"해민이 줄 건강 주스 만들려고 합니다."

"아, 아···. 강해민 씨도 결국 그 길로······."

비통한 소식을 전해들은 소라는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 사장님··· 잠시만요···!"

유안이 던전산 해파리를 믹서기에 가는 동안, 홍소라는 주방에 있던 디저트를 잔뜩 포장했다.

중앙 카페에서 쓰는 포장용 상자 중 가장 큰 크기를 가득 채우는 양이었다.

"이, 이거··· 해민 씨한테 전해주세요···."

"이렇게 많이요?"

"사, 사장님이 새로운 일 시킬 때마다 꺼내먹는다 치면···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닐 텐데요···."

"···알겠습니다."

정곡을 찔린 이유안은 얌전히 상자를 받았다.

디저트 상자는 양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묵직했다.

해민은 각성자도 아니라서 인벤토리를 쓸 수 없으니 손에 들고 가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무거웠다.

'강남점까지 차로 태워다 줘야겠네.'

유안은 서정원의 차를 잠깐 빌리기로 했다.

중앙 카페 직원들 사이에 특수차량 붐이 일었을 때 차를 구매한 사람 중 서정원의 것이 가장 크고 튼튼해 보였다.

'그렇게 생긴 차가 취향일 줄은 몰랐는데.'

서정원이라면 좀 더 예쁜 디자인을 선호할 줄 알았는데 의외기는 했다.

유안은 중앙 카페 2층을 관리하고 있던 본점 매니저에게 다가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정원 씨, 차 좀 쓰겠습니다."

"네. 항상 운전 조심하시고요, 사장님."

정원 역시 사용 목적을 깊게 캐묻지 않고 순순히 차키를 넘겼다.

류민희의 서명이 박힌 스마트 키가 손에 착 감긴다.

유안은 직원들의 차가 주르륵 주차되어 있는 담벼락 앞으로 가 차 문을 열었다.

"해민아, 타!"

그리고 열차를 타러 가려던 강해민을 큰 목소리로 붙잡았다.

*

강남점에 해민만 데려다주고 곧장 돌아오려고 했으나 셀라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셀라의 출근 시간 전이라 안심하고 방문한 게 화근이었다.

"유안~, 어딜 도망가려고!"

"내가 도망을 왜 가. 일하러 가는 거지."

"그게 도망이지! 여기서도 할 일 많잖아, 유안."

"···일단 좀 놓고 얘기할래?"

셀라는 유안을 애착 인형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놓아주기 싫어~."

"아까 회의할 때도 봤으면서 무슨 소리야."

"여기서 보는 건 오랜만인 거 맞잖아."

"그래···."

이유안은 포기하고 몸에 힘을 풀었다.

셀라가 고집을 부릴 때는 반항하는 것보다 얌전히 있는 게 나았다.

"창고 완성된 건 확인했어?"

"나는 아직~."

"보러 갈래?"

"응? 지금?"

저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셀라의 출근 시간도 곧이라는 소리였다.

강남점에도 직원을 충원했으니 셀라 한 명이 빠져도 어찌저찌 굴러가긴 하겠지만, 손님 중에 셀라의 팬이 많아서 갑작스레 일을 빼기는 뭐했다.

"아니, 카페 마감하면."

"우리 요즘 엄청 늦게 닫는데."

"여기서 제일 가까운 창고는 한 시간도 안 걸리니까 금방 다녀올 수 있어."

"뭐야, 유안. 나랑 새벽 데이트 하고 싶은 거였구나?"

셀라가 유안의 뺨에 제 코를 비비며 말했다.

'데이트는 무슨.'

유안은 얼굴을 살짝 뒤로 물렀다.

셀라를 데리고 창고에 가려는 이유는 명백했다.

'네 친구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해민에게 건의사항 목록을 통째로 넘기기는 했으나 줄일 수 있는 건 최대한 줄여주려고 한다.

소라의 말대로 강해민이 요즘 부쩍 피곤해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실현 불가능한 건의는 처음부터 거르는 게 나았다.

다만 그 작업을 유안이 독단적으로 해서는 반발이 생길 수 있으니 셀라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중앙 카페 직원들이 유안의 말에 껌뻑 죽는 것처럼 셀라의 친구들은 셀라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려고 했다.

"오늘 몇 시에 끝나?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

"그냥 여기서 놀다 가는 건 어때~. 베이비도 부르고!"

"윤슬이는 지금 바빠."

기청해가 미술관에 눌러 살게 되자 윤슬은 그 옆에 찰싹 붙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유안으로서는 아이를 잘 돌봐줄 사람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니 무척 만족스러웠다.

다른 건 몰라도 비조 길드장이 애 하나는 끝내주게 잘 본다.

'정신연령이 비슷한가.'

윤슬의 장단에 맞추어 소꿉놀이를 진심으로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종종 들었다.

수치심을 모르는 기청해는 열 살 어린이 앞에서 더 어린 역할도 잘만 맡았다.

잠깐 간식을 전해주러 갔던 방재이가 그 모습을 보고 찬물로 세수를 했다.

"당분간 잠도 내가 안 재워도 될 테니까 밤늦게까지 시간 쓸 수 있어."

아이가 생기고 유안도 덩달아 바른 생활을 시작했지만, 회귀 전에는 밤낮 없이 던전에 들어가던 헌터였다.

하루이틀 밤을 새는 정도는 익숙하다.

"알았어, 유안. 그럼 나 끝날 때까지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맛있는 거 좀 가져다 줄게!"

"응."

셀라가 유안에게 안내한 자리는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특수 효과가 붙은 차양 아래의 소파는 보일러를 틀어둔 것처럼 후끈했다.

차가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따뜻한 공기를 유지하는 게 신기했다.

'실외인데 실내에 있는 것 같네.'

유안은 소파에 몸을 푹 파묻은 채 셀라의 서빙을 기다렸다.

강남점에 어떤 신메뉴가 나왔는지는 매일 보고 받고 있지만 직접 와서 먹는 건 참 오랜만이라 가슴이 뛰었다.

'뭘 갖다 주려나.'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으니 배를 채울 만큼 든든한 음식이 나올 것 같았다.

"유안, 이거랑 이거랑 이거! 이번에 새로 담근 과실주인데 마셔 봐!"

"···술?"

"응~ 엄청 맛있어!"

"······."

발효 창고에 다녀온 셀라가 내민 것은 다름아닌 술병 세 개였다.

맛있는 걸 준다기에 당연히 음식을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셀라 기준에서 제일 맛있는 건 술이었다.

"이따 운전해야 하니까 못 마셔. 배고픈데 먹을 거나 가져다 주라. 신메뉴 위주로."

유안은 정확하게 주문하고 나서야 셀라에게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있었다.

강남점의 신메뉴 중에 죽통 볶음밥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셀라도 참··· 한국에 완전히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데 아닐 때가 있다니까.'

서정원이었으면 진작 과할 정도의 음식을 차려서 유안을 당황시켰을 것이다.

'뭐, 각자의 매력이 있는 법이지. 수제비 맛있다.'

유안은 행복한 표정으로 뜨끈한 버섯 수제비와 함께 볶음밥을 마저 먹었다.

*

"으악···!"

밥을 먹고 잠깐 잠들었다가 눈을 떠 보니 시야 가득 셀라의 얼굴이 보였다.

제자리에서 팔짝 뛸 만큼 놀란 유안은 소파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키스로 깨워주려고 했는데~."

"···제발 그러지 좀 마, 셀라."

"슬리핑 뷰티, 잠은 잘 잤어? 벌써 가게 문 닫을 시간이라고."

"······."

그러고 보니 주변이 어둑했다.

유안이 앉아 있던 소파 근처에는 튤립 모양의 야간등이 있어서 은은하게 환한 편이었지만, 숲은 음산할 정도로 어둑했다.

'이런 곳에서 깊게 잠들었다니.'

그리 피곤한 것도 아니었는데 강남 던전 근처에서 이렇게 늘어질 줄은 몰랐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유안, 이제 하나도 안 무서운가 봐."

"···뭐가."

"강남 던전. 계속 무서워했잖아."

셀라는 바닥에 떨어진 유안을 주워 안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셀라한테는 말한 적 없는데.'

어릴 때 개에 물린 기억이 있어 늑대도 무서워한다는 둥 지어낸 거짓말은 본점 직원들만 알음알음 알고 있는 정보였다.

셀라는 몰라야 했다.

소름이 끼친 유안이 셀라의 품에서 버동거렸으나 더 강한 포옹이 돌아올 뿐이었다.

"이제 괜찮아졌다니 다행이야~."

"내가··· 무서워하는 티가 났어?"

"다른 사람은 몰랐을 거야. 나는 유안을 많이 안아봤으니까 두근거리는 속도 잘 알아서 눈치 챈 거거든."

강남점에 있을 때마다 심장이 그렇게 빨리 뛰었다고?

유안은 믿을 수 없었다.

강남 던전 게이트 쪽을 바라보면 무심코 입이 마른다거나 초조해지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다 극복한 거라 생각했다.

'완전히 나아진 게 아니었나.'

제 몸 상태에 둔감한 유안은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보았다.

일정한 속도로 전해지는 심박이 평소와 같은 속도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었다.

'셀라 이 녀석은 언제 이런 걸 재고 있었던 거야?'

S급 헌터라 촉이 좋은 걸까.

유안은 셀라의 색다른 면모에 감탄하며 가슴에서 손을 내렸다.

"이제 안 무서우니까 더 자주 놀러와야 해~."

"···그래, 알았어."

"그럼 데이트하러 갈까?"

"데이트 아니라니까."

이유안의 반박을 한 귀로 흘린 셀라는 테이블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유안은 숲 너머의 강남 던전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왼쪽 가슴에 다시 손을 얹자 아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속도로 뛰는 심장이 느껴진다.

중앙 카페가 번창하는 모습을 볼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 세상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찬 감정이 들었다.

새벽 데이트

"유안이랑 단둘이 데이트하는 줄 알았는데, 망했어~."

조수석에 앉은 셀라가 투덜거렸다.

그 말을 들은 뒷좌석의 류지우가 씨익 웃었다.

"어차피 저도 창고가 다 지어지면 방문하려고 했으니 겸사겸사 동행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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