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37)

"다들 아실 겁니다. 비조 길드에서 공략을 맡고 있는 심해 던전, [흑등고래의 요람]입니다."

비조 길드장이 직접 그려준 지도에는 오류가 없었다.

같은 던전을 수백 번 공략했으니 눈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기청해는 종종 심해 던전으로 낚시를 가기까지 했다.

"여러분이 앞으로 이 던전을 최대한 많이 공략해주셨으면 합니다. 공략법은 자세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질문~."

유안의 말을 경청하던 셀라가 왼팔을 번쩍 들었다.

"응, 셀라."

"비조 길드장은 뭐하고? 주인 있는 던전 건드리면 혼나, 유안~."

프리 헌터인 셀라는 이런 쪽을 잘 알고 있었다.

멋모르고 대형 길드 산하 던전에 들어갔다가는 엄청난 양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허락받았어."

유안은 지금쯤 미술 교실에 콕 박혀서 수업 진행 중일 기청해를 떠올리며 말했다.

던전 공략 권한을 내놓지 않으면 중앙 카페 출입 금지라고 협박해서 빼앗은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계약서까지 철저하게 썼다.

'그 스킬을 얻은 던전을 계속 파밍하다 보면 무슨 수가 나오겠지.'

원래 던전에서 얻은 디버프는 던전 부산물로 해결하는 것이 정공법이다.

기청해가 얻은 것은 저주가 아니라 스킬이니 상황이 약간 달랐으나···.

'뭐든 다 해봐야지. 사람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죽어가는데.'

비조 길드장이 바다에 완전히 삼켜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시한부 길드장

이유안은 상급 헌터들 앞에서 심해 던전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던전에서 주로 등장하는 몬스터와 그것들이 쓰는 스킬, 그리고 어떤 아이템을 준비해서 가야 하는지의 내용이 주를 이뤘다.

유안의 정확하고 간결한 설명 덕에 중간에 질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류지우 씨는 잠깐 남아주시고, 다른 분들은 가 보셔도 됩니다. 제 쪽에서 준비가 끝나면 다시 부르겠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헌터들이 기지개를 켜며 1층으로 내려갔다.

평소 머리를 쓰는 일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일이 많던 사람들이라 탁상공론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꼈다.

유안은 그들에게 오늘 하루 중앙 카페 음료를 무료로 제공해주기로 했다.

"왜 남으라고 했는지 알 것 같은데요."

협회 직원들마저 1층으로 내려보낸 류지우는 유안에게 가까이 다가와 희미하게 웃었다.

유안은 한 번 예측해보라는 듯 류지우에게 턱짓했다.

"비조 길드장 얘기 하려고 그러죠?"

"···류지우 씨 정신계 스킬도 있었습니까?"

"유안 씨한테만 통하는 게 있긴 합니다."

"밤길 조심하시죠, 협회장님."

둘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3층으로 올라갔다.

조용하게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방음 처리가 된 사무실이 필요했다.

사무실에 들어간 두 사람이 푹신한 가죽 소파에 착석하자, 기다렸다는 듯 바깥 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정원 씨."

유안은 이제 본점 직원들의 노크 스타일을 전부 외우고 있었다.

단정하게 두 번 두드리는 것은 서정원, 어느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오는 리듬을 따라하는 것이 홍소라, 피아노 건반을 치듯 토독거리는 사람은 김주현이고, 방재이는 주먹을 가볍게 쥔 채 콩콩거리곤 했다.

그리고 윤슬은 아직 노크를 배우지 않아서 다짜고짜 박차고 들어온다.

그래도 아직 문을 부순 적은 없어 다행이었다.

"윤슬이가 던전에서 민들레를 잔뜩 가져왔더라고요. 그걸로 우린 차예요."

"잘 마시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산딸기 다쿠아즈인데 소라 씨가 방금 구웠어요."

"소라 씨한테도 잘 먹겠다고 전해주세요."

"네, 사장님."

서정원은 두 잔의 차 중에서 꿀 탄 쪽을 유안의 앞에 놓아주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류지우가 디저트용 나이프를 들어 두툼한 다쿠아즈를 먹기 좋게 한 입 크기로 자르기 시작했다.

'흠, 차 맛있네.'

유안은 찻잔을 입에 대고 달달한 맛을 음미했다.

따뜻한 것이 들어가니 마음이 한결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류지우가 디저트 포크로 산딸기 잼이 많이 든 다쿠아즈 조각을 찍어 건넸다.

유안은 별생각 없이 받아들었다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이거 뭔가··· 내가 윤슬이 챙겨줄 때 느낌인데?'

기청해의 저주 같은 스킬을 어떻게 풀어줄지 정신이 팔려 있느라 주변을 세심히 둘러보지 못했는데, 확실히 사람들이 자꾸 어린애 돌보듯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뭐, 편하니까 됐나?'

유안은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기들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니 그들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서라도 태클을 걸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맛있다. 커다란 마카롱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식감이 다르네.'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폭신폭신한 다쿠아즈를 씹어 삼킨 유안이 민들레 차로 입가심했다.

그리고 이제야 차를 마시기 시작한 류지우를 바라보며 말문을 텄다.

"기청해 씨 말입니다."

"네."

"시한부랍니다."

"···예?"

"그래서 던전을 제대로 공략할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비조 길드 소유의 S급 던전이 심해 던전 하나뿐이라 다행입니다. 나머지 던전들은 A급 이하이고, 물 저항 스킬이 없어도 공략할 수 있으니 크게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기청해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오래 고민했지만, 그냥 평범하게 시한부 컨셉을 밀고 가기로 했다.

'본인도 스킬 널리 알려지는 건 꺼리는 눈치였고.'

비조 길드장이 가진 스킬에 대한 정보를 숨기면서 던전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납득시킬 방법은 몇 없었다.

일단 이유안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그럴싸한 게 시한부 컨셉이었다.

"젊은 나이에 참 안타깝게 됐습니다."

"시간이··· 얼, 마나 남은 건데요···?"

"글쎄요. 한두 달?"

얼마 안 남았다고 하면 던전 공략에 더 박차를 가하지 않을까 싶어서 기간을 짧게 말해보았다.

유안이 오늘 저녁 메뉴를 말하듯 대수롭지 않게 굴자, 맞은편에 앉은 류지우만 당혹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비조 길드장이··· 죽으면, 비조 길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직원들은 이미 다 해고한 모양이더라고요. 뭐라더라··· 병들어서 나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댔습니다."

기청해는 그런 말 한 적 없지만, 알 게 뭔가.

유안은 오늘따라 줄줄 잘 나오는 거짓말로 능수능란하게 류지우를 혼란 속에 밀어넣었다.

"길드··· 비조 길드를 이어갈 후임자는 있습니까?"

"음, 일단 길드 건물은 제가 받기로 했습니다."

"······예?"

기청해는 유안에게 건물을 넘기겠다고 확언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계약서는 완성되어 있으니 도장만 찍으면 끝날 증여 절차였다.

"비조 길드장이···, 비조 길드장과 얘기를 좀 나눠봐야겠습니다."

"예, 그러십시오. 수업이 방금 막 끝났을 거라 아직 미술관에 있을 겁니다."

"혹시 갑자기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어서인가요?"

"헌터 협회장이셔서 그런지 헌터의 마음을 정말 잘 아시는군요. 정확합니다."

기청해는 그냥 재미로 미술 수업 하는 것 같았지만, 알 바 아니었다.

순식간에 비조 길드장을 가련한 비극 서사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린 유안은 민들레차나 홀짝홀짝 들이켰다.

*

헌터 협회가, 아니, 협회장이 발칵 뒤집혔다.

기청해의 시한부 소식을 들은 류지우는 사색이 되어서 강남점으로 돌아갔다.

'국내 3대 길드 중 하나가 두 달 뒤에 사라지게 생겼으니까 심란하긴 하겠다.'

정작 일을 친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청포도 다쿠아즈를 먹고 있었다.

자꾸 생각나는 맛이라 포크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협회장님이 너무 큰 오해를 한 것 같아서 걱정이야."

"웃음기나 지우고 말하시죠. 그리고 완전히 오해는 아니지 않습니까. 기청해 씨 당분간 요양해야 하는 것도 맞고, 이대로 두면 죽는 것도 맞고, 비조 길드는 제 소유가 될 것도 맞으니까."

"이제 보니 이유안 사장이 제일 큰 오해를 하고 있었어."

"저한테 목숨빚 진 거 잊지 마시죠."

유안은 먹음직스러운 비조 길드를 어떻게 리모델링할지 벌써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해민이가 지금 하는 일 마무리되면··· 아니다, 혹시 모르니까 미리 의뢰 넣어놔야지. 다른 사람이 채 가면 안 돼.'

강해민에게 시간 날 때 카페에 들르라는 연락을 넣은 유안이 기청해를 흘긋 바라보았다.

중앙 카페에 온 이후 계속 기분이 좋아 보이는 기청해는 시한부라는 걸 믿을 수 없는 몰골이었다.

"아픈 척 좀 하시죠. 류지우 씨가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닐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건강해 보이면 별롭니다."

"아프지 않은데 어떻게 아픈 척을 하겠어."

"지금 잠깐 멀쩡해졌다고 스킬 쓸 생각은 마십시오. 저는 분명 경고했습니다. 다음에 또 쓰러지면 안 살려줘요. 장례식장부터 알아볼 겁니다."

[바다의 부름] 스킬은 시전자의 몸을 천천히 갉아먹는 것이었다.

스킬 정보를 확인한 유안은 청해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이미 만들어진 종속들과의 연결을 단번에 끊어내는 건 신체에 무리가 갈 테니, 아주 조금씩 천천히 끊어내라고.

그것을 전부 끊어낼 때까지 스킬 쓰는 것을 금지시켰다.

마나를 사용하는 자체로 몸에 무리를 줄 수도 있으니 [바다의 부름] 말고 다른 스킬도 금지였다.

기청해는 순순히 유안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진짜 미술관에 방 하나 내줄 테니까 이 근처에서 벗어나지 마세요. 비행기 타고 도망가면 미술관 기둥에 아예 묶어놓을 겁니다."

"우리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렇게 거친,"

"기청해 씨가 저한테 준 선물도 방에 같이 넣어드리겠습니다."

유안이 기청해의 헛소리를 끊어내며 말했다.

비조 길드장이 가증스럽게도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선물에 생명력 넣은 거 다 압니다. 그림 그릴 때도 조금씩 넣었을 거고. 본인 고사를 본인이 지내고 계셨던데."

"이렇게 내 비밀만 다 밝혀지는 거야?"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바다의 부름]을 시작으로 비조 길드장의 스킬을 전부 확인한 유안은 기청해가 여태 왜 그렇게 선물을 줬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푸른 숨결].

아이템에 자신의 생명력 일부를 불어넣는 스킬이었다.

'설마하니 제 수명 깎아가며 선물을 갖다 바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우리 카페를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생각하니 또 어이가 없어서 기청해를 노려보았다.

눈빛만으로 유안의 생각을 읽은 청해가 제 잘못이 아니라는 듯 손바닥을 내보이며 변명했다.

"이유안 사장한테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했잖아. 그걸 그대로 뒀다가는 중앙 카페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지 않겠어? 중앙 카페는 이유안 사장을 주축으로 움직이니까. 카페가 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서 선물을 준 거야.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구구절절 이유도 길었으나 유안은 금방 납득했다.

'뭐, 중앙 카페가 최고긴 하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헌터는 있어도 한 번만 방문한 헌터는 없다는 카페이다.

제 가게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유안은 기청해 앞에서 가슴을 당당히 폈다.

'조금만 기다려라, 기청해. 내가 꼭 멀쩡한 인간으로 고쳐서 우리 카페 음식 먹이고 만다.'

중앙 카페 음식에 감탄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기청해의 얼굴을 상상하니 기분이 부쩍 좋아졌다.

*

"무슨 일이냐···?"

유안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강해민이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바쁜 일을 대강 마무리하고 오긴 했지만, 어쩐지 일거리를 더 받게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해민아, 창고 짓는 건 어떻게 돼 가?"

"던전산 휘발유 보관할 통이 필요해서 시간이 좀 지체된 거 빼면 문제 없어."

휘발유 통은 류민희과 김주현이 해결해주기로 했다.

비슷한 아이템을 만들어 본 두 사람은 지금 전국을 돌며 중앙 카페의 창고 부지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야 할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협회 건물도 거의 다 지었지?"

"···어."

기껏 지어둔 건물을 다시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순 들었지만, 강해민은 일단 사실대로 답했다.

유안이 싱긋 웃는다.

"그거 다 끝나면 우리 본점 지하실 만들어주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어, 계약서도 썼잖아. 안 잊어버렸다."

"해민아. 너 리모델링도 좀 할 줄 알았던가?"

"······가볍게 배우긴 했지."

역시 믿음직스러운 친구다.

유안은 더 환하게 웃으며 해민에게 다쿠아즈 세트를 내밀었다.

"뇌물 안 받는다."

"친구로서 주는 선물인데 섭섭하게 왜 그래."

"···알았어."

"그래서 말인데, 해민아."

이유안이 본격적으로 일감에 대한 물꼬를 트자 강해민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럴 줄 몰랐던 건 아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살짝 어지러웠다.

"또 뭔데···."

"나한테 건물 큰 거 하나가 생길 것 같은데 지하실 공사까지 다 끝나면 리모델링 작업 좀 해줄 수 있나 싶어서."

"···건물을 통째로 리모델링 해달라고?"

"음, 최상층 빼고."

"······일단 사이즈를 봐야 할 것 같은데. 던전 부산물로 지은 건물이지?"

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던전 부산물로 만든 거면··· 아예 부수고 새로 짓는 게 덜 까다로울지도 몰라.'

적당한 크기의 건물이라면 철거도 고려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강해민 앞에 들이밀어진 사진은···.

"이거 비조 길드잖아."

"응, 맞아. 그 건물 이제 내 거거든."

"뭐···?"

두근두근

강해민의 눈이 충격으로 동그래졌다.

유안은 개의치 않고 사진 속 비조 길드 건물을 손가락으로 콕 집어 가리키며 말했다.

"내 거야."

곧 그렇게 될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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