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37)

"친절해라. 굶길 줄 알았는데 식사는 잊지 않고 챙겨주다니."

"윤슬이가 내일 수업 기대하고 있습니다. 준비 많이 해두세요."

"수업 준비만 끝내면 풀어주는 거야?"

꽤 답답하긴 했나 보다.

안색은 제주에 있을 때보다 좋아졌지만 밖에 나가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안은 기청해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비조 길드 건물에서 제가 본 게 뭐였는지 설명할 때까지 안 풀어줍니다. 꿈도 꾸지 마시죠. 어차피 여기에 남는 방도 많으니 침대 정도는 놔 드리겠습니다."

"너무해."

"기청해 씨한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유안은 징징거리는 청해의 말을 딱 잘라내며 돌아섰다.

밥을 전해줬으니 할 일은 끝났다.

기청해의 입이 제대로 열릴 때까지 다시 방치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카페로 복귀하려는 유안의 발목을 붙잡는 목소리였다.

"···저녁 시간만 지나면 한산해집니다."

"어린이가 몇 시에 잠들더라."

"오늘 던전 들어갔다 왔으니까 열 시 되기 전에 푹 잠들 겁니다."

"직원들도 다 퇴근시키고. 어른이 보기에도 썩 유쾌한 장면은 아닐 거야."

기청해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정에 카페 정문 앞에서 뵙겠습니다."

유안은 약속 시간을 정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뭘 보여주려고 이래.'

비밀

모두가 잠든 시각, 유안은 기청해를 불러내기 위해 헌터 디바이스를 들었다.

'아, 맞다. 이 인간 번호 저장 안 했지.'

그리고 이내 기청해의 헌터 코드를 아직도 저장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연락이야 늘 이윤슬의 디바이스를 통해 했으니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는데, 지금은 윤슬이 디바이스를 인벤토리에 넣은 채 자고 있었다.

'자정에 정문 앞에서 보기로 했지만···.'

윤슬도 이르게 잠들었고, 직원들도 저녁 식사 후에 바로 퇴근해서 생각보다 일찍 시간이 났다.

기청해가 뭘 보여주려는 건지 궁금해서 약속 시간을 앞당기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미술관에 있겠지.'

목 마른 유안은 스스로 우물을 파기 위해 중앙 카페를 나섰다.

박물관과 미술관 건물을 카페 근처에 지어놔서 오가기 힘들지는 않았다.

"기청해 씨."

다행히 비조 길드장은 1층에서 작품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위층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유안은 이제 계단이라면 치가 떨렸다.

"약속 시간이 되려면 멀었는데. 날 빨리 보고 싶어서 일찍 온 거야?"

"헌터 코드 내놓으시죠."

"드디어 이유안 사장이 내 번호를 따 가는 건가. 영광이야."

"얼른 디바이스 꺼내십시오."

기청해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인벤토리에서 제 헌터 디바이스를 꺼냈다.

돌고래, 물고기, 상어, 꽃게, 조개 스티커가 디바이스 후면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윤슬이가 했습니까?"

"미적 감각이 뛰어난 어린이야."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난 마음에 들어."

비조 길드장이 디바이스 머리꼭지에 붙은 푸른색 리본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 본인이 만족한다니 됐다.'

유안은 화려하게 꾸며진 기청해의 디바이스에 제 것을 맞댔다.

잠시 기다리자 서로의 헌터 코드가 자동으로 전송되었다.

"뭐라고 저장할 거야?"

"뭘 기대합니까."

이유안은 별다른 수식어 없이 '비조 길드장'이라 저장한 화면을 보여주었다.

"정 없어."

"비상시 생체 신호 어디로 전송되게 해 놨습니까?"

비상 연락망 등록은 헌터들에게 필수였다.

지난번 류지우가 위험에 빠졌을 때도 유안의 코드를 등록해 놓았기에 상황이 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유안 역시 비상 연락망에 카페 직원들은 물론이고 단골 손님들의 코드까지 모조리 저장해두었다.

'서정원 씨만 등록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고 우르르 달려든 거지만···.'

어쨌든 비상 연락망은 중요하다.

유안은 청해의 헌터 디바이스를 빼앗아 연락처에 들어갔다.

텅 빈 목록의 최상단에 이윤슬의 번호 하나만 저장된 것이 보였다.

'이러니까 아무도 안 찾아가 보지.'

친구가 없을 걸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유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헌터 코드를 기청해의 비상 연락망에 넣었다.

"연락 재깍재깍 안 받으면 바로 찾아갈 겁니다. 그렇게 아시죠."

"그럼 이유안 사장이 보고 싶을 때마다 전화를 안 받으면···."

"허튼 수작 부릴 생각은 마시고요. 윤슬이가 걱정합니다."

"알았어."

순순히 대답한 기청해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자신의 헌터 디바이스를 자꾸 매만졌다.

연락처에 한 명 더 추가된 게 좋은 모양이었다.

"이제 나갑시다. 카페에 아무도 없어요."

"게이트 근처에도?"

"예. 중앙 던전에는 야간 파밍 오는 헌터도 없어서 이 시간에는 조용합니다."

강남 던전은 늦게까지 영업하는 중앙 카페 강남점 때문에라도 밤샘 파밍을 하는 헌터들이 꽤 있다.

그러나 중앙 던전 근처는 밤이 되면 베드타운처럼 한적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럼 게이트 바로 앞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카페 뒷마당이나 정문 근처로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유안은 앞서 나가는 기청해의 뒤를 따르며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지금부터 보여줄 건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예."

"이유안 사장이 날 구하러 와줬으니 보여주는 거고."

"비밀 하나 밝히는 걸로 목숨값 퉁치려는 건 아니겠죠?"

"내 길드 건물이 많이 탐나나 봐."

기청해는 평소와 다름 없는 말투로 대화를 이어가며 중앙 던전 게이트 앞에 섰다.

던전 내부에 들어갈 생각은 없는지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게이트 근처를 유심히 살펴보기만 한다.

"처음 등장한 던전이었지."

"그렇죠."

20년쯤 됐을 것이다.

"여기서 죽은 사람도 꽤 있어."

"이번에 전수조사 끝나서 사망자 명단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전 헌터 협회장의 부정이 드러나면서 중앙 던전 발생 당시 피해를 재수사했다.

사망자는 없다고 보도했던 과거와 다르게 상당수의 민간인이 죽은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유안 사장은 귀신을 믿어?"

"···할로윈 끝났습니다."

"던전 게이트 근처에는 죽은 영혼이 고이기 마련이지. 게이트 내부로 들어가면 영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지니 보여주는 게 더 쉬울 테지만, 이유안 사장은 던전 안 들어갈 거잖아."

"예."

"현명한 선택이야."

취미로 던전 낚시를 즐기는 S급 헌터가 던전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안을 칭찬했다.

그리고 게이트 바로 옆의 지면을 향해 손바닥을 펼친다.

'스킬을 쓰려는 건가?'

유안의 생각대로 기청해의 손 끝에서 눈이 시릴 만큼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빛이 지면에 닿자 이윽고···.

촤악!

단단한 땅 위로 푸른 물줄기가 솟구친다.

솟아오른 물은 의지를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사람?'

인간 모습을 취한 물덩이를 향해 기청해가 붓을 휘둘렀다.

미술 수업을 진행할 만큼 노련한 솜씨를 가졌으니 물덩이에 색을 입히는 것도 금방이었다.

"이게··· 뭡니까?"

완성된 사람은 피투성이에 헤진 옷을 입고 있었다.

"죽기 직전의 모습이야."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물덩이에게 기청해가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주인님.

스킬로 만들어진 물덩이가 청해 앞에 무릎을 꿇으며 경의를 표했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는 유안이 비조 길드에서 들은 것과 같았다.

*

'허···.'

유안은 밤의 일을 곱씹으며 캐러멜도 잘근잘근 씹었다.

뭐라도 좋으니 단 걸 입에 넣어야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비밀을 알려줬으니까 이유안 사장도 하나쯤은 말해줘야 하는 거 아냐?"

"전 비밀 없습니다."

"거짓말."

이유안은 눈앞의 기청해를 노려보았다.

중앙 카페 사장을 심란하게 만든 당사자는 팔자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스킬 안 쓰려고 누워 있던 거라면서요."

"응. 그런데 이유안 사장이 날 깨우러 왔으니 어쩔 수 없지."

"곧 숨 넘어갈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안 넘어갈 가능성도 있기는 했어."

기청해는 죽은 영혼을 불러와 자신의 종속으로 만드는 스킬을 갖고 있었다.

제주에 있는 심해 던전을 최초 공략하고 얻은 스킬은 스킬보다 저주의 형태에 가까웠다.

'스킬을 계속 지니고 있으면 몸이 생명력을 잃고 죽은 자와 비슷한 상태가 된다고.'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고 했다.

살아 움직이되 산 사람처럼 지낼 수 없는 형벌에 빠진 것이다.

유안은 비로소 기청해가 그동안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예 끊어낼 방법이··· 오랫동안 스킬 안 쓰고 버티는 것밖에 없습니까?"

"이런저런 방법을 전부 시도해보고 마지막 남은 수였지. 결국 실패했지만 말이야."

"···저 때문입니까?"

"아냐. 이유안 사장이 깨우지 않았어도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방법이기는 했어."

그래도 한 번 시도해보고 싶어서 종속들과의 연결을 전부 끊고 가사 상태로 잠들어 있던 것이다.

"혹시 모르잖아. 그 방법이 성공하면 나도 이유안 사장이 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중앙 카페 음식 먹고 싶어서 그 위험한 짓을 하신 겁니까?"

"위험하지는 않았어. 어차피 내 종속들이니 나를 해칠 일은 없고."

유안은 청해의 말을 믿지 못했다.

비조 길드에서 본 기청해의 종속들은 누가 봐도 위험하다 느낄 만큼 날뛰고 있었다.

"스킬 정보 공유해 주십시오."

"음, 이유안 사장이 비밀 하나 알려주면."

"어제 드린 도시락에 살짝 탄 고기 하나 있을 겁니다. 그거 사실 제가 일부러 넣었습니다."

"나쁜 사장님이야."

탔다기보다는 과하게 익은 정도였지만.

유안은 비밀 같지도 않은 비밀을 하나 넘기고 기청해의 스킬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다의 부름(S급)]

육신을 잃은 영혼에 바다를 깃들게 해 종속으로 쓸 수 있다.

단, 시전자 역시 바다의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

단서가 없었다면 L급까지 올라갈 수도 있었을 스킬이다.

떠다니는 영혼만 구한다면 종속을 무한대로 만들 수 있으니 강력하지만, 아랫줄에 붙은 한 문장 때문에 끔찍한 스킬이 되었다.

"이거 어디서 얻었다고 했죠?"

"흑등고래의 요람."

기청해가 어제 받은 도시락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비조 길드와 제일 가까운 심해 던전이죠."

"맞아."

유안은 곧장 던전 박물관으로 가 [흑등고래의 요람] 던전 전시실을 꼼꼼히 확인했다.

몇 가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으나 새로운 정보가 훨씬 많았다.

이유안은 오전 시간을 전부 할애해 심해 던전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외워버렸다.

*

서정원에게 본점 2층을 싹 비워달라고 부탁한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대형 원탁을 꺼냈다.

일반 손님들은 오늘 하루 2층에 올라올 수 없었다.

손님들 대신 유안이 부른 사람들이 원탁 가장자리 의자를 가득 채웠다.

"유안~, 오늘의 티 타임이야?"

초대받은 손님 중 하나인 셀라가 원탁 위의 디저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야."

유안이 고개를 저었다.

테이블이 너무 휑하다며 홍소라와 방재이가 음식을 세팅해준 것뿐이지 한가롭게 티 타임을 즐길 목적은 아니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해서 불렀습니다."

상석에 앉은 유안이 진지하게 말하자 상급 헌터들이 일제히 시선을 집중시켰다.

수창과 새로 길드의 헌터들, 류지우와 헌터 협회 직원들, 던전 부산물 파밍 전문 길드인 이니티움의 길드장과 간부진, 그리고 평소 중앙 카페와 연이 깊은 B급 이상의 헌터들이 전부 한 자리에 모였다.

유안은 작게 심호흡하고 준비한 심해 던전 지도를 펼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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