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37)

그러나 비상구 출입문이 열린 후에는 건물에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이거 몇 등급짜리 아이템이더라. 힘 세게 주면 S급 피부에도 박히지 않을까.'

마음을 정한 유안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비상구 출입문이 더 활짝 열렸다.

텅!

문이 벽에 부딪치며 큰 소리가 났다.

홀 전체가 울리며 계단 쪽으로는 길게 메아리가 맺혔다.

유안이 손 안의 단도를 고쳐 쥐었다.

밝혀지는

텅, 텅, 텅!

이유안이 계단을 한 층씩 오를 때마다 반겨주듯 그 층의 비상구 출입문이 열렸다.

"허··· 허억···."

출입문의 환호가 있건 말건 유안은 죽을 것 같았다.

몇 층 올라가지 않았을 때부터 다리가 후들거렸고, 숨이 가빠왔다.

'운동 좀 하고 살 걸···!'

뒤늦게 중앙 카페 직원들의 잔소리가 떠올랐으나 유안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층을 거듭해 올라갈수록 강렬하게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냄새 때문이었다.

'이거··· 몬스터 살점 썩을 때 나는 냄새인데.'

유안은 불쾌함을 견디지 못하고 옷소매로 코를 가렸다.

'위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가뜩이나 계단을 오르느라 숨이 찬데 호흡도 마음껏 할 수 없으니 더 힘겨운 것 같았다.

낑낑대며 계단을 올라 땀 범벅이 된 몸으로 드디어 최상층에 도착했다.

"하···."

그래도 어떻게 오긴 왔다.

중간에 몬스터나 그 비슷한 무언가가 튀어나올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몸에 쌓인 피로도가 상당했다.

'기청해만 납치하면 바로 쉬러 가야지.'

이유안은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최상층 복도로 들어섰다.

복도에 발을 디디자 아예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썩은내가 풍겼다.

'윽, 막을 만한 거 없나?'

옷소매로 입과 코를 가리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유안은 인벤토리를 뒤져 인형 하나를 발견했다.

'이거··· 기포 마셔도 되는 거였지.'

기청해가 선물해준 상어 인형을 꺼낸 유안은 그것이 내뿜는 기포에 의존하여 한 걸음씩 나아갔다.

주변은 온통 썩은내가 나는데 유안 홀로 청량했다.

최상층은 넓었으나 비조 길드장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안은 자신의 감을 믿으며 제가 예전에 썼던 방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가는 길에 무언가 마주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복도는 기이할 만큼 깨끗하고 고요했다.

이렇게 잘 정돈된 곳에서 말로 형용하기 힘든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비조 길드장님!"

그래도 몇 번 묵어봤다고 익숙해진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기청해 씨?"

안쪽의 커다란 침대에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기청해가 보였다.

단순히 잠을 자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당황한 유안은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입가에 대고 있던 상어 인형마저 떨어트렸다.

비조 길드장에게 달려가 급하게 코 앞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숨은··· 쉬고 있는데."

미세한 바람이 느껴진다.

가슴 쪽에서도 작지만 분명한 심박이 콩콩 울리고 있었다.

"기청해 씨, 일어날 시간입니다. 내일 윤슬이 수업 있는 거 까먹은 건 아니겠죠."

오싹함을 떨쳐내기 위해 유안은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러나 대답 대신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냄새만 심해질 뿐이었다.

냄새는 확실하게 기청해의 몸을 근원으로 하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한테 냄새 어쩌고 하던 게 설마 이건가?'

유안은 기청해가 초면부터 예의 없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최근에는 냄새가 난다느니 지독하다느니 하는 말을 일체 꺼내지 않았지만,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기청해를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들을 각오를 해야 했다.

본능적으로 짐작이 갔다.

기청해가 늘 말하던, 그 지독한 냄새라는 것이 바로 이것임을.

'나한테 나던 냄새가 많이 약해졌다고 했지. 요즘은 그런 말 안 하는 거 보니까 아예 사라진 걸 수도 있고.'

내 냄새는 어떻게 사라질 수 있었던 거지?

유안은 비조 길드장이 자신에게 보인 태도를 떠올리며 방법을 찾아내려 애썼다.

어떻게든 이 냄새를 제거해야 기청해가 눈을 뜰 거라는 실마리가 잡혔다.

그때였다.

우드득, 드드득.

활짝 열어둔 문 바깥에서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아무도 없었는데?'

유안은 잠시 협탁에 내려두었던 단도를 다시 붙잡고 침실 문을 빠르게 닫아버렸다.

스으윽, 지익···.

닫힌 문에 귀를 대고 집중하자 무언가 질질 끌리면서 명확하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이유안은 침착하게 문을 잠갔다.

이러면 잠깐은 안전···.

쾅, 쾅, 쾅!

기다렸다는 듯 바깥의 것들이 일제히 나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오싹해진 유안은 후다닥 뒷걸음질쳐 침대 쪽으로 돌아갔다.

기청해는 여전히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주인님주인님주인님···.

설상가상으로 바깥에서는 이상한 소리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몸에서는 낼 수 없는, 쇠끼리 부딪치고 긁히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중에는 묘하게 리셉션 직원을 닮은 것도 있었다.

"비조 길드장님, 빨리 좀 일어나 보시죠!"

다급해진 유안은 시든 꽃처럼 눈을 감은 기청해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힘을 주는 대로 흔들리는 몸뚱어리는 S급 헌터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아, 진짜···. 기청해!"

바깥의 것들이 두꺼운 나무 문을 금방 부술 것 같았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 제 인벤토리를 확인하던 유안의 눈에 기청해의 선물들이 들어왔다.

알고 지낸 기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는데 이것저것 받은 게 워낙 많았다.

'대부분 잡동사니라 인벤토리 구석에 처박아두긴 했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다.

유안은 인벤토리를 거꾸로 뒤집는 것처럼 기청해에게 받은 선물들을 우르르 쏟아냈다.

곱게 눈을 감은 비조 길드장의 얼굴 위로도 아이템 몇 개가 톡톡 떨어졌다.

"···너무 거칠게 깨우는 거 아냐?"

그리고 거짓말처럼, 잠시 후에 기청해가 눈을 떴다.

지금만은 저 서글서글한 눈웃음이 반가웠다.

"빨리 일어나서 저거, 밖에 있는 것들이나 좀 처리하시죠! 집에서 대체 뭘 키우시는 겁니까?"

"따로 키우는 건 없어."

청해가 허리를 세우자 몸 위에 올라가 있던 아이템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다행히 침대 아래로 떨어진 것은 없었다.

기청해는 자신이 만들었던 조개 목걸이 하나를 손목에 감았다.

"그럼 밖에 저것들은 뭡니까?"

살아있는 사람인 것 같지는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유안과 다르게 기청해는 아주 여유로웠다.

광고 모델처럼 가볍게 기지개도 켜고 사뿐히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침실 문을 부드럽게 열어버렸다.

"그거 그렇게 막 열면···!"

수가 한둘이 아닌 것 같았는데.

유안이 기청해 뒤쪽으로 샥 숨으며 몸의 긴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튼튼한 비조 길드장을 방패 삼아 이 건물을 탈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불쾌하게 코를 찌르던 지독한 냄새도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것이 평범하게 돌아와 있었다.

"이유안 사장이 나 대신 악몽을 꿔준 모양이야."

기청해가 느물느물하게 말했다.

*

"사, 사장님 화나셨는데요···?"

"음, 그러게요. 삐쳤을 때랑은 느낌이 확 다르네요."

"보, 보나마나··· 비조 길드장님이 속 박박 긁었겠죠···?"

"가능성 높죠. 기청해 씨 패시브 스킬이잖아요. 이 사장님 미치게 만들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는 기청해와 함께 중앙 카페에 돌아온 유안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비조 길드에서 생긴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부자연스럽게 뛰었다.

'기청해··· 제대로 된 대답은 하나도 안 해주고.'

꿈을 꾼 거라느니 피곤해서 헛것을 보았다느니, 자꾸 이상한 말만 해대던 기청해는 중앙 카페 사장 권한으로 미술관에 구금된 상태였다.

유안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그 안에서 나올 수 없었다.

'좋은 그림 많이 들여놨으니까 그거 보면서 성격 좀 고쳐라.'

이유안은 기청해가 말을 돌리지 않고 진실을 제대로 밝혀야 미술관에서 풀어줄 생각이었다.

사실 건물을 잠가둔 것도 아니고, 기청해를 꽁꽁 묶어둔 것도 아니니 마음만 먹으면 나올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러나 단서 조항을 걸었더니 청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미술관에 얌전히 갇혀 주었다.

'한 발짝이라도 나오기만 해 봐. 중앙 카페에 얼씬도 못하게 만든다.'

윤슬과도 만날 수 없게 할 거라고 선언했다.

어린이가 친구 한 명을 잃고 속상해할 수도 있지만, 기청해 대신 다른 친구 백 명을 더 찾아줄 생각이었다.

유안은 이번에도 진실을 듣지 못하면 기청해를 제 삶에서 완전히 도려낼 각오를 했다.

"···버터 핫 초콜릿입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이유안은 방재이가 가져온 잔을 받았다.

마시기 좋은 온도로 식어 있어서 바로 입을 가져다 대어도 괜찮았다.

유안은 제 기분이 나쁜 것을 보고 배려해주는 직원들에게 미안해 최대한 미소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눈치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

"저 그렇게 기분 안 나쁩니다."

"···손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습니다."

재이가 부들거리는 유안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리 꽉 쥐어도 잔이 깨지는 것보다는 유안의 손이 망가지는 게 빠를 것이다.

'아···, 자꾸 그 생각이 나서.'

긴장을 풀어보려 해도 공포스러운 일을 막 겪은 후라 진정이 쉽지 않았다.

회귀 전, 던전에 들어가서 우연히 몬스터를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런 기분은 던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영영 느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청해 때문에 다 글러먹었다.

"역시 한 대 정도는 때렸어야 했는데."

"···사장님?"

"아닙니다, 재이 씨. 음료 고마워요."

"······비조 길드장님을 때리실 거라면 윤슬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방재이는 진지하게 윤슬의 손을 빌리라고 조언했다.

확실히··· E급 헌터보다는 등급 외 어린이의 손이 훨씬 매울 것이다.

"좋은 생각입니다. 어차피 윤슬이 올 때 됐죠."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몇 개를 골라두었다.

어린이에게 칼을 잡게 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무해하게 생긴 장난감들을 선정했다.

개중에는 던전산 코코넛도 있었다.

'S급 헌터는 머리도 S급인지 궁금한데.'

이유안은 기청해의 머리 위로 코코넛을 내리치는 상상을 하며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

아르네스 던전에서 실한 던전산 벼를 파밍해 온 윤슬 덕분에 저녁 식탁이 풍성해졌다.

좋은 쌀로 밥을 지으니 윤기가 자르르 흘러서 반찬으로 뭘 놓아도 완벽한 한 끼가 되었다.

고기와 채소를 볶고, 강남점의 버섯이 듬뿍 들어간 된장찌개를 가운데에 올렸다.

된장 역시 강남점에서 받아온 것이었다.

셀라는 이제 발효 장인 수준으로 모든 종류의 발효 식품에 통달했다.

"아저씨이, 미술관에 친구 왔다며!"

"응, 맞아."

"그럼 친구도 불러서 밥 같이 먹어야지!"

"기청해 씨는 내일 수업 준비하느라 바빠서 나중에 먹겠대."

"우응··· 그래···?"

어린이는 유안이 즉석에서 뽑아낸 거짓말에 순수하게 속아 넘어갔다.

"윤슬, 기청해 씨는 내가 챙겨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밥 먹어."

"응! 알았어!"

유안은 제 거짓말을 참말로 바꾸기 위해 도시락 통에 밥과 반찬 몇 가지를 쌌다.

어차피 갖다줘도 먹지는 않을 테지만, 음식 냄새를 온통 풍겨놓고 모르쇠하기에는 민족 고유의 양심이 쿡쿡 찔렸다.

먹을 걸로 야박하게 굴면 벌 받는다.

운영 시간이 지나 불이 꺼진 미술관에는 관람객이 하나도 없었다.

기청해를 찾아 교실이 있는 층까지 올라간 유안은 미술 교실에만 환하게 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비조 길드장님, 사식입니다."

유안은 색종이를 오리던 기청해에게 도시락 통을 건넸다.

청해는 가위를 사뿐히 내려놓으며 묵직한 통을 가볍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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