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37)

"아저씨··· 친구가 전화 안 받는데?"

이윤슬이 무척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게 늘어지던 신호음이 뚝 끊기고, 결국 통화가 부재중으로 넘어갔다.

유안은 침착하게 윤슬에게 제안했다.

"다시 한 번 해 볼까?"

"응!"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끝내 연락이 되지 않았다.

'뭐야. 뭘 하고 있으면 애가 연락하는 것도 안 받아?'

기청해가 윤슬의 연락을 받지 않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연락두절

"받을 때까지 계속 걸어볼까?"

윤슬이 눈을 반짝이며 유안에게 물었다.

"아냐, 윤슬. 그냥 연락 올 때까지 기다리자."

"그치만··· 친구한테 무슨 일 생긴 거면 어떡해?"

"튼튼한 어른이니까 괜찮아. 계속 연락 안 되면 내가 찾아가 볼게. 윤슬이는 걱정하지 마."

"으응···."

어린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유안의 말을 잘 들었다.

작은 디바이스를 내려놓는 팔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윤슬아, 이거 먹을래?"

"응···? 그게 뭔데?"

"윤슬이가 좋아하는 맛 사탕이에요."

서정원이 이윤슬을 달래기 위해 간식으로 유혹했다.

윤슬은 캐러멜을 좋아했으나 먹다가 이가 빠지고 나서는 겁이 났는지 슬금슬금 멀리하게 되었다.

그래도 가끔 태피류 사탕을 보면 아련한 눈빛을 보내고는 했다.

그 마음을 안 서정원이 홍소라와 합심하여 캐러멜 맛 사탕을 만들었다.

쫄깃거리지는 않지만 진하고 풍부한 향기가 났다.

"우아···!"

입안에 갈색 사탕을 쏙 넣고 맛을 본 어린이는 활기를 되찾았다.

작은 볼이 사탕 때문에 볼록해졌다.

"마시써!"

"밥 먹기 전에는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응! 근데 이거··· 친구도 좋아할 텐데······."

기껏 사탕으로 주의를 분산시켰지만 원점으로 돌아왔다.

비조 길드장과 정이 많이 든 윤슬은 맛있는 걸 먹을 때마다 기청해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 인간한테 줘 봤자 먹지도 않을 걸.'

유안은 기청해 때문에 속상해하는 윤슬을 보며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감히 어린이를 슬프게 만들다니··· 연락이 닿는 즉시 욕을 한 바가지 부어줄 생각이었다.

"윤슬, 디바이스 이리 줘 봐."

"으응."

이유안은 일부러 윤슬이 보는 앞에서 기청해에게 문자를 남겼다.

[문자 확인하면 바로 가게로 오십시오. 윤슬이가 기다립니다.]

간결한 내용이었으나 어린이를 조금이나마 안심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이제 금방 답장 올 거야. 걱정하지 마."

"응!"

"오늘은 기청해 씨 말고 다른 친구들 불러서 놀까?"

"그래도 돼?"

"당연하지. 친구들이랑 같이 레스토랑 가서 밥도 먹고, 박물관이랑 미술관도 구경해. 새로 들어온 전시품 많더라."

유안은 아이의 하루 스케줄을 짜 주었다.

기청해가 오지 않아도 윤슬이 즐길 거리는 많았다.

아이들이 잔뜩 놀러오자 중앙 카페도 바빠졌다.

그래도 윤슬이 대장처럼 어린이들을 통솔하고 다녀서 안전 사고가 생기지는 않았다.

다만 윤슬을 독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는 했다.

"윤슬이는 내가 제일 좋다고 했어."

"거짓말이야! 윤슬이는 나중에 나랑 옆집에 살 거야."

"난 같은 집에 살 건데? 윤슬이가 같이 살자고 했어."

일전에 윤슬의 초상화를 그렸던 아이가 맹렬한 눈빛으로 다수의 어린이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윤슬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런 상황이 싫지 않은지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말리지는 않았다.

"윤슬아! 너 누구랑 같이 살 거야?"

"응···? 으음··· 다 같이 살면 되지 않을까? 엄청 큰 집에서!"

"···난 그거 싫어."

초상화 어린이가 울상을 지으며 윤슬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알았어. 그럼 너랑만 살게. 대신 둘만 있으면 심심할 테니까 매일 친구들 초대해서 같이 놀자!"

질투심 많은 친구를 울리기 싫었던 윤슬이 작게 소곤거렸다.

기어이 동거 약속을 받아낸 아이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어린이들의 이윤슬 쟁탈 치정극을 빤히 바라보던 이유안이 성큼성큼 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윤슬의 통통한 양 볼을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윤슬, 너 나랑 평생 살기로 했잖아."

"어··· 아저씨이···?"

유안에게 했던 약속은 까맣게 잊고 있던 윤슬이 당황했다.

"세, 세상에··· 사장님이 애들 싸움에도 낄 줄은 몰랐어요···."

"이 사장님 표정 좀 봐요. 진심인 거 같은데."

"하하, 재밌네요."

"······."

중앙 카페 직원들이 다 들리게 쑥덕거리건 말건 이유안은 진지했다.

평생 같이 살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자신이 아닌 윤슬 쪽이었다.

친구가 좀 생겼다고 해서 곧장 팽 당할 줄은 몰랐다!

"내가 좋다며. 그래서 계속 나랑 같이 살 거라며."

"으응··· 그렇긴 한데···."

이윤슬이 눈을 데록데록 굴리다가 본점 직원들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재밌게 돌아가는 상황에 굳이 찬물을 끼얹을 생각이 없었다.

홍소라는 헌터 디바이스를 꺼내서 촬영까지 시작했다.

"그··· 음, 아저씨도 좋은 친구 생기면··· 그 친구랑 같이 사는 건 어때?"

"···윤슬."

"아! 이러면 되겠다!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세상에서 제일 큰 집 지어달라고 한 다음에 아저씨 친구들이랑 내 친구들이랑 다 같이 사는 거야. 선생님이랑 미술 선생님 방도 만들고!"

결국 동네 사람들 다 불러서 함께 살자는 소리였다.

유안은 복작복작한 집을 상상했다가 입을 꾹 다물고 윤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각이 바뀔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까.'

지금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

배달 서비스 시작 일정이 확실히 정해지자 홍소라가 헌터그램에 게시글을 올렸다.

정태영도 중앙 카페의 배달 서비스를 주제로 휴튜브에 영상을 업로드해 엄청난 조회수를 확보했다.

SNS에서의 뜨거운 관심 덕에 중앙 카페에 찾아오는 손님도 훅 늘어났다.

오픈 초창기 때처럼 매일 아침이면 정문 바깥으로 길게 줄이 뻗어나갔다.

"바, 바쁘니까 시간 엄청 빨리 가네요···."

홍소라의 말대로였다.

최근 며칠은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만큼 휙휙 지나가서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토요일이었다.

'내일이 일요일이지.'

일요일은 기청해의 미술 수업이 있는 날이다.

'이 인간 진짜 오다 죽었나?'

비조 길드장에게서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윤슬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전화를 할 때마다 부재중으로 넘어갔다.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매일 아침의 일정으로 자리잡았다.

'계속 연락 안 되면··· 이따 찾아가 보든가 해야지.'

유안은 그렇게 다짐하며 윤슬에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던전 체험 학습을 하는 날이라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윤슬, 필요한 거 인벤토리에 다 넣었어?"

"응···."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던전 가는 거 다음으로 미룰까?"

"아니··· 미술 선생님이 전화 안 받으니까."

그 좋아하는 던전 체험을 앞두고도 아이의 얼굴에서 그늘이 사라지지 않았다.

유안은 어린이를 우울하게 만든 기청해를 향해 마음 속으로 칼을 갈며 윤슬을 잘 달랬다.

"윤슬이는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미술 선생님 데리고 올게."

"어? 정말? 그럼 나도 같이 갈래!"

"아냐. 던전에서 재밌게 놀고 나오면 미술 선생님도 와 있을 거야, 윤슬."

"으응, 알았어!"

아이가 던전을 공략하는 데 세 시간 정도는 걸릴 것이니 그 안에 빠르게 제주로 향해서 기청해를 잡아오면 된다.

왕복 두 시간, 기청해 납치에 한 시간을 배분한 계획이 완성되었다.

"크흠··· 사장님···?"

"이유안 사장님."

유안이 윤슬의 인벤토리에 소모품을 이것저것 넣어주고 있는데 문 바깥의 복도에 길쭉한 사람 둘이 나타났다.

수창 길드장과 새로 길드장이었다.

꽤 오랫동안 반성을 시켰으니 오늘부터 다시 두 길드장을 인솔 교사로 쓰기로 했다.

'S급 헌터 중에서 실력 제일 좋은 둘이니까. 애 맡기기에는 딱이지.'

수창 길드장이 가끔 기행을 펼치기는 하지만, 그것도 새로 길드장과 함께 있을 때는 어느 정도 보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경멸했으나 막상 붙여 놓으면 합이 잘 맞아서 유안도 웬만하면 둘을 붙여놓으려고 했다.

"준비 다 됐으면 출발해도 될까요?"

"중앙이는 제가 챙겼어요."

차건오가 품 안의 동상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중앙은 다른 때와 다르게 배를 훌러덩 내보인 자세로 굳어 있었다.

부하1에게만 보여주는 흐물흐물한 태도였다.

"윤슬이는 무조건 후방에 두셔야 합니다. 방어력 높은 몬스터가 많이 나오는 곳이니 체력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시고요."

오늘 공략할 던전은 아르네스다.

윤슬이 평소 공략하던 던전보다는 등급이 높지만, 그래도 공격력보다 방어력이 높은 몬스터만 등장하니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중앙 카페의 마스코트가 요즘 심심해한다는 것이 던전 채택의 가장 큰 이유였다.

유안은 두 명의 인솔 교사에게 안전과 관련한 당부 사항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윤슬이 던전 체험 학습을 앞둘 때마다 겪는 일이었으니 진 선과 차건오도 불평 없이 이유안의 말을 경청했다.

아르네스 공략법 쯤이야 머릿속에 박아둔 S급 헌터들이지만 유안 앞에는 초보 헌터의 마음가짐으로 섰다.

"보스는 두 분이서만 처리하시고요. 윤슬이는 중앙이 데리고 뒤에 빠져 있게 하셔야 됩니다."

"네, 네, 선생님~."

"수창 길드장님 오늘 던전 안 들어가고 싶으신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잠깐 까불었다가 배로 돌려받은 진 선이 얌전해졌다.

"윤슬, 던전 들어가면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지?"

"안전!"

"그래."

"내가 다치면 아저씨 운다고 했으니까··· 안 다치고 안전하게 놀다 올게!"

유안은 씩씩한 어린이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정문 앞까지 배웅했다.

길드장 둘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니 유안에게 남은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가 볼까.'

연락두절 미술 선생님을 납치할 시간이었다.

*

가장 빠른 비행기로 제주도에 도착한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푸드 트럭을 꺼냈다.

지난번 보니 모래사장에서도 바퀴가 빠지지 않고 잘 달리는 것이 참 괜찮았다.

비조 길드 건물이 있는 곳까지 손수 트럭을 몰아 도착한 유안은 건물 외벽에 바짝 붙여 주차하고 트럭에서 내렸다.

'이따 다시 쓸 거니까 이대로 둬야지.'

인벤토리에서 트럭을 빼는 건 할 만했지만 다시 넣는 건 자신이 없었다.

S급 헌터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었다.

곧 자신의 것이 될 건물 홀에 들어가자 인적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뭐야. 왜 또 아무도 없어?'

지난번에는 길드원들에게 일괄적으로 휴가를 주어서 길드가 텅 비었던 것이라지만, 이번에는 변명할 여지도 없이 수상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유안은 헌터 디바이스를 꺼내 자신이 아는 리셉션 직원에게 연락을 넣었다.

신호음이 뚝 끊기며 존재하지 않는 헌터 코드라는 안내 음성이 들렸다.

"뭐야."

조금 오싹해진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가벼운 단도 하나를 꺼냈다.

본점 뒷마당의 던전산 식물을 자를 때나 쓰던 것이었으나 지금은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들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맨 위층에 있으려나.'

기청해는 항상 길드 건물 앞까지 나와서 반겨주었으니 길드장실이 몇 층인지도 알지 못했다.

유안은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갈 생각으로 버튼을 눌렀지만···.

'안 열리잖아?'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홀의 거대한 샹들리에도 불빛 하나 머금지 못하고 침잠해 있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건물 내부가 워낙 밝아서 전기가 나갔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S급이니까 굳이 확인 안 해도 멀쩡하게 잘 살아있지 않을까. 심심해서 낚시를 간 걸 수도 있고.'

유안이 건물 높이를 떠올리며 합리화를 시작하려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단으로 올라가는 건 가혹 행위···.

끼이익.

이유안의 생각을 막아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비상 계단으로 향하는 문이 저절로 열렸다.

"일어나 있으면 직접 걸어 내려오시죠?"

유안은 대충 보안 카메라가 있을 법한 곳에 대고 쩌렁쩌렁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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