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오셨습니다. 다들 식사 아직이시죠?"
"그렇긴 한데 왜 불렀는지부터 말을 해 줘야지."
셀라의 연락을 받고 자다 일어나서 급하게 온 헌터가 하품을 쩍 하며 말했다.
팔을 들어올릴 때 우락부락 보이는 근육과 문신의 향연에 유안은 잠시 주춤했지만 겁을 먹지는 않았다.
어차피 셀라 말대로 보기보다 착한 친구들이었다.
"이제 같이 일할 사이니까 맛있는 음식 대접하고 싶어서 부른 겁니다."
"어엉? 우리랑 밥이나 먹자고 불렀다고···?"
"예."
유안이 당당하게 나오자 셀라의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야, 너 친구 집에 식사 초대 받아본 적 있어?'
'있겠냐~! 저런 애랑 놀면 안 된다고 쫓겨난 적은 많지.'
'오, 나도.'
'너 그때 나랑 같이 쫓겨났잖아.'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것은 처음이라 어색했다.
친구들이 쭈뼛대자 유안이 중앙 카페 문을 활짝 열고 손짓했다.
"들어오시죠. 밖에 계속 있으면 춥습니다."
"어···, 어엉···. 알았어, 사장님."
친절과 호의에 면역이 없는 사람들은 심장께가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홀린 듯 이유안의 뒤를 따랐다.
'계획대로 잘 풀리고 있어.'
이유안은 생김새와 다르게 여린 성정을 가진 친구들을 1층의 가장 넓은 테이블로 안내하며 마음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품 안의 서류를 내밀 완벽한 타이밍을 재는 중이었다.
가족같은
방재이가 고구마 토피 넛 라떼를 만들어 왔다.
갓 수확한 밤과 고구마가 생기자 신메뉴 개발에 열을 올린 것은 홍소라 뿐만이 아니었다.
"···사장님 드실 건 화이트 초콜릿을 넣었습니다."
하얀 음료에 검은 초콜릿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화이트 초코를 썼다.
유안은 재이에게 음료를 받아 한 모금 마셔보았다.
혀끝부터 단맛이 퍼짐과 동시에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특수 효과로 일시적 체온 상승이 붙었습니다."
"겨울 한정 메뉴로 팔기 좋겠습니다. 괜찮은 신메뉴를 만드셨네요, 재이 씨."
"······."
유안이 대놓고 칭찬하자 방재이는 몸 둘 바를 모르며 어깨를 움츠렸다.
여전히 칭찬에 약한 바리스타였다.
이유안은 수줍어하는 방재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셀라의 친구들이 잘 놀고 있는지 확인했다.
중앙 카페 강남점에는 셀라 때문에 몇 번 방문했지만 본점 방문은 처음이라 다들 들뜬 것 같았다.
"여기 되게 따뜻하다."
"어엉, 뭔가··· 할머니 집 온 기분이네."
"안락하고 맛있는 거 많고···."
"초대해줘서 고마워, 사장님."
헌터들이 마론 크림을 얹은 알밤 라떼를 홀짝이며 말했다.
유안은 그들의 감사 표시에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셀라 친구들인데 이 정도 대접은 당연히 해야죠."
그러자 헌터들이 티 나게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사람들다웠다.
"우, 우와··· 사장님 연기력 엄청 좋아진 거 봐요···."
"이 사장님 이러다 배우 데뷔하는 거 아닐까요?"
저 멀리에서 홍소라와 김주현이 쑥덕댔지만 유안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거짓말은 아니라고.'
과장이 좀 섞이기는 했지만, 셀라의 친구들이니 잘 해주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셀라는 강남점의 매니저였고, 셀라가 없었다면 강남점이 지금처럼 성공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스킨십이 과한 것만 빼면 정말 훌륭한 직원이지.'
유안은 셀라의 장점을 잔뜩 떠올리며 헌터들에게 말했다.
"역시 셀라 친구 분들이라 그런지 저랑도 잘 맞네요. 처음 봤을 때 좀 놀라기는 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진짜 좋은 분들이란 걸 압니다. 우리 이제 친구 맞죠?"
이유안이 눈을 사르르 접으며 말하니 헌터들은 그 따뜻한 미소에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선량하고 온화한 것에는 면역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크, 흠··· 그럼···! 친구지!"
"셀라 친구니까 사장님이랑 우리도 당연히 친구지!"
"집에 초대까지 해 줬는데."
"저녁 식사 같이 했으면 이미 베스트 프렌드야!"
헌터들의 우렁찬 대답에 이유안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이제 거의 다 됐다.
"셀라한테 들었는데··· 여러분은 친구 일도 본인 일처럼 생각하고 도와주신다면서요?"
"어, 어엉··· 그렇지?"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훌륭하시네요. 저도 여러분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쁩니다."
"어엉··· 어, 우리도 기뻐!"
헌터들의 반응에 살랑살랑 웃던 이유안이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꾸었다.
세상 모든 불운을 뭉친 것 같은 얼굴이 된 유안이 시무룩한 목소리까지 꾸며냈다.
"친구가 됐으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실은 제가 요즘··· 정말 심각한 고민이 하나 있거든요. 들어주시겠습니까?"
"고민? 친구한테 생긴 고민이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뭔데, 뭔데? 누가 사장님 때렸어? 괴롭혔어?"
"몇 명이야. 열일곱 명 정도는 나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는데."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칼을 꺼내려는 헌터를 빠르게 말렸다.
그리고 품 안에 고이 넣어둔 서류를 꺼냈다.
셀라의 친구들을 정식으로 고용하기 위한 계약서가 포함된 문서들이었다.
"와··· 저, 저걸 저렇게···."
"이 사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네요."
홍소라와 김주현이 서류 뭉치를 보고 수군거렸다.
이유안은 이번에도 가볍게 무시하고 서류 중 최상단에 위치한 중앙 카페 배달 서비스 기초 계획안부터 헌터들에게 내밀었다.
배달 서비스를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적힌 문서였다.
"오, 부산? 나 여기 가 봤어."
"나는 여기랑 여기 가 봤어. 재밌었지~."
"제주? 꼭 가 보고 싶은 섬이야. 내 버킷 리스트에도 있어."
헌터들은 한국 지도 곳곳에 표시된 점들을 가리키며 그 지역에 얽힌 자신들의 추억을 늘어놓았다.
'셀라한테 들은 대로야.'
헌터들의 기초 정보를 외우고 있던 유안은 입꼬리를 당겨 씨익 웃었다.
그러다가도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면 우울한 척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제가 운영하는 중앙 카페가 많이 유명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도 중앙 카페를 원하는 손님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당장 전국에 지점을 늘릴 수는 없는 상황이라서··· 정말 걱정이 큽니다."
"어엉··· 그랬구나, 사장님."
자세히 들어보면 걱정보다는 자랑에 가까운 이야기였으나 유안의 속상한 표정에 깜빡 속아 넘어간 헌터들은 덩달아 심각해졌다.
"이대로 두면 사람들이 카페에 실망할 수도 있고··· 평판이 나빠질 수도 있어서···."
"사장님 마음 다 이해해."
"우리가 뭐 도울 수 있는 건 없을까?"
"배달 서비스 시작한다며. 그걸 잘 이용하면 괜찮지 않아?"
헌터들은 유안이 먼저 계약서를 내밀기도 전에 제 발로 중앙 카페의 늪에 걸어 들어왔다.
'생각보다 더 수월하잖아?'
이유안은 술술 풀리는 일에 만족하며 서류 뭉치 맨 아래에 감춰져 있던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셀라의 친구들이 우르르 그곳에 서명하기까지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윤슬의 수업이 있는 날도 아닌데 강해민을 본점으로 부른 것은 오랜만이었다.
강남점의 지하 공사까지 끝낸 해민은 본격적으로 협회 건물 공사에 들어갔기에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요즘은 오히려 이유안보다 류지우가 강해민을 자주 만날 지경이었다.
"헌협 다 지으려면 몇 주는 더 걸려."
해민은 제 앞에 놓인 에스프레소 콘파냐 잔을 매만지며 초장부터 철벽을 세웠다.
유안이 자신을 부른 것이라면 일을 시키기 위해서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해민아, 협회 건물도 네가 다 설계한 거지?"
"어··· 그렇지."
"도면 그리느라 고생했겠다.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건 안 돼?"
"···던전 부산물로 짓는 거니까 남한테 맡기기엔 좀 불안해서. 근데 왜 갑자기?"
강해민은 유안의 목소리가 솜사탕처럼 달콤해지는 것에 동물적인 불길함을 느끼며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콘파냐의 크림 때문에 입까지 달아졌다.
'또 뭘 시키려고 이래.'
이유안이 자꾸 과로를 시켜서 잠시 헌터 협회장과 손을 잡기는 했지만, 강해민은 일단 유안의 친구였기에 진심으로 부탁을 받으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과한 부탁을 받기 전에 자리를 미리 뜨는 것이 상책인데··· 반짝반짝 빛나는 유안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오늘 기분 되게 좋아 보이는데··· 망치기 싫다.'
자신이 차갑게 돌아서면 유안은 대놓고 속상해할 것이다.
그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강해민은 제 무릎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유안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들어나 볼 생각이었다.
"그럼 특수 건설 말고 일반 건설은 네가 안 나서도 되는 거지?"
"···일반 건설은, 요즘 거의 안 하고 있기는 한데."
회사 이름도 해강특수건설이다.
일반 건설을 아예 안 맡는 것은 아니었으나, 예외의 예외 상황에만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 같은 공사라든가 중요도가 높은 공사라든가···.
"어쨌든 일반 건설은 해민이 네가 신경 많이 안 써도 되지?"
"···그렇긴 하지. 나보다 더 뛰어난 전문가도 회사에 많고."
"그럼 해민아."
"······."
유안이 품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무언가를 꺼냈다.
대한민국 전도였다.
붉은 점이 곳곳에 찍힌 것을 빠르게 확인한 강해민은 제게 떨어질 일이 무엇인지 예측했다.
'아, 이번에도 말렸구나.'
쓸데없는 감정에 휩쓸려서 자리를 보전하고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해민은 엄청난 양의 새로운 일거리를 예상하며 유안의 손가락이 지도 곳곳을 가리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민이 너한테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이유안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어렵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친구의 부탁이니 해민은 유안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래서··· 헌협 허가는 받았고?"
"이제 류지우 씨 부르려고."
"···표시된 지역마다, 네 말대로 창고 겸 주유소 겸 아늑한 가정집 지으려면 시간 꽤 걸려."
"하나씩 하는 게 아니라 일괄적으로 다 지으면 금방 끝나지 않을까? 참, 제주도에는 지을 필요 없어. 비조 길드 쓰면 되거든."
유안이 눈을 깜빡거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강해민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남은 콘파냐를 전부 들이켰다.
단맛이 끝나고 에스프레소 특유의 쓴맛이 강하게 휘몰아쳤다.
*
따뜻한 뒷마당에서 이윤슬과 이중앙이 뛰어놀고 있었다.
중앙이에게 체중 감량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윤슬은 더 본격적으로 술래잡기 놀이를 시작했다.
유안은 1층 홀에서 마론 다크 초콜릿 라떼를 마시며 직원들에게 말했다.
"겨울 방학 시즌에는 윤슬이 데리고 국내 여행이나 다녀 볼까 싶습니다."
"좋네요, 사장님. 어디어디 가시려고요?"
"일단 건물 지어지는 곳부터 돌 생각입니다."
"아, 아··· 해민 씨 또 바빠졌죠, 참···."
홍소라가 설탕 범벅의 고구마 맛탕을 우물거리며 강해민의 평안을 기원했다.
해민은 결국 유안이 준 일을 받아갔지만 특수 건설 건이 아니라서 생각보다는 덜 바빴다.
이전처럼 잠까지 줄여가며 일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해민이는 행복할 겁니다. 걱정 마시죠."
"···사장님, 강해민 씨에게 전해주십시오."
방재이가 에스프레소 디저트 박스를 내밀었다.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콘파냐, 롱 블랙 등의 음료와 커피 쿠키가 예쁘게 포장된 강해민 전용 세트 메뉴였다.
비매품이지만 워낙 자주 만들어서 재이는 이제 눈 감고도 해민에게 필요한 메뉴들을 쏙쏙 골라낼 수 있었다.
'······힘내십시오, 강해민 씨.'
재이는 디저트 박스 안의 쪽지에 적힌 내용과 똑같이 해민을 응원했다.
"그, 근데··· 기청해 씨가 좀 늦네요···?"
"난기류 소식도 없었는데 이상하네요, 사장님."
"···연락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기청해가 연락도 없이 늦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주도 앞바다에 퐁당 빠트려도 서울까지 멀쩡히 헤엄쳐 올 몸을 가진 S급 헌터니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시간 약속에 예민한 거 같았는데.'
평소에는 항상 제시간에 딱딱 나타나던 비조 길드장이다.
그러니 오늘처럼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 지각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설마··· 나한테 건물 주기 싫어서 내뺀 건가?'
오늘이야말로 비조 길드 건물 아래층 일부를 받아낼 생각으로 청해를 기다리던 유안의 두 눈이 화르륵 불탔다.
정말 건물 뺏기기 싫어서 안 오는 거라면 윤슬의 미술 선생님 자격을 박탈할 생각이었다.
"아저씨이! 친구 아직 안 왔어?"
"응, 윤슬. 기청해 씨한테 연락해 볼래?"
"우응, 알았어!"
윤슬이 제 목에 걸린 디바이스를 꼼지락꼼지락 만지더니 기청해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이유안의 헌터 디바이스에는 여전히 비조 길드장의 연락처가 없었다.
'윤슬이랑 연락 잘 하고 지내니까 나까지 할 필요는 없지.'
유안은 기청해의 헌터 코드를 영원히 저장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으며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단조로운 신호음만 이어질 뿐 비조 길드장의 나른한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