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37)

"좋아합니다. 다른 의미로 말고 친구로서요."

"음··· 그래요. 배달은 어느 지역으로 나가나요? 서울 전역은 너무 넓죠, 아무래도?"

김주현은 헌터그램을 살피며 물었다.

중앙 카페의 배달 서비스 소식에 환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이나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었다.

"중세권 되게 해달라고 난리네요."

중앙 카페의 배달 권역에 포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손님들이 많았다.

다른 일을 하느라 바빠서 카페에 직접 찾아오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주현 씨, 배달은 일단 지방 위주로 할 겁니다."

"네?"

"배달원이 더 늘어나면 이 근처에서도 할 생각이지만, 지금은 다른 지역이 먼저입니다."

"왜··· 왜요?"

김주현은 의자에 흐물흐물 늘어져 있던 몸을 바르게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헌터그램을 확인하던 손에도 힘이 탁 풀려서 디바이스가 테이블 위로 덜커덩 떨어졌다.

"기껏 기동력 좋은 직원들이 생겼는데 가까운 곳만 보내면 아깝지 않습니까."

"···이 사장님, 그러려고 일부러 상급 헌터들부터 뽑은 거예요?"

"예. 일단 지방에 배달 서비스를 시작하고, 중앙 카페 인지도가 높아지면 각 지역에 지점을 내도 괜찮겠죠."

유안은 이미 셀라의 친구들에게 각각 어떤 지역을 맡길지도 다 구상해 놓았다.

지역별로 세 사람씩 조를 이루면 배달이 원활하게 돌아갈 것 같았다.

상급 헌터들이니 인벤토리도 널널하게 쓸 수 있어서 한 번 보낼 때 많은 양을 배달시킬 생각이었다.

"제주도는 한 명이면 충분할 겁니다."

"네? 제주에도 보내게요?"

"당연하죠. 저번에 주현 씨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쪽에도 중앙 카페 음식 수요가 상당합니다."

비조 길드를 넘겨받기 전까지는 본점에서 음식을 직접 조달하는 수밖에 없다.

빠르고 튼튼하고 강한 배달원들이 잔뜩 생겼으니 유안은 그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굴려볼 생각이었다.

몽블랑의 계절

아침부터 홍소라가 이윤슬을 데리고 2층 창가에 서 있었다.

윤슬은 눈곱도 떼지 않은 모습으로 소라의 말을 경청했다.

"유, 윤슬이 생각도 그렇지···?"

"우응···."

"그, 그럼 이따 사장님한테 가서···."

"뭘 말입니까?"

복도 반대편에서 두 사람의 밀회를 지켜보던 유안이 불쑥 다가왔다.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소라가 왼쪽 가슴을 부여잡았다.

"까, 깜짝 놀랐잖아요, 사장님···!"

"윤슬이한테 무슨 말 하고 있었습니까?"

"아, 아··· 벼, 별거 아녜요···! 저, 저는 일하러 가 볼게요···!"

홍소라가 수상한 표정과 목소리와 걸음걸이로 후다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창가에 남겨진 윤슬은 눈을 비비며 유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슬, 소라 씨가 무슨 얘기 했어?"

"으응··· 강남점은 숲이 있어서 안 쓸쓸한데 여기는 너무 허전하대."

아이가 소라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읊었다.

허전함을 빌미로 윤슬에게 무언가 시키려 하다가 딱 걸린 것 같았다.

'또 뭘 하려고···.'

홍소라는 가끔 엉뚱한 일을 꾸미곤 했기에 각별한 관심이 필요했다.

물론 소라가 독단으로 벌인 일 중에 실패한 일은 하나도 없었으나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나중에 알게 되면 무척 놀라게 된다는 심리적 단점이 있었다.

'이번에는 꼭 뭔지 미리 알아내야지.'

유안은 홍소라를 잘 들쑤셔 무얼 계획하고 있는지 알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반쯤 조는 윤슬을 씻기면서도 소라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걸지 고민했다.

이유안이 윤슬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 홍소라는 주방에 있었다.

"정원 씨, 윤슬이 밥 좀 챙겨주세요."

"네, 사장님."

어린이를 매니저에게 맡긴 유안은 살금살금 주방으로 향했다.

홍소라가 주방 테이블 위에 무언가 잔뜩 늘어놓고 중얼중얼거리는 중이었다.

"나무, 나무···! 허억··· 이게 진짜 되네···?"

주방에 어울리지 않는 분재가 화분에 담겨 있었다.

소라는 작은 화분을 향해 스킬을 여러 번 사용했다.

마나를 회복하며 계속해서 실험할 생각인지 곁에는 위브 잼을 비롯해 마나를 채워주는 음식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홍소라 씨."

"허··· 어···! 사, 사장님···?"

소라가 헛숨을 훅 들이키며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유안을 보았다.

이유안은 놀란 소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화분 쪽을 턱짓했다.

"저건 뭡니까?"

"아, 아니··· 그게요···. 그, 흠··· 제, 제가 하위 스킬이 하나 생겼거든요···."

"던전화 스킬 영향으로 생긴 스킬입니까?"

"네, 네···."

"효과는요?"

"으, 음, 잠시만요···!"

스킬 효과를 말로 길게 설명하기 힘들겠다 판단한 홍소라가 자신의 헌터 디바이스를 꺼냈다.

유안도 자연스럽게 제 디바이스를 꺼내 홍소라로부터 스킬 정보를 전송받았다.

"이거, 읽어보세요···!"

[계절의 씨앗(E급)]

스킬 사용자가 머무는 곳의 계절에 어울리는 식물을 피워낼 수 있다.

현재 생성 가능한 식물: 밤, 고구마

던전화 스킬의 영향으로 생겨난 스킬이라 등급 자체가 높지는 않았지만, 잘 활용하기만 하면 중앙 카페에 큰 도움을 줄 것 같았다.

"식물 종류를 선택할 수 있는 겁니까?"

"목록에 있는 건 가능해요···!"

홍소라가 화분의 밤나무 분재를 손으로 가리켰다.

새끼 손톱 만한 밤이 토독토독 열려 있었다.

"고구마, 고구마···."

위브 잼을 마셔서 마나를 채운 소라가 분재를 향해 세뇌 교육을 시작했다.

"너, 넌 고구마다, 넌 고구마야···."

"······."

스킬을 쓰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건 맞지만, 소라처럼 스킬을 사용하는 헌터는 처음 봐서 유안은 약간 당황했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소라의 손끝에서 터져나온 마나의 빛이 분재에 닿는 순간, 밤나무는 스르르 사라지고 고구마 줄기가 흙 위로 불쑥 올라왔다.

"대박이죠···!"

새로운 스킬을 선보인 홍소라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고, 유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킬의 유용성을 인정했다.

"작물 종류를 선택할 수 있으니 대량 생산하기도 좋겠습니다."

"아··· 맞아요···. 크, 흠··· 그래서 사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윤슬이한테 대신 말 전하려던 게 그겁니까?"

"네, 네··· 맞아요···!"

홍소라는 우물쭈물대다가 마음을 정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소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보다···.

'뭐 이런 걸로 고민을 했어?'

별거 아니었다.

*

"아야!"

"윤슬, 다쳤어?"

"흐잉, 아저씨이··· 나 여기 피이··· 는 안 나네? 안 다쳤어!"

윤슬의 비명에 유안이 잽싸게 다가갔지만 아이의 손은 말짱했다.

던전산 밤송이 따위는 이윤슬의 튼튼한 손가락을 파고들 수 없었다.

"무섭게 생겼는데 하나도 안 아파! 이거 내가 다 까 줄까?"

"괜찮아, 윤슬아. 밤 까는 건 어른들한테 맡기고 윤슬이는 저기 가서 고구마 캐 볼래?"

"응! 그것도 재밌겠다!"

서정원이 아이 눈높이에 맞춰서 잘 꾀어내자 윤슬은 뽀르르 고구마 밭으로 달려갔다.

밭에 먼저 가 있던 방재이가 이윤슬에게 작은 호미를 내밀었다.

"···캐고 싶은 만큼 캐면 돼."

"그러엄~, 내가 여기 있는 거 다 캐도 돼?"

"······응."

"와아!"

본점 바로 옆의 공터에 울창한 밤나무 숲과 고구마 밭이 우거졌다.

홍소라가 유안의 허락을 받고 [계절의 씨앗] 스킬을 잔뜩 사용한 덕분이었다.

비록 소라는 스킬을 너무 많이 쓴 대가로 3층 손님용 방에 앓아 누워버렸지만, 바닥난 마나야 시간이 지나면 절로 회복될 테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우아! 고구마··· 고구마가 짱 커!"

윤슬은 자기 키와 비슷한 크기의 고구마를 씩씩하게 캐내고 자랑스럽게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하나만 캐도 열 사람은 먹겠는데.'

유안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심상치 않은 던전산 밤과 고구마 크기를 살폈다.

여기 있는 걸 전부 수확하면 올해는 물론이고 내년까지도 쓸 식재료가 나올 것 같았다.

장다온 셰프도 지하 레스토랑에서 쓰고 싶다며 식재료 일부를 예약하고 갔다.

"아저씨! 이건 더 커!"

고구마 캐기 체험 활동에 크게 만족한 이윤슬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두더지처럼 땅을 팠다.

호미를 쓰는 것보다 맨손으로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오늘 다 캘 생각은 없었는데···.'

굴착기 같은 어린이 덕분에 수확 작업이 첫날 바로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서정원도 큰 키를 십분 활용해 밤나무를 탈탈 털어내고 있었다.

후드드득.

정원이 장대로 나뭇가지와 기둥을 칠 때마다 엄청난 양의 밤송이가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A급 헌터는 얼굴 정면으로 던전산 밤송이를 맞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강인함을 갖고 있었다.

"오후에 소라 씨 깨어나면 몽블랑 만들어도 좋겠어요, 사장님."

"밤으로 만드는 겁니까?"

"밤으로도 할 수 있고, 고구마도 돼요. 소라 씨가 저보다 잘 알 거예요."

서정원이 맨손으로 밤송이를 까며 말했다.

그 옆에서 발로 밤송이를 벗겨내던 유안이 정원에게 물었다.

"음··· 정원 씨, 맛탕 만들 줄 아십니까?"

"네, 간단해서 금방 만들어요. 가르쳐 드릴까요, 사장님?"

"요리 수업은 나중에 하고··· 일단 정원 씨한테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사장님 부탁이면 뭐든 들어드려야죠."

서정원이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유안은 듬직한 매니저에게 까지 않은 밤송이를 은근히 밀어주며 자신의 계획을 공유했다.

"소라 씨가 계절마다 다른 식물을 심을 수 있게 되었으니 시즌 뷔페를 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호텔에서 하는 것처럼요? 봄에는 딸기 뷔페 하면 되겠네요."

서정원이 바로 이해하고 유안의 계획을 좀 더 구체화시켰다.

"1층의 테이블 배치를 좀 바꾸고, 가운데에 큰 진열장을 두면 될 거예요. 뷔페가 열리는 기간에는 입장권을 따로 판매하고··· 아, 뷔페 음식은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게 일반 식재료도 좀 섞어야겠네요."

"좋습니다. 정원 씨한테 맡기겠습니다."

유안은 호텔 지배인처럼 뷔페 운영 방식을 술술 읊는 서정원을 완전히 믿어보기로 했다.

"사장님도 도와주셔야죠. 내일부터 뷔페를 연다고 하면··· 오늘 저녁에는 시범 운영을 해야 할 것 같거든요."

"···사람들 초대하면 되는 겁니까?"

"네. 많이 불러주세요."

결국 이유안이 늘 하던 일을 맡은 셈이었다.

헌터 디바이스를 꺼낸 유안은 가장 먼저 셀라에게 연락을 넣었다.

[셀라, 오늘 저녁에 네 친구들 다 본점으로 집합시켜.]

집합이니 뭐니 하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셀라의 친구들에게는 그런 어휘가 가장 잘 먹혔다.

어디로 튈지 모르게 자유분방하다가도 셀라가 집합하라고 외치면 의리 있게 모여드는 것이다.

'잘만 써 먹으면 엄청 편하단 말이지.'

유안은 미래의 배달원들을 제 손 안에 넣고 굴리며 만족했다.

*

"마, 마론 크림 색 예쁘죠···!"

홍소라가 연갈색 크림을 손가락으로 쿡 찍어 유안의 입술에 묻혔다.

시식 역할을 맡게 된 이유안은 혀를 내밀어 크림 맛을 보았다.

밤 향기가 났다.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푸, 푹 자고 일어나서 이제 멀쩡해요···! 그리고 몽블랑 오랜만에 만드니까 재밌네요···."

홍소라는 갓 구운 페스트리 위로 마론 크림을 듬뿍 짜며 말했다.

크림 위에는 설탕에 달게 졸인 알밤이 덩어리째 올라갔다.

"···소라 씨, 이쪽에는 고구마 무스 넣으면 됩니까?"

주방 일을 도우러 온 방재이는 가운데가 푹 파인 페스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이는 빵 중앙부를 노란색 무스로 빵빵하게 채웠다.

고구마 몽블랑 위에는 서정원의 스킬로 촉촉하게 구운 고구마 조각이 장식되었다.

뷔페 준비는 순조로웠다.

주방에서 다양한 디저트가 만들어지는 동안, 서정원은 뒷마당의 간이 화덕에서 알밤과 고구마 맛탕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중앙이가 열심히 모아 온 낙엽에 군고구마를 굽기도 했다.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지하에서 올라온 장다온과 제자들은 고구마 피자를 몇 판 만들어주었다.

피자의 대가로 군고구마와 군밤을 잔뜩 받은 그들은 만족스럽게 레스토랑으로 복귀했다.

"아저씨! 밖에 사람들 왔어!"

김주현과 함께 1층 홀 테이블 배치를 고민하던 윤슬이 우렁차게 외쳤다.

바깥에서 부릉부릉 배기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왔구나.'

유안은 품 속에 넣어둔 서류가 잘 있나 확인하고 정문 쪽으로 나가 보았다.

셀라의 명령으로 모여든 친구들이 하나같이 검은 옷을 입고 오토바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잉,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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