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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청해 미술 선생님은 수업 시간 한 시간 전에 미리 도착했다.
중앙 카페 사람들도 마침 점심 메뉴를 고민하던 차였기에 비조 길드장을 반겼다.
"처, 청해 씨는··· 뭐 드실래요···?"
"홍소라 씨가 만들어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
"구,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말하지 마시고요···."
홍소라는 입에 발린 칭찬에 헤벌쭉한 표정을 지었으면서도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오늘은 꼭 기청해 입으로 음식이 들어가는 꼴을 보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정말 아무거나 다 좋아서 그래."
"···사, 사장님, 기청해 씨 앞으로는 건강 주스 한 잔 부탁드려요···."
"예, 알겠습니다."
유안은 냉장고를 뒤적여 기청해의 머리색을 닮은 음료를 뚝딱 만들어냈다.
열 가지의 고급 해산물이 들어간 심해 건강 주스에서는 짠내와 비린내가 절묘하게 섞여서 났다.
벤티 사이즈의 잔을 받은 비조 길드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주스 냄새를 맡았다.
"건강해지는 냄새가 나."
"지, 지독한 사람······."
홍소라의 혼잣말에 유안도 동의했다.
비조 길드장이 음식 냄새만 실컷 맡다가 입에는 대지도 않고 인벤토리에 넣는 모습은 이제 익숙했다.
유안은 기청해 밥 먹이기를 오늘도 포기하고 윤슬에게나 신경을 썼다.
"윤슬, 친구들이랑 같이 먹고 싶은 거 있어?"
이윤슬과 함께 미술 수업을 들을 어린이들이 곧 카페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메뉴는 아이가 직접 선정하는 게 나았다.
윤슬이 원하는 음식이라면 뭐든 다 만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음··· 배달 시킬래!"
"응?"
"이빨 팔아서 부자 됐으니까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건 좋은 생각인데 윤슬, 어디서 배달을 시키려고···?"
"아저씨, 비밀이야."
윤슬이 키득거렸다.
이 근처에 배달을 시킬 만한 곳은 없다.
이유안은 어린이가 작은 손으로 어디에 연락하는 건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이상한 곳에 연락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윤슬의 연락처에 있는 사람들은 유안과도 다 안면이 있었다.
그러니 생판 모르는 남은 아닐 것이다.
"그럼 오늘 점심은 윤슬이가 쏘는 거예요? 잘 먹을게, 윤슬아."
"응! 많이 먹어도 돼! 백 개 시켰어!"
"배, 백 개면··· 사장님이 책임지고 열 개는 먹어야겠네요···."
"태영 씨 부르겠습니다."
유안은 10인 분을 가뿐히 해치울 수 있는 최고의 지원군을 부르기로 했다.
연락을 받은 정태영은 마침 근처에 있었다며 십 분도 안 돼서 도착했고, 그 뒤로 어린이들도 줄줄이 도착했다.
"오늘 점심은 내가 배달 시켰어! 이제 곧 도착한대!"
윤슬은 아이들 가운데에 대장처럼 서서 자랑스럽게 외쳤다.
어린이들이 각자의 기대감을 안고 윤슬을 우러러보았다.
'대체 뭐지?'
유안을 비롯한 어른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카페 정문 쪽에서 묘하게 친숙한 소음이 들렸다.
부르릉.
오토바이 소리였다!
그것도 한 대가 아닌 여러 대가 동시에 배기음을 내고 있었다.
배달의 셀라
"배달의 셀라 주문하셨죠!"
선두 오토바이에서 내려선 셀라가 검은 헬멧을 벗으며 윙크했다.
뒤쪽으로 쭉 늘어선 오토바이들에는 헌터 협회 직원들이 타고 있었다.
100인 분의 식사를 배달하기에는 오토바이 한 대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원동기 면허는 따 놔서 다행이네요."
배달원들 사이에는 미래의 협회장도 있었다.
헌터 협회장에게 점심 배달을 시켜버리는 어린이의 자신감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유, 윤슬아··· 뭘 시킨 거야···?"
"버거!"
"강남점 버거를 백 개 시킨 거구나, 윤슬이."
"응!"
홍소라가 경악하고 서정원은 평소처럼 윤슬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정원은 윤슬이 놀다가 실수로 강남점을 부수고 왔다고 해도 혼내지 않을 어른이었다.
"강남점 음식을 먹고 싶은 거였으면 내가 사다 줄 수도 있었는데, 윤슬."
"아냐! 배달 시키고 싶었단 말이야!"
"···응, 그랬구나."
어쩐지··· 셀라 한 사람이 인벤토리에 넣어서 와도 되는데 굳이 오토바이 여러 대를 동원한 걸 보면 윤슬이 뭘 체험해보고 싶었던 건지 답이 나왔다.
어린이가 헌터 디바이스를 가지고 놀더니 한국의 배달 시스템에 큰 감명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우아··· 우리집에서도 이렇게 많이 배달 시켜본 적은 없는데."
"윤슬이 너 짱이다···."
"멋있어! 윤슬이는 엄청 부자구나!"
그리고 친구들 앞에서 주름 잡고 싶은 마음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뭐··· 한 번쯤은 나쁘지 않지.'
유안은 아이가 버킷 리스트를 하나 이룬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윤슬, 포장 열어봐야지."
"응!"
셀라와 배달원들이 오토바이에서 엄청난 양의 버거 세트를 꺼내기 시작했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100인 분은 훌쩍 넘을 것 같았다.
윤슬이 버거를 주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강남점 주방 직원들의 인심인 게 분명했다.
모든 재료를 아끼지 않고 팍팍 넣었는지 버거 하나가 윤슬의 얼굴만 했다.
'정태영 씨 부르길 잘했지.'
유안은 자신의 선견지명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셀라 너도 밥 먹고 가. 류지우 씨랑 팀원 분들도요. 어차피 양이 많아서 남을 것 같습니다."
"그 말만 기다리고 있었지, 유안!"
"본점에서는 뽀뽀 금지야."
이유안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셀라를 간발의 차이로 피하는 데 성공했다.
셀라가 투덜댔다.
"아, 왜~!"
"어쨌든 금지야. 자제 좀 해."
"그럼 유안 납치해서 강남점에 데려가면 되나?"
"사장님 납치도 금지예요, 셀라 씨."
서정원이 끼어들어 중재해주었다.
유안은 듬직한 본점 매니저 뒤로 숨어 매니저들끼리의 설전을 구경했다.
"아니, 내 말을 좀 들어 봐! 유안은 강남점 사장이기도 한데 본점에 훨~씬 오래 있잖아. 게다가 난 저녁에 출근하니까 자주 만나지도 못해!"
"그만큼 사장님이 셀라 씨 역량을 믿고 강남점을 맡기는 게 아닐까요?"
"어··· 어어? 그런가? 그래? 맞아, 유안?"
"응, 맞아. 셀라 최고."
유안이 대충 칭찬하자 셀라는 뒷머리를 긁더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쪽도 강해민 못지 않게 칭찬에 약한 타입이었다.
"뭐어··· 유안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셀라 널 강남점 매니저로 뽑은 건 정말 잘한 일이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하하, 그래, 그래~!"
셀라는 호탕하게 웃으며 유안의 등을 두드리려다 서정원 가드에 막히고 말았다.
A급 헌터는 S급 헌터의 매운 손맛을 그럭저럭 버텨냈다.
"아저씨이! 밥 먹어!"
어른들이 떠드는 사이 어린이가 씩씩하게 테이블 세팅을 마쳤다.
김주현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윤슬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유안의 버거 포장지를 벗기는 것은 성공했다.
"···버섯이 많이 들어가서 향기가 좋습니다."
"재, 재이 씨 손에 들리니까 그래도 평범한 사이즈로 보이네요···."
"······제 손이 커서 그렇습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치, 칭찬이었어요···! 놀란 건 아닌데···!"
"소라 씨 때문에 재이 씨 얼굴 불타겠다."
김주현이 토마토처럼 빨개진 방재이의 얼굴을 가리키며 낄낄거렸다.
유안이 느끼기에도 재이의 손에 들린 버거는 애들 장난감처럼 보였다.
'하긴, 저 손에 들어가면 벤티 사이즈 잔도 데미타세가 돼 버리긴 하지.'
이유안은 곰 같은 재이의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린 버거 속을 살폈다.
강남점의 숲에서 재배한 던전산 버섯이 패티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홍소라가 열심히 키운 양상추도 한가득이었다.
잘게 다져 만든 고기 패티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달콤한 소스가 올라갔다.
버거이지만 패스트푸드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할 만큼 영양소가 고루 들어갔다.
강남점 직원들이 성장기 어린이들을 신경 써 만든 티가 났다.
'맛도 있고.'
입을 크게 벌려 버거를 베어 문 유안은 고기와 버섯 냄새를 진하게 느끼며 감탄했다.
숯불로 구운 것인지 바비큐를 먹은 것처럼 깊은 불맛이 느껴졌다.
어린이들은 버거가 너무 커서 그릇에 옮겨 담아 잘라 먹어야 했다.
윤슬을 비롯한 아이들이 칼을 든 서정원만 빤히 바라보았다.
깔끔하고 속도감 있게 잘린 버거가 배식되자 아이들이 일제히 배꼽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아-!"
"꼭꼭 씹어서 많이 먹으세요"
정원은 어린이들의 귀여움에 미소를 참지 못하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
윤슬이 크게 한 턱 쏴서 유쾌하게 지나간 점심 시간 후에는 바로 미술 수업이 이어졌다.
강남점 사람들도 여기까지 온 김에 기청해의 수업을 함께 듣기로 했다.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 빼곡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넓게 느껴지던 교실이 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둥글게 앉은 수강생들 가운데에 기청해가 섰다.
"오늘은 모델이 필요한 수업이라 지원자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
"이윤슬 어린이는 그림 그려야 하잖아."
"우응, 그럼··· 아저씨 시키자!"
갑자기 지목당한 유안은 당황했다.
수업이 잘 진행되는지 초반에만 확인하고 자리를 뜨려 했던 계획이 무산되었다.
"이윤슬 어린이와는 마음이 아주 잘 맞는다니까. 나도 이유안 사장이 모델로 적격이라고 생각했어."
"···차라리 셀라나 류지우 씨를 시키시죠? 서정원 씨나 방재이 씨도 괜찮을 겁니다. 아, 제일 좋은 방법은 기청해 씨가 직접 모델을 서는 거겠는데요."
유안은 키가 훤칠한 사람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지목했다.
하지만 지목당한 사람들은 모델을 할 수 없는 저마다의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유안, 나는 모델보다 그림 그리는 쪽이 더 좋아~!"
"저는 곧 돌아가봐야 합니다. 협회에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
"카페 오후 영업 준비 때문에 수업 끝날 때까지 있지는 못해요, 사장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사람에게 빠르게 거절당한 유안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청해를 보았다.
"나는 선생님이니 계속 돌아다니며 학생들이 잘 하고 있는지 지켜봐야지."
비조 길드장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당연하다면 당연할 소리를 했다.
이유안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기청해 등신대라도 만들어 가운데 세워놓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꾸역꾸역 교실 중앙으로 나아갔다.
"모델의 모습을 자유롭게 그리면 돼. 뒷모습이 보인다면 뒷모습을 그려도 괜찮고, 모두들 잘 아는 사람일 테니 평소 모습을 떠올려 그려도 좋고."
"네에!"
"학생들이 씩씩해서 좋아."
어린이들의 우렁찬 대답 소리를 칭찬한 기청해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 옆에 선 이유안은 주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것처럼 긴장한 상태였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까지 유안을 관찰하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시선에 꿰뚫리기는 처음이라 몸이 딱딱해졌다.
"긴장을 풀어. 이대로 한 시간 있으면 내일 분명 근육통이 올 거야."
"긴장, 안 했습니다."
"이유안 사장은 엉뚱한 구석에서 거짓말을 하는 습관이 있어."
기청해가 뻣뻣하게 힘이 들어간 유안의 척추를 손바닥으로 스르륵 매만졌다.
전신에 소름이 쭉 돋은 이유안은 비조 길드장을 노려보았다.
"징그럽습니다. 하지 마세요."
"상처야."
"기청해 씨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상처받는 습관이 있으시네요."
"내가 마음이 여려서."
유안은 애들 보는 앞에서 욕을 할 수는 없으니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단어를 꿀꺽 삼켰다.
그래도 기청해가 옆에서 헛짓거리를 해 준 덕에 굳었던 몸이 조금은 풀렸다.
수강생들도 슬슬 모델 관찰을 끝내고 연필을 든 상태라서 시선의 개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수업 끝날 때까지 다른 생각이나 해야지···.'
일일 모델이 된 유안은 1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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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이유안은 하나같이 멍청한 표정으로 그려진 제 초상화를 보며 어떤 일이든 쉬운 건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힘들더라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걸 그랬다.
초점이 흐려져 멍한 유안의 얼굴을 아이들은 꾸밈 없이 사실적으로도 표현해 놓았다.
그래도 윤슬은 유안을 최대한 멋지게 그려주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