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이야 어린이니까 옷을 따로 챙기게 했지만, 성인인 유안은 제주에 가서도 필요한 것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구할 수 없으면 기청해에게 만들어내라고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손재주가 좋으니 웬만한 건 다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당분간 파업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이 사장님···!"
"가자, 윤슬."
"응! 근데 파업이 뭐야?"
"일 안 하고 윤슬이랑 하루 종일 놀아준다고."
"우아! 좋은 뜻이구나!"
중앙 카페에 있으면 수창과 새로 길드장이 주기적으로 찾아와 괴롭힐 게 분명했다.
3호점을 수창이나 새로 길드에 지어줄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은 이후로는 두 길드장들이 번갈아 방문해서 선물 공세를 했다.
카페에 도움이 될 만한 재료나 아이템을 가지고 왔기에 선물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선물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유안의 생각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날씨 좋네. 비행기 잘 뜨겠다.'
파업하기 딱 좋은 시기이기도 했다.
강남점 지하 상가 계약들도 얼추 마무리되었고, 강해민은 류지우와 함께 헌터 협회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니 건설 일로 부를 수도 없다.
미술관 문화 센터도 아직 정식 오픈한 게 아니라서 당분간은 유예가 있었다.
비행기 착륙 장소에 도착하자 기청해가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비행기 조종도 할 줄 아십니까?"
"작은 건."
"비조 길드 망해도 굶어 죽을 일은 없겠습니다."
"길드가 망하면 중앙 카페에 알바생으로 들어갈 생각이야."
주변 S급 헌터들이 자꾸 알바생 자리를 노려서 탈이었다.
유안은 기청해의 말을 익숙하게 무시하고 윤슬부터 비행기에 태웠다.
"신발 벗고 타야 해?"
"안 벗어도 돼, 윤슬."
"바닥이 우리집 방이랑 똑같은데!"
"괜찮아. 청소는 미술 선생님이 하신대."
"우음··· 알았어!"
어린이는 신발을 그대로 신은 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비행기 내부를 마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일단 윤슬은 즐거운 것 같아 다행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파업까지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첫 파업 축하해."
"제주 도착하면 가이드나 잘 부탁드립니다. 윤슬이가 여행은 처음이라서요."
"이유안 사장을 위한 낚시 여행 코스도 짜 뒀어."
"던전은 안 들어갑니다."
단호한 유안의 말에 기청해는 싱긋 웃었다.
당연히 여행 계획표에 던전 방문 일정은 없었다.
이유안은 비행기에 올라 창밖을 응시했다.
굳이 여기까지 따라온 카페 직원들이 주르륵 늘어선 모습이 보였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들의 모습은 점처럼 작게 보이기 시작했다.
'흥.'
유안은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 뜻밖에 주어진 파업 겸 휴가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어부지리
비조 길드에 도착했지만 손님들을 반겨주는 존재는 없었다.
유안은 텅 빈 리셉션을 보고 기청해에게 물었다.
"직원 다 해고하신 거 아니죠?"
"이유안 사장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휴가를 줬을 뿐이야."
"오붓한 시간 필요 없으니까 다음부터는 평범한 모습 좀 보여주시죠."
"상처야."
"울지 마, 미술 선생님!"
윤슬이 기청해의 표정 연기에 홀랑 넘어가 작은 품을 내어주었다.
비조 길드장은 어린이에게 안겨 가식적으로 흑흑거렸다.
'어이가 없네.'
유안은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1층을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정말 길드 건물 전체가 텅텅 비어 있었다.
'일 시킬 사람 하나도 안 남기면 오히려 불편하지 않나?'
중앙 카페만 해도 혼자 운영하라고 하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카페도 아니고 국내 3위의 대형 길드를 길드원 하나 남기지 않고 싹 비우는 건 정말이지 기행으로만 보였다.
'뭐··· 안 이상한 적이 있기는 했나.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기청해에 대한 걱정을 놓아버린 유안은 윤슬과 함께 머무를 곳을 살폈다.
이번에도 최상층을 통째로 내어준 비조 길드장 덕에 파업 기간 동안 불편함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길드장님은 어느 방 쓰십니까?"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최상층까지 올라오는 동안 많은 층을 지나쳤지만 길드장이 쓸 법한 곳은 없었다.
유안이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느끼자 비조 길드장은 의뭉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원한다면 이유안 사장과 함께 밤을 보내줄 수 있어."
"최상층은 출입 금지입니다. 지금 당장 나가시죠."
이유안은 헛소리 스위치가 켜진 기청해의 등을 떠밀어 엘리베이터로 내쫓았다.
비교적 순순히 물러난 기청해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가볍게 인사했다.
"짐을 다 풀면 1층으로 내려와. 아이가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아뒀거든."
그래도 가이드 역할에는 최선을 다하려는 모양이었다.
역시 여행할 때는 현지인 가이드가 있어야 편하다.
유안은 최상층 전체를 마구 뛰어다니는 윤슬을 대신해 토끼 가방을 풀었다.
'챙기라는 옷은 안 챙기고···.'
가방 속에는 이유안 기준 잡동사니만 가득했다.
어린이에게 여행 짐 싸기를 온전히 맡긴 결과였다.
'윤슬이 옷도 몇 벌 사긴 해야겠네.'
관광이고 뭐고 마트부터 들러야 할 판이다.
유안은 윤슬의 가방에서 꾸깃꾸깃 구겨진 상어 인형을 마지막으로 꺼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윤슬, 이리 와."
최상층을 정복하고 다니던 윤슬을 나지막히 부르자, 아이는 이중앙 동상을 품에 안은 채 뽀르르 달려왔다.
"우리 이제 내려가?"
"응, 내려가야지. 중앙이는 방에 데려다 주고 오자."
"응!"
비조 길드 최상층에는 이중앙을 위한 방도 마련되어 있었다.
윤슬은 아르네스 유적 던전의 모래가 곱게 깔린 방에 중앙이 동상을 내려놓았다.
-킁!
"여기 마음에 들어? 엄청 크지!"
-크우으!
"미술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이 방 달라고 할까? 내 말은 다 들어준다고 했어!"
-크웅.
어린이는 고대 포식자를 끌어안고 모래 위를 뒹굴뒹굴 구르며 의사소통을 했다.
'말이 통하네···?'
유안은 윤슬의 새로운 능력에 신기해하며 둘의 대화가 끝나기를 잠시 기다렸다.
이윤슬이 기청해에게 부탁해 비조 길드 최상층을 얻어내기로 결론이 났다.
윤슬의 거대한 포부에 흐뭇해진 유안은 손을 내밀었다.
"윤슬, 이제 내려가자."
"응! 중앙아, 혼자서도 잘 놀고 있어야 해."
어린이는 고대 포식자의 볼에 입술을 꾹꾹 누르며 짧게 작별 인사를 했다.
1층 로비에서 기다리던 기청해는 윤슬이 달려오자 자연스럽게 팔을 벌렸다.
그대로 안길 줄 알았던 이윤슬은 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딱 멈추더니 기청해에게 외쳤다.
"미술 선생님! 여기 미술 선생님 회사지?"
"내가 만든 길드이기는 하지."
"그럼 저기 맨 위층에 있는 방도 선생님 거야?"
윤슬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말하자 기청해가 어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정이 담긴 손길을 느끼던 이윤슬은 곧 그 손을 터업, 붙잡았다.
"미술 선생님, 그럼 맨 위층에 있는 방은 나한테 주세요!"
"···응?"
"선생님 회사 엄청 크고 방도 많으니까 하나는 선물로 줄 수 있잖아요."
윤슬이 당당하게 '회사 주세요'를 외치자 기청해는 어린이 앞에서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유안은 뒤쪽에서 훌륭하게 잘 키운 어린이를 응원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하고 있어, 윤슬.'
머지 않아 비조 길드가 이윤슬 어린이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기청해는 결국 윤슬의 성화에 못 이겨 계약서 하나를 작성해 주었다.
비조 길드 최상층의 방 하나를 윤슬 앞으로 증여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에는 이윤슬의 특별 서명이 큼지막하게 들어갔다.
크레파스로 작성하기는 했으나 갖출 건 다 갖춘 계약이라서 기청해와 이윤슬은 인벤토리에 계약서를 한 장씩 사이 좋게 나누어 가졌다.
"아저씨! 내가 중앙이 방 선물 받아 왔어! 내 말은 다 들어주는 거 봤지?"
"그러게. 미술 선생님이 윤슬이 많이 좋아하나 봐."
"아저씨도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음, 그럼 나는 이 건물 통째로 갖고 싶은데."
"우음··· 그건 내가 미술 선생님이랑 좀 더 친해지면 말해 볼게."
어린이인 윤슬이 느끼기에도 길드 건물을 아예 달라고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목소리 크기가 소곤소곤 줄어들었다.
그래봤자 S급 헌터인 기청해의 귀에는 다 들렸다.
가까운 미래에 비조 길드 건물을 전부 빼앗기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기청해는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그래, 재밌다 이거지.'
유안은 비조 길드장 눈에서 피눈물을 뽑을 날을 기대하며 윤슬과 같이 속닥속닥 미래 계획을 세웠다.
일단 이윤슬 어린이가 건물을 선물 받으면 그걸 어떻게 사용수익할지는 이유안이 결정하기로 했다.
윤슬은 아저씨가 하는 거라면 다 좋다며 무조건 찬성표를 던졌다.
"내 재산을 털어갈 계획은 나중에 마저 세우고, 지금은 정해진 코스 여행을 시작할 시간이야."
기청해가 손목의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말했다.
유안은 윤슬과 대화하느라 쪼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키고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어디부터 안내하실 겁니까."
"제주에 왔으니 역시 바다부터 구경해야지. 윤슬아, 수영복은 챙겨 왔어?"
"아니! 근데 인벤토리에··· 이거 있어!"
가방에는 옷을 따로 챙기지 않았지만, 윤슬의 인벤토리에는 휴멜 대표 디자이너가 만들어준 기능성 헌터복이 한가득이었다.
윤슬은 그 중에서 유독 화려한 무늬를 자랑하는 옷을 꺼냈다.
수영복 형태로 가볍게 제작된 헌터복은 완벽한 방수 재질이라 바닷물에 풍덩 빠졌다 나와도 몸은 보송보송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윤슬이는 준비성이 철저하고, 이유안 사장은 수영복 가져왔어?"
"이대로 가면 됩니다."
애들도 아니고, 물에 들어갈 것도 아니니 평상복으로 가도 상관이 없었다.
유안은 바다를 들른 후에 대형 마트에도 방문할 것을 부탁하며 푸른 머리 가이드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바다에 도착했을 때 이유안은 수영복을 입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어린이는 좋아하는 아저씨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자꾸만 바다로 끌어들였다.
"윤슬, 난 바다 안 들어갈 거야."
"안 돼애!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안 놀고 가면 인생이 팍팍해질 거야!"
"···그런 말은 누구한테 배웠어."
"셀라! 같이 공부했거든!"
한국어 고급 어휘에 서툰 셀라는 가끔씩 윤슬과 함께 한글 공부를 하곤 했다.
선생님인 강해민이 셀라를 좀 부담스러워했으나 공부할 때는 진지하게 임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해민은 셀라 나이에 맞춰 어른이 쓸 법한 문장도 몇 개 알려주었고, 어린이는 그 옆에서 스펀지처럼 쏙쏙 공부 내용을 흡수해버렸다.
"어차피 한 번 살고 가는 인생인데 즐기다 가야 한다고 했어, 아저씨! 빨리 이리 와!"
"······그래."
유안은 아이의 어휘를 손봐주는 것을 포기하고 작은 손을 맞잡았다.
바다 쪽으로 잡아 끄는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 E급 헌터는 자꾸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윤슬, 좀 천천히."
"아냐, 빨리이!"
평소라면 이유안을 배려해서 조심스럽게 행동했겠지만, 살면서 처음 제대로 된 바다를 만난 윤슬은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던전 안에서도 이만큼 많은 물을 본 적이 없다.
"우아, 엄청 시원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바닷물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유안은 바다에 발끝만 닿았는데도 온몸이 시린 느낌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으나 윤슬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벅저벅 계속해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윤슬, 너무 깊이 들어가면 위험해."
"응, 이제 그만 들어갈게!"
해수면이 유안의 무릎 정도에서 찰랑일 때 어린이가 걸음을 멈췄다.
사실 [청사진] 스킬 덕분에 수중 호흡을 비롯해 심해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능력을 가진 이윤슬이었지만 아저씨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유안과 윤슬이 늦가을 바다에서 찰박거리는 동안 기청해는 모래사장의 조개 껍데기 몇 개를 주웠다.
커다란 손이 빠르고 깔끔하게 몇 번 움직이고 나니 조개 껍데기는 팔찌와 목걸이가 되었다.
손바닥 만한 조개 하나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펜던트까지 만든 기청해는 그 가운데에 얼룩 상어의 기포 주머니를 설치했다.
기포를 주기적으로 충전해주기만 하면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퐁퐁, 보글보글.
산뜻한 공기를 전해주는 펜던트에 비조 길드장은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몸 속의 생명력이 일부 충전되는 느낌이 들었다.
"평화로워라."
기청해는 펜던트를 다시 닫고 유안와 윤슬을 멍하니 응시했다.
바다를 떠날 수 없는 이유였다.
*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겸 대형 마트에 들렀고, 그곳의 푸드 코트에서 식사를 시도했으나 장렬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중앙 카페의 음식 수준에 익숙해진 윤슬은 푸드 코트의 음식을 한 입씩 맛보고 자꾸만 울상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