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37)

실외이지만 실내처럼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설치한 덕에 중앙이도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지내게 되었다.

물론 밤에는 자꾸 3층 방에 들여 보내달라고 조르는 탓에 매일 두 번씩 이중앙 동상을 안고 건물을 오르내리는 것이 카페 사람들의 일상이 되었다.

이유안은 강남점 지하에 입점 신청한 사람들의 서류를 살펴보았다.

직원들이 1차로 추려준 것이라 양은 별로 되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해야 직성이 풀려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다.

한창 일에 집중하는데 담벼락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뭐지?'

위치가 정문 쪽이었다.

뒷마당과 정문은 거리가 있어서 웬만한 소음으로는 서로 방해를 받지 않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유안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 손님들이 오셨어요."

"아."

올 게 왔구나.

누가 온 것인지 예측한 유안은 정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님이 누구일지 짐작까지 했다.

"수창 길드장과 새로 길드장이죠?"

"미리 연락 받으셨나 보네요. 두 분이 같이 오셨더라고요."

유안의 헌터 디바이스에는 류지우 협회장의 연락만 몇 통 쌓여 있을 뿐이었다.

진 선과 차건오에게서 온 연락은 없다.

그러나 이유안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방문한 것인지 잘 알았다.

'보나마나 그 얘기 하러 왔겠지.'

뒷마당 출입 허가를 받은 국내 1, 2위 길드의 길드장들이 유안의 앞에 섰다.

방금까지 던전에서 치고 받고 구르다 와서 잘난 얼굴들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헌터용 전투복도 자연 수선이 되는 한계를 넘어서 찢어지고 더럽혀진 탓에 엉망진창이었다.

"유안 사장님!"

"이유안 사장님."

수창 길드장은 감정이 가득 실린 목소리였고, 새로 길드장은 비교적 차분했다.

기질이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 유안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은 동일했다.

"중앙 카페 3호점은 수창 옆에 지어주실 거죠?"

"다음 지점은 새로 길드와 함께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떡 줄 사장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한 솥 가득 들이마신 길드장들이 자기 어필을 시작했다.

"1위 길드 옆에 짓는 게 훨씬 낫죠! 화제성도 충분히 챙길 수 있고. 그리고 중앙 카페 직원들한테는 수창의 간부급 길드원에게만 주는 혜택을 전부 제공할 수 있어요! 필요한 재료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다 준다고도 약속할게요."

"새로 길드와 함께하면 이유안 사장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안전을 보장해 드릴 수 있습니다. 길드 순위는 사실 중요하지 않아요. 길드장의 평소 행실이나 마음가짐이 길드 전체의 안전을 좌우하니까요."

두 길드장이 설탕 발린 제안을 했으나 유안의 표정은 떨떠름해지기만 했다.

'내가 언제 3호점 지을 거라고 얘기를 했었나?'

술기운에도 그런 말을 꺼낸 적은 없다.

유안은 국내 최대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사람들이 중앙 카페 입점 문제로 몸싸움까지 했다는 사실에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길드장들은 중앙 카페 쟁탈전에 진심이었다.

차건오를 힘껏 노려보던 진 선은 콧김을 쉭쉭 내뱉으며 최후의 수단까지 쓰려고 했다.

"사장님! 이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제가 사실···!"

파업하기 딱 좋은 날

진 선은 막상 진실을 밝히려니 두려워졌다.

가뜩이나 새로 길드장과 싸운 상태라서 중앙 카페 사장의 시선이 영 탐탁치 않았는데, 여기서 진실을 말해버리면 더 큰 미움을 사게 될 것 같았다.

'타이밍이 영 별로인데.'

삼 초 전에 한 말을 무르고 싶었다.

그런데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고, 이유안의 눈은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진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정이가 말조심 하라고 할 때 들을 걸.'

여기까지 와서 사실을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대면 이유안 사장은 더 화가 날 것이다.

지금처럼 유안의 호감 한 점이 아쉬운 상황에는 절대 미움받을 짓을 하면 안 된다.

"그게··· 그러니까······."

결국 진 선은 진실을 털어놓기 위해 인벤토리에 고이 묵혀두었던 아이템을 꺼냈다.

착용자의 외형을 바꾸어주는 검은 마스크.

알바생 최선진으로 활약할 때 쓰던 아이템이지만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수창 길드장의 모습으로 친해지기 전에는 종종 유용하게 썼고.'

이유안은 여전히 진 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으나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꾸준히 카페에 얼굴을 비추고, 구하기 힘든 재료를 많이 기부한 결실이었다.

윤슬이 선을 친구 목록에 넣어준 것도 한 몫 했다.

'중앙 카페에서 알바는 못 하게 되었지만···.'

진 선은 자신이 최선진일 때부터의 일을 주욱 회상하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그래···! 이제 많이 친해졌으니까 진실을 밝혀도 이해하고 넘어가주겠지!'

근거가 빈약한 자신감을 손에 쥔 진 선이 검은 마스크 아이템을 착용했다.

스르륵.

스킬을 쓴 것처럼 순식간에 진 선의 외형이 바뀌었다.

그러나 S급 헌터의 기척마저 숨길 수는 없어서 이전에 연기했던 최선진의 모습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수창 길드장님."

중앙 카페 사람이라면 유안 빼고 다 눈치 챈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최근까지도 최선진에게 종종 안부 문자를 보내곤 했던 이유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하하··· 그··· 놀라셨나요···? 이미 알고 계셨을 것 같기는 한데···."

"몰랐습니다. 목소리까지 바꿨는데 제가 무슨 수로 알아봅니까. 그리고 최선진 씨는 F급 헌터였습니다."

"아, 그건···! 그때 잠깐 등급이 낮아지는 저주에 걸려서··· 그게 그렇게······."

"어쨌든··· 최선진 씨가 수창 길드장님이라는 거죠. 여태 절 속이신 거고요."

유안의 확인사살에 진 선은 빙하 던전을 돌 때보다 서늘한 기분을 경험했다.

'망했다!'

옆에 선 차건오가 꼴 좋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화났는데 그 앞에서 쌈박질까지 했다가는 이유안이 자신을 영영 보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도 있다.

'차 씨는 왜 하필 이번에 엮여서!'

진 선은 상황을 더 최악으로 만든 차건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곧바로 등을 퍽 치는 손길이 돌아왔다.

"중앙 카페에서는 전투 금지입니다."

유안은 두 길드장의 투닥거림을 바로 바로 차단했다.

진 선이 먼저 고분고분 대답하려고 했으나 차건오가 선수를 쳤다.

"네, 사장님. 안 싸울게요. 저 여기까지 온 김에 중앙이랑 좀 놀아주고 갈까요?"

차건오가 이중앙의 부하1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진 선은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도 뭔가 어필하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내세울 게 없었다.

지은 죄가 많은 수창 길드장은 한숨을 내쉬고 마스크라도 벗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동작을 유안이 말렸다.

"웬만하면 마스크 벗지 마시죠. 최선진 씨로 있어야 화가 덜 날 것 같습니다."

"···네."

"그리고 차건오 씨, 지금 중앙이랑 놀 때입니까? 두 분 싸웠다고 기사 난 것부터 해결할 생각을 하셔야죠."

"······네, 그러네요."

이유안에게 평등하게 골고루 혼난 길드장들은 저절로 고개를 푹 숙이게 되었다.

그러나 반성하는 중에도 자꾸 유안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어이, 차 씨. 지금 물어볼까?'

'같이 물어보는 게 낫긴 하겠죠.'

이럴 때만 합이 잘 맞는 진 선과 차건오가 시선을 빠르게 교환했다.

지난 일주일, S급 던전을 다섯 개나 격파하며 싸운 원인을 해결할 차례였다.

"사장님, 3호점은 수창 길드에 지어줄 거죠?"

"새로 길드 1층 상가 자리를 싹 비워드릴게요."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오자 유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길드장들이 김칫국을 자꾸 끓여 마신다는 점이 유안을 당황스럽게 했다.

더 이상의 싸움을 막기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현실을 알려줘야 할 때였다.

"중앙 카페 3호점은 수창 길드에도, 새로 길드에도 안 지을 겁니다. 두 분이 자꾸 이런 식으로 말썽 부리시면 앞으로도 영원히요."

유안의 최후통첩에 진 선과 차건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

"사, 사장님··· 화 푸세요······."

"언제쯤 알게 되실지 궁금해서 그랬어요, 사장님."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전 사실 이 사장님이 중간에 눈치 챘을 줄 알았거든요!"

유안이 최선진의 정체를 밝히자 본점 직원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뒤늦게 상황파악을 한 홍소라가 '우, 우와··· 저, 정말 놀랍네요···.?'하고 어색한 연기를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이유안은 직원들의 반응으로 그들은 이미 최선진이 수창 길드장임을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이거 오늘 구운 마들렌이에요···."

"······버터 핫 초콜릿입니다. 더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직원들이 유안의 기분을 생각해 단 음식을 이것저것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유안은 테이블 위에 손도 안 올리고 삐딱한 자세로 앉아있기만 했다.

사장님이 이렇게까지 토라진 모습을 처음 보는 직원들은 속닥속닥 대책 회의를 열었다.

회의 결과는 사장님의 품에 윤슬이와 중앙이를 함께 안겨주자는 쪽으로 났다.

"아···! 그, 근데 그 전에··· 우리 정산할 거 있잖아요···."

서정원이 윤슬을 데리러 3층으로 올라가려 할 때, 홍소라가 정원을 붙잡았다.

"다, 다들··· 헌터 디바이스 꺼내세요···!"

"아, 맞다! 나 어디에 걸었었지?"

김주현이 바지 주머니에서 디바이스를 꺼내 내기용으로 개설된 채팅방에 들어갔다.

과거 대화 기록을 살펴보니 자신이 어느 쪽에 걸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제일 근접하게 맞힌 건 저 같네요."

서정원이 '겨울이 되기 전'에 걸었던 자신의 기록을 보여주며 말했다.

'올해 안에는 불가능'에 걸었던 홍소라, '이미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중'에 걸었던 김주현, 그리고 '평생 모르실 겁니다'에 걸었던 방재이가 꽤 많은 양의 돈을 서정원의 디바이스로 송금했다.

이유안은 영원히 몰라야 할 직원들만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이제 윤슬이랑 중앙이 데리고 올게요."

"저, 정원 씨··· 돈 많이 벌었으니까 오늘 주방 설거지 정원 씨가 하세요···."

"하하, 그럴게요."

사람 좋게 웃은 서정원이 3층으로 올라가고, 다른 직원들도 각자 할 일을 찾아서 흩어졌다.

뒷마당의 유안은 카페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좀처럼 불퉁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평소처럼 놀리려 들면 기분이 오히려 나을 텐데, 이번에는 모든 직원들이 이유안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의심 가는 구석이 너무 많기는 했어.'

최선진이 나타났을 때는 수창 길드장이 카페에 오지 않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여기저기서 대놓고 힌트를 줬는데 끝내 퍼즐 조각을 맞히지 못한 건 유안 자신이었다.

서정원을 비롯한 중앙 카페 직원들이 암묵적으로 진 선의 비밀을 지켜줬다는 것만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들 재밌었겠지, 아주.'

혼자만 끝까지 속아버린 유안은 얄미운 직원들에게 소소한 복수를 다짐했다.

*

유안은 윤슬을 품에 안고 어린이의 디바이스로 어딘가에 연락을 넣었다.

문자 내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글 마스터 이윤슬이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질렀다.

"아저씨! 우리 미술 선생님 만나러 가?"

"응."

"우아! 다른 친구들도 데려가면 안 돼?"

"이번에는 셋이서만."

이유안이 말한 셋은 유안과 윤슬, 그리고 중앙이까지였다.

"그럼 나 얼른 준비할게! 미술 선생님 줄 선물도 챙길래!"

"옷 많이 챙겨, 윤슬. 오래 있다가 올 거니까."

유안은 중앙 카페 직원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서빙을 하던 서정원도, 바 테이블 안쪽에서 커피 머신을 조작하던 방재이도, 주방에서 막 나오던 홍소라도 멈칫했다.

"비조 길드에 가시려고요, 사장님?"

"어, 얼마나 있다 오시게요···?"

"······제주도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직원들이 유안에게 우르르 다가와 질문 폭격을 했다.

그러나 이유안은 대답해줄 생각이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돌렸다.

"아무것도 안 알려줄 겁니다."

최선진의 정체를 비밀로 했던 것에 대한 복수로, 제주 여행 일정에 대한 정보를 직원들에게 공유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새침하기 짝이 없는 사장님의 모습에 직원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뭘 그렇게들 놀라십니까. 어차피 저 없어도 잘 굴러가지 않습니까. 일손 부족하면 수창 길드장이라도 불러서 알바 시키면 되겠습니다. 경력자이니 잘 하겠죠."

"···사, 사장님······."

유안의 유치한 발언에 홍소라가 경악하여 쿠키 트레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서정원이 냉큼 달려가 트레이 밑바닥을 받쳐 주었다.

중앙 카페 직원들이 당황한 사이 이윤슬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우다다 내려왔다.

등에 멘 토끼 가방의 귀가 펄럭거렸다.

"아저씨이! 미술 선생님이 비행기 보내준대! 타고 오래!"

"연락 왔어?"

"응! 여기."

윤슬이 작은 손으로 디바이스를 붙잡아 내밀었다.

기청해로부터 온 문자에는 근처의 너른 공터 위치가 찍혀 있었다.

그곳에 비행기를 착륙시킬 생각인 것 같았다.

'시간도··· 금방이네. 바로 나가면 얼추 맞겠다.'

유안은 중앙이를 챙겨 품에 안았다.

아르네스 떠나 있는 동안에는 동상 형태일 테니 들고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윤슬의 작은 손까지 잡은 유안은 떠날 채비를 마치고 중앙 카페 직원들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카페 잘 보고 계십시오."

"진짜 가시는 거예요, 사장님?"

"당연하죠. 해민이랑 류지우 씨가 종종 찾아올 텐데 휴가 중이라고 말 전해주시면 됩니다."

"짐, 짐도 제대로 안 챙겼잖아요···!"

"생필품은 거기 도착해서 사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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