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37)

본점에서는 이런저런 일로 바빴는데 강남점에 오니 제 발로 걷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로웠다.

셀라는 유안을 술 저장고 앞까지 매끄럽게 배달했다.

그리고 저장고의 커다란 문고리를 붙잡아 휙 밀었다.

"타다~! 엄청 많아졌지?"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치고 있는 오크통들이 유안을 반겼다.

'어쩐지 주현 씨가 자꾸 나무를 사더라···.'

본격적으로 주조에 맛이 들린 셀라는 맥주와 와인 말고 다른 종류의 술도 여럿 시도해보고 있었다.

곧 위스키 한 통이 완성될 예정이기도 했다.

셀라는 구석에서 논알콜 샴페인 병 하나를 들고 나왔다.

서늘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라 당장 마셔도 좋을 만큼 시원한 온도를 자랑했다.

"지금 마셔볼래?"

"아니, 카페 가서···."

당장 코르크 마개를 뽑아버릴 기세로 구는 셀라를 겨우 말렸다.

그런데 샴페인 병을 들고 가게로 돌아가려 할 때 유안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김치 통 아냐?'

어디서 많이 본 적갈색 플라스틱 통의 모습에 유안의 동공이 흔들렸다.

강남점 사람들이 하다하다 카페에서 김장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

아삭아삭 잘 익은 김치를 잔뜩 얻어온 유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좋긴 좋은데··· 이러다 주현 씨가 김치 냉장고도 만들겠다고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본점 직원들이 김치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대대적인 김장을 하자고 덤벼들 수도 있다.

유안은 뒷마당에 무와 배추가 가득 쌓인 모습을 잠시 상상하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말이 씨가 될 수도 있다.

"생각보다 금방 다녀오셨네요, 사장님."

"거, 거기서 아예 저녁까지 드시고 올 줄 알았어요···."

"강남점은 밤 늦게까지 바쁘지 않습니까."

술 마시러 온 손님들로 북적이는 곳에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민망했다.

그래서 유안은 웬만하면 저녁 식사를 본점에서 해결하는 편이었다.

어차피 윤슬의 저녁도 챙겨줘야 하니 이 편이 합리적이기도 했다.

"사장님, 저녁으로 뭐 드시고 싶은 거 있나요?"

"······보쌈 어떻습니까."

돼지김치찜도 괜찮을 것 같고.

유안은 인벤토리의 김치 통을 꺼내 본점 직원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우, 우와··· 한국인 아니랄까 봐······."

홍소라가 강남점 직원들의 김장 추진력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서정원도 먹음직스럽게 생긴 배추김치를 살펴보며 눈웃음을 흘렸다.

"제, 제가 며칠 전에··· [던전화] 스킬 쓰다가 배추 비슷한 게 나왔거든요···."

"···그걸로 만든 모양입니다. 동치미도 있는데 좀 더 익은 다음에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 맞아요···. 스킬 썼는데 배추랑 무가 같이 떠서······."

"주현 씨한테 부탁해서 장독대라도 하나 만드는 건 어떨까요?"

서정원이 한 술을 더 떴다.

'당장 김치 냉장고를 만들 수는 없으니까 장독대에 김치를 묻어두는 게 좋기는 하겠지···?'

유안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 기왕 생긴 김치를 최대한 맛있게 오랫동안 먹고 싶었다.

지하 레스토랑의 장다온과 제자들도 올라와서 한바탕 김치 구경을 하고 갔다.

자연스럽게 저녁 메뉴는 김치찌개, 돼지김치찜, 보쌈, 그리고 삼겹살로 정해졌다.

"고기는 다같이 먹어야 맛있으니까 친구들도 부르자!"

맛있는 걸 나눠먹을 줄 알게 된 어린이의 지론에 따라 단골 손님들을 초대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로 이어졌다.

윤슬 덕에 중앙 카페는 거의 매일이 축제였다.

"아···! 그, 그런데 수창이랑 새로 길드 쪽은··· 오늘 못 올 텐데···."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는 이윤슬을 바라보던 홍소라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유안은 금시초문인 일이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드에 무슨 일이라도 있답니까?"

"사, 사장님··· 모르셨어요···? 수창이랑 새로 길드··· 길드전 하기 일보 직전이잖아요···! 오, 오늘 속보도 떴는데···?"

새로운 열차와 강남점 지하를 점검하느라 종일 헌터 디바이스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던 유안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소식이었다.

다급하게 디바이스를 꺼내 뉴스 1면을 확인하니 사진 한 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 인간들 왜 싸워?'

수창 길드장 진 선과 새로 길드장 차건오가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는 사진이었다.

두 사람의 살기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중앙 카페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기사에 실리니 유안으로서는 당황스러웠다.

'물론 둘이 같은 테이블에 앉지는 않았지만··· 밥 먹으면서 얘기도 한 마디 안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싸울 만큼 사이 나쁜 건 아니지 않았나?'

중앙 카페에서 보여준 모습과 언론에 보도된 모습, 둘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떡 줄 사장은 생각도 안 하는데

윤슬이 먹을 김치를 물에서 건져낸 유안은 자신의 헌터 디바이스를 힐끗, 한 번 더 확인했다.

맛있는 저녁을 앞에 두고도 자꾸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게 문제였다.

"윤슬이 제가 챙길게요, 사장님."

보다 못한 서정원이 나서서 공동 육아를 자처했다.

평소였으면 온종일 열심히 일한 본점 매니저를 쉬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윤슬의 저녁 식사만큼은 자신이 챙겼을 유안이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 대체 왜 싸운 건데?'

수창 길드장과 새로 길드장이 드디어 담판을 짓는다는 내용의 뉴스만 수십 개를 읽었다.

그러나 그 어떤 신문사에서도 싸움의 명확한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고 있었다.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 반응을 보니 대부분이 유안과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뭐 때문에 싸우는 건데.

살벌한 신경전을 했다는 것 외의 정보값이 주어지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 와중에 진 선과 차건오는 윤슬의 연락조차 받지 않았다.

'어떻게 애 연락도 씹냐!'

두 사람이 평소 윤슬을 얼마나 예뻐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작금의 상황이 경악스럽기만 했다.

아무리 바빠도 이윤슬이 보고 싶다고 부르면 껌뻑 죽어서 버선발로 품위 없이 달려나오던 길드장들이었다.

'둘이 진짜 어디 던전이라도 들어가서 한 판 뜨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라 믿고 싶지만 연락두절 상태이니 이것저것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유안의 디바이스 말고 윤슬 쪽으로 문자 두 통이 도착했다.

하나는 수창 길드의 부길드장인 최미정, 다른 하나는 새로 길드의 길드원이 보낸 것이었다.

[큰일은 아니니 너무 걱정 마세요. 큰일로 번지면··· 번지기 전에 제가 길드장님을 처리하겠습니다.]

[저희 길짱님이 개념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아무리 그래도 수창 길짱을 죽이진 않을 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는 같았지만 뉘앙스 측면에서 무척이나 달랐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치곤 내용이 살벌한데.'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날 싸움처럼 묘사해 두어서 불길했다.

특히 수창 부길드장은 길드장이 죽으면 딱 3일간만 슬퍼하다가 본인이 길드장 자리를 차지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

유안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자 근처에 있던 윤슬이 뽀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다급하게 작은 손으로 삼겹살 상추 쌈을 제조해 이유안의 입에 넣어버렸다.

"아저씨, 밥상머리 앞에서 한숨 쉬면 복 달아난대. 오늘 맛있는 거 짱 많은데 왜 한숨 쉬어!"

"······."

유안은 마늘과 고추 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윤슬표 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속재료의 비율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많이 넣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이가 만들어준 것이니 이유안은 코가 뻥 뚫리는 경험을 하며 그것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알았어, 한숨 안 쉴게."

"으응, 좋아!"

"윤슬, 이리 와. 나도 하나 만들어 줄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유안은 아이의 입 크기에 맞춰서 최대한 정성껏 상추쌈을 완성했다.

매운 맛을 내는 것들은 싹 빼고 고기와 밥, 물에 씻은 김치와 쌈장 약간을 넣은 어린이용 쌈이었다.

"아."

유안이 시키는 대로 입을 벌리고 아기 새처럼 음식을 받아먹은 윤슬은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저씨에게 싸준 쌈도 이렇게 맛있었겠구나 하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말았다.

덕분에 이유안은 어린이의 손에서 탄생한 가지각색의 상추쌈을 경험해야 했다.

달고, 쓰고, 마지막 건 새콤했다.

테이블 위의 한정적인 재료만으로도 기가 막히는 맛을 내는 어린이 요리사였다.

"···고마워, 윤슬. 나 이제 배불러. 그만 먹을래."

"새 모이만큼 먹었으면서!"

"대신 윤슬이가 많이 먹어주면 되지."

"음··· 그래!"

윤슬은 정말 배불러 보이는 유안을 뒤로하고 다시 정원에게 갔다.

서정원은 윤슬의 입으로 적당히 식은 고기만 쏙쏙 넣어주었다.

'육아··· 쉽지 않네.'

입에 남은 강렬한 맛을 찬물로 씻어내린 유안은 헌터 디바이스를 들었다.

진 선과 차건오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을 넣어둘 생각이었다.

이걸 읽는다면 중앙 카페에 찾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던전 공략할 때 도움이 될 만한 음료를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한정 수량이라 늦게 오시면 없을 수도 있어요.]

사람을 꼬시는 데는 역시 먹을 게 최고다.

*

먼저 연락이 닿은 건 의외로 차건오 쪽이었다.

수창 길드장이 더 빨리 움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쪽은 여전히 깜깜무소식이었다.

'새로 길드장도 답장 하나 보내놓고 끝이긴 했지만.'

길드원을 대신 보내겠다는 답장이었다.

그리고 연락을 못 받아서 미안하다는 사과도 함께였다.

'바빠서 그렇다고? 뭐 때문에 바쁜지 알려나 주든가.'

수창과 새로의 길드장이 싸운다는 기사는 며칠간 지치지도 않고 헌터 뉴스판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둘이서만 던전에 들어가는 걸 봤다는 목격담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기사의 내용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는 없으나 상황이 비일상적으로 돌아가는 건 확실했다.

'싸우는 게 아니면 벌써 길드 차원에서 정정 보도를 냈겠지.'

그런데 수창도 새로도 잠잠했다.

길드장들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는 그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인 것 같았다.

답답할 정도의 기다림이 이어지고 있을 때 새로 길드원이 중앙 카페에 도착했다.

"길드장님 심부름 왔는데요!"

"이걸 가져가시면 됩니다."

전투에 도움이 되는 음료를 만들었다는 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서정원과 방재이가 함께 머리를 맞댄 결과 별가루가 뿌려진 것처럼 반짝이는 음료 하나를 만들 수 있었는데, 그 음료가 정말 다양한 효과를 냈다.

체력과 마나를 회복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미약한 해독, 해주 효과까지 들어가 있어서 홍소라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이름을 붙이려고 했다.

'스킬이나 전용 아이템을 써서 회복하는 게 훨씬 낫긴 하겠지만.'

그래도 음료를 마시는 것만으로 이 정도의 효과를 발휘한다는 게 대단한 점이었다.

던전을 공략할 때 쓰는 게 가장 효율적일 것 같아 판매는 하지 않고 단골 헌터들에게 나눠주기로 마음 먹었다.

"되게 반짝거리네요. 밤하늘 같아요!"

음료 네 잔이 담긴 캐리어를 받은 새로 길드원이 감탄했다.

맛을 궁금해하는 것 같아 유안은 길드원에게 따로 빼둔 음료 한 잔을 건넸다.

"마셔 보시죠."

"어, 그래도 돼요? 저 심부름만 하러 온 건데···!"

"괜찮습니다."

중앙 카페의 사장이 괜찮다고 하자 마음을 정한 새로 길드원은 잔에 담긴 음료를 시원하게 원샷했다.

'양이 꽤 될 텐데?'

여러 번에 나눠 마실 만한 음료를 단숨에 끝장낸 길드원은 캬아- 하는 소리를 내며 생글생글 웃었다.

"솜사탕 맛 나요! 진짜 맛있네요."

중앙 카페 직원들이 만든 것이니 맛은 장담할 수 있었다.

유안은 새로 길드원이 행복해하는 순간을 노려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차건오 씨··· 새로 길드장님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어··· 정확한 위치까지는 저도 잘 몰라요!"

"그럼 뭘 하고 있는지는 아십니까?"

"그건······. 아, 사실 이거 길드장님이 중앙 카페 사장님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요. 진짜, 진짜 제가 말했다는 건 비밀이에요? 중앙 카페 분들한테도 말하지 마시고요. 사장님이니까, 사장님한테만 알려드리는 거예요!"

새로 길드원이 속닥거렸다.

유안은 꼭 비밀로 해주겠다고 약속하며 길드원과 새끼 손가락까지 걸었다.

중앙 카페의 이유안 사장을 신뢰한 새로 길드원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형 길드장 불화설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을 듣고 유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만 여러 번 흘리고 말았다.

*

"사, 사장님··· 이제 걱정 안 하시네요···?"

"무슨 걱정 말입니까?"

"수창 길드랑 새로 길드요···! 요, 요며칠 헌터 디바이스만 붙잡고 계셨으면서···."

"아,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S급 헌터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웬만해서는 죽지도 않을 테니 신경 끄는 게 마음 편하죠."

"···차, 차가워······."

홍소라가 제 팔을 슥슥 매만지며 유안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자신이 알던 사장님이 아닌 것 같았다.

뉴스나 헌터들이 전해주는 소식을 들어보면 수창 길드장과 새로 길드장의 신경전이 계속됨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유안이 너무도 태연한 모습을 보이니 소라는 그 부분에서 의아함을 느꼈다.

'며칠 전에 새로 길드원이 와서 무슨 얘기를 하고 간 거지?'

촉이 좋은 홍소라는 유안이 그날 특별한 이야기를 들었을 게 분명하다고 짐작했다.

'사장님한테 물어봐도 안 알려주겠지···?'

이유안의 성격을 웬만큼 파악한 홍소라는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조용히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궁금해서 몸이 들썩거리기는 하지만, 어차피 때가 되면 다 밝혀질 일이다.

소라는 오븐에 넣어둔 쿠키를 꺼내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기온이 점점 내려감에 따라 본점 뒷마당에는 임시 지붕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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