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37)

"여기."

교탁 아래에서 새 분필을 찾아낸 유안이 윤슬에게 그것을 건넸다.

분필은 먼지가 많이 날려서 다른 형태의 필기구로 바뀌고 있는 추세라지만, 칠판을 만든 장인이 추억에 젖어버리는 바람에 예전 모습 그대로의 교실이 완성되었다.

장인 김모 씨는 마카나 물백묵보다 분필이 훨씬 만들기 쉬우니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라고 해명했다.

윤슬이 칠판에 마음껏 낙서를 하는 동안 유안도 하얀 분필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칠판 구석에 장난스럽게 글자 몇 개를 적었다.

<복도에서 뛴 사람>

이윤슬

이유안이 적은 내용을 윤슬이 확인하게 된 건 다음 미술 시간이었다.

*

"게이트 근처에 애들이 많아지니까 색다르기는 하네요."

"일하러 안 가십니까, 협회장님?"

"아직 협회장 아니니까 이름 부르시라니까요."

"류지우 씨, 일하러 안 가요?"

"왜 자꾸 절 보내려고 하세요."

강해민이 협회 건물 의뢰를 수주한 이후, 유안은 꾸준히 지우에게 툴툴거리고 있었다.

류지우는 유안이 틱틱댈 때마다 불쌍한 척을 했다.

"해민 씨는 아직 제가 부탁한 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심술을 부리시네요···."

"심술 부린 적 없습니다. 류지우 씨 바쁠 테니까 배려해드린 건데요."

"참, 오늘 열차 시범 운행 있다고 했죠. 몇 시에 하나요?"

"···이제 곧 합니다."

지우가 화제를 돌리려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유안은 순순히 대답해줬다.

본점과 강남점 사이를 오가게 될 열차가 완성되었고, 오늘은 그 첫 운행을 지켜보는 날이다.

류민희와 김주현이 열차 도안 단계부터 1급 보안을 유지한 탓에 유안도 아직 열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유안이 열차 얘기를 꺼낼 때마다 흐흐흐 음흉하게 웃기만 했다.

'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궁금증이 쌓여가기는 했으나 류민희와 김주현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 했을 테니 믿어보기로 했다.

유안은 시범 운행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류지우에게 말했다.

"열차 타고 그대로 강남점까지 가시면 되겠습니다. 가서 일 좀 하세요."

"왜 자꾸 상사처럼 굴어요, 유안 씨."

"요즘 너무 놀기만 하시지 않습니까."

협회의 급한 불은 다 껐으니 류지우가 한가로운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런데 예전에는 없던 일도 만들어 하던 지우가 자꾸 중앙 카페에만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니 적응이 안 되었다.

"건물이 아직 안 지어져서 할 일이 없는 걸 어떡해요. 아, 그럼 해민 씨한테 연락해서 당장 협회 건물부터 지어달라고 부탁-."

"그냥 노세요. 평생 노십시오."

"하하, 그건 안 되고요."

류지우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 실실 웃으며 유안의 속을 박박 긁어놓았다.

중앙 카페의 수많은 단골들에게서 단 하나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사장을 놀리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는 점일 것이다.

이유안은 요즘 홀로 지뢰밭에 서 있는 것처럼 곳곳에서 놀림을 받고 얼굴이 울긋불긋해지기 일쑤였다.

'단골이라서 참는다.'

그들이 중앙 카페에 쓴 돈만 모아도 쌍둥이 건물 하나가 뚝딱 나올 수준이었으니 유안은 꾹 참아보기로 했다.

"준비 끝났대요, 사장님."

유안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는 동안 열차 세팅이 완료된 모양이었다.

지하에 있는 김주현에게서 연락을 받은 서정원이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내려갑시다."

이유안은 잠시 휴식 팻말을 중앙 카페 정문에 걸었다.

그리고 직원들을 우르르 이끌고 지하철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윤슬은 계단에서 뛰지 못하도록 정원이 미리 안아들었다.

"진짜 안 뛸게! 내려 줘!"

"계단 내려갈 동안만, 윤슬아."

안 뛴다는 거짓말에 여러 번 속아본 서정원은 윤슬의 애원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류지우 씨는 열차 타고 강남점으로 가시는 겁니다. 아시겠죠?"

"유안 씨도 저랑 같이 출근하시면 되겠네요."

"싫습니다."

유안은 지우의 제안을 빠르게 거절하고 걷는 속도를 좀 더 빠르게 했다.

지하에 도착하니 상가에서 구경 나온 사람들이 가득해서 열차 디자인을 바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니 비로소···.

"···주현 씨, 민희 씨, 상황 설명 부탁드립니다."

어딘가에서 표절해 온 것 같은 얼굴의 열차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제 보니 열차의 기본 색은 파란색이고, 하단부에 빨간색으로 한 줄이 칠해져 있었다.

대놓고 베꼈으면서 당당한 류민희가 운전석으로 쏙 들어갔다.

"아니, 왜요~. 이거 표정도 바뀌는데!"

민희가 버튼 하나를 누르자 열차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화했다.

열차가 우는 표정을 지을 때, 유안은 열차 옆에서 같이 울어버리고만 싶었다.

"이 사장님, 진짜 멋있죠! 이거 외국에서도 인기 많대요. SNS 타면 해외 관광객도 많아지지 않을까요?"

김주현이 꽤 진지하게 열차 디자인을 이렇게 한 이유를 설명했지만, 유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다른 걸로 바꾸세요."

"에이··· 재미없다. 뭐, 사장님이 이렇게 나오실 줄은 알고 있었어요!"

류민희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다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장난으로 씌워둔 것 말고 진짜 디자인으로 열차 전체가 스르르 변화하기 시작했다.

길드전 D-?

본점과 강남점을 오갈 열차의 진짜 디자인은 중앙이였다.

표정이 나른해지고 꼬리는 더 두툼해졌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이전에 만든 열차와 나란히 놓고 보면 한 세트라는 것을 누구든지 알아볼 수 있었다.

유안은 버튼 하나로 멀쩡해진 디자인에 안도하며 류민희와 김주현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민희와 주현은 반성하는 기색도 없이 아쉬운 티만 팍팍 냈다.

"에이~ 그래도 열심히 만들었는데 하루쯤 그 상태로 달리게 해 주시지."

"이 사장님이 좀 깐깐한 구석이 있으시다니까. 민희야, 우리 사장님 안 볼 때 몰래···."

"안 됩니다."

이유안은 김주현과 류민희의 작당모의를 일찌감치 차단했다.

'열차가 그 꼴로 돌아다니면··· 또 얼마나 난리가 날 거야. 미리 막았으니 다행이지.'

홍소라가 이미 열차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두었다는 것도 모른 채, 유안은 열차의 처음 모습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시범 운행에 누구누구 탑승하실 건가요?"

"일단 류지우 씨가 탈 겁니다."

"유안 씨도 타셔야죠. 사장인데."

"예, 그럴 겁니다."

류지우는 열차를 타고 강남점에 도착하면 유안도 그곳에 함께 머물러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뭐··· 어차피 강남점 지하도 살펴보긴 해야 하니까.'

중앙 카페 공식 메일로 강남점 지하 상가를 채울 점포 신청을 미리 받아두었다.

본점보다 접근성이 좋아서인지 가게를 운영하고 싶다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다.

'지하에서 장사가 잘 된다는 게 앞서 입증되기도 했고.'

중앙 카페 근처의 지하에서 장사를 하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믿음이 강하게 작용한 것 같았다.

같은 돈 내고 창업할 거라면 중앙 카페 근처라는 입지를 놓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새롭게 개인 사업을 하려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업종이 워낙 다양해 신청자를 선별하는 것도 일이었다.

"저희는 본점에 남아 있을게요, 사장님."

"이, 이따 마감하고 꼭 타볼래요···!"

"알겠습니다. 카페 잘 부탁드립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본점을 지킬 직원들이 열차에 오르지 않자 내부는 생각보다 휑하게 느껴졌다.

류지우만 맨 앞자리에 앉아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유안은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류지우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몇 안 되는 승객이 전부 탑승하자 류민희가 열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어떤 버튼을 누르니···.

-크우크우!

중앙이 목소리를 닮은 경적 소리가 났다.

"1호차보다 재밌는 시스템이 많아졌네요."

"······."

경적의 본래 역할은 하지 못했으나 귀여움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출발 직전의 열차에서 자꾸 컁컁거리는 소리가 나니 구경하던 사람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이유안은 주현과 민희가 열차에 어디까지 장난을 쳐 놓은 건지 알고 싶었다.

이러다가는 열차 안에서 이중앙 특별 영상이라도 틀어줄 기세였다.

"이 사장님, 어때요? 저랑 민희가 진짜 밤 새워가며 만들었는데!"

"···좋습니다."

그래도 중앙 카페에 놀러 오는 손님들, 특히 윤슬 또래 아이들은 많이 좋아할 것 같았다.

관광지 명물 느낌으로 화제가 되기에도 적합하기는 했다.

'그래···. 소라 씨도 별말 없었으니 괜찮겠지.'

SNS 담당 직원이 열차를 보고 경악하지 않았으니 나쁘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안은 느리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열차 바깥의 풍경에 집중하며 넘실대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청소도 깨끗하게 잘 되지 않았나요?"

"예, 그렇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저보다는 팀원들이 수고했죠."

"본점에서 회식 한 번 하시죠. 제가 쏘겠습니다."

본점과 강남점 사이의 지하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수리할 곳이 많았다.

그런데 류지우의 팀원들이 선뜻 나서서 정리해준 덕에 열차를 편하게 운행할 수 있게 되었다.

유안은 많은 사람의 도움이 없었으면 완성하기 힘들었을 철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류지우의 팀원들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몇 번이고 대접할 마음이 있었다.

'셀라한테 말해서 류지우 팀원들은 강남점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야겠다.'

어차피 헌터 협회 건물이 들어오면 협회 직원들도 중앙 카페를 많이 이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초반에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두면 미래에 더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올 게 분명했다.

유안은 류지우의 팀원들을 시작으로 협회 직원 전부를 강남점 단골로 만들 계획을 세우며 은근하게 웃었다.

"유안 씨,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음흉한 표정을 지어요."

"제 얼굴 보지 말고 덜 정리된 곳 없는지 확인이나 하시죠."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안 했습니다."

류지우가 자꾸 치근대며 말을 붙이는 것만 빼면 비교적 평화로운 시범 운행이었다.

강해민이 생산 과정을 총괄하여 만들어진 철길에는 어떠한 결함도 없었고, 중간에 거쳐가는 플랫폼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저 역들도 전부 우리가 쓰게 되면 좋을 텐데.'

열차를 몇 대 더 만들고 본점과 강남점 사이의 모든 역을 살린다면 중앙 카페로의 접근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유안은 곧 협회장이 될 류지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류지우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허가 안 내려주면 중앙 카페 출입 금지를 시켜서···.'

이유안은 온갖 사악한 방법까지 동원해 미래의 협회장을 꼬드길 계획을 세웠다.

*

셀라는 너무 오랜만에 온 것 아니냐며 유안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윽···, 셀라! 아파···!"

"미안, 미안~. 힘 조절이 잘 안 됐어."

강남점의 셀라는 유안을 뒤에서 콱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반가움의 표현인 건 알았지만 몸이 온통 짓눌려서 구깃구깃해지는 기분까지 감내할 수는 없었다.

몸을 움직여 털어내려고 할수록 S급 몸뚱어리는 거머리처럼 더 찰싹 달라붙을 뿐이었다.

"숨 막혀 죽겠다···."

"이 정도로는 안 죽어, 유안~!"

아니다.

셀라 정도의 등급에 힘이라면 포옹만으로 간단히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유안은 움직이다가는 더 다칠 것 같아 버둥거리는 것을 멈추고 셀라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유안을 인형처럼 번쩍 들어서 이리저리 끌어안고 흔들다가 양 뺨과 이마에 뽀뽀까지 마친 셀라는 드디어 팔을 풀어주었다.

"유안, 앞으로는 더 자주 와야 해!"

"···알았어."

유안은 셀라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대충 답했다.

분명 일을 하러 온 건데 토템 덕분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 아래층 생기고 나서 손님들이 엄청 좋아해~! 나도 출근할 때 편하고."

두 사람은 지금 강남점과 지하철이 이어지는 통로 구간에 있었다.

열차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 한 번만 타면 바로 중앙 카페 강남점 1층까지 갈 수 있는 구조였다.

열차가 정식으로 오가기 전에도 이미 많은 손님이 지하를 통해 방문하고는 했다.

지하도 정리야 훨씬 이전에 끝나서 미리 개방해 두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상가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비각성자들도 늘어날 거고.'

본점 때와 비슷한 수순을 밞고 있어서 그런지 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훨씬 안정적이었다.

유안이 공사 기간 내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강남점은 이유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알아서 잘 굴러가는 편이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한 잔 하고 가는 건 어때? 베이비 유안 마시라고 논알콜 샴페인 만들어 뒀어~."

"술을 아예 못 마시는 건 아니거든?"

"한 잔만 마셔도 페페론치노 되면서."

"······."

셀라는 반박하지 못하는 유안을 번쩍 들고 술 저장고로 이동했다.

'그래, 내 발로 안 걸으면 편하고 좋지.'

셀라가 자신을 인형처럼 다루는 것에 해탈한 유안은 몸에 힘을 풀고 주변 경치나 구경했다.

날씨 토템이 있는 강남점 근처는 늘 높고 청명한 하늘이라 그림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실제로 기청해도 중앙 카페 강남점을 배경으로 몇 작품이나 완성하기도 했다.

홍소라가 쓴 [던전화] 스킬 덕에 날이 갈수록 울창해지는 숲에서는 청량한 냄새가 난다.

'요양 온 기분이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