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37)

"윤슬."

유안은 1층 홀에서 친구들과 뛰어다니던 윤슬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기감이 좋은 아이는 곧바로 유안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응?"

"친구들 많이 와서 좋아?"

"응! 당연하지!"

"그럼 됐어. 뛰다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알았어!"

천방지축으로 일을 크게 벌린 아이를 혼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윤슬이 여태 누리지 못한 것들을 몰아서 즐긴다고 생각하면 이 정도 규모의 파티는 약과이기도 했다.

'생일 파티 할 때는 성이라도 하나 지어줘야 하나.'

유안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장내를 정리하고 돌아다녔다.

1층에는 자연스럽게 윤슬과 어린이 친구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자리했고 2층에는 중앙 카페의 단골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오자 시끌벅적한 아래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어어, 사장님~! 이쪽, 이쪽!"

김주현과 대화를 나누던 류민희가 손을 흔들었다.

류지우와 강해민도 바로 옆 테이블에서 일 얘기를 한창 나누고 있었다.

"오늘 소랑 달팽이 좀 잡았다면서요!"

민희가 쾌활하게 웃으며 유안을 제 쪽으로 팍 잡아당겼다.

순순히 그 옆자리에 앉은 이유안은 오늘의 메뉴를 간단히 소개했다.

"스테이크 타르타르는 육회 비슷한 요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 신기하다. 프랑스 놈들이 그런 걸 먹는단 말야?"

류민희는 김주현이 헌터 디바이스에 띄워준 이미지 자료를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보니까 소주 땡긴다."

"···소주 말고 맥주나 와인은 있습니다."

"이 사장님, 섞어 마셔본 적 있어요?"

"없습니다."

"궁금한데 맥와~ 와맥?"

류민희는 어디서도 팔지 않을 것 같은 폭탄주를 만들 생각부터 했다.

그 곁에 있다가는 덩달아 취하게 될 것 같아서, 유안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마침 옆 테이블의 해민과 지우가 일 얘기를 끝내고 일상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오늘 해민이한테 점수 제대로 딴다.'

식사도 일부러 강해민이 좋아하는 요리들로만 준비했다.

중앙 카페에서 만든 것은 주는 대로 잘 먹는 해민이지만, 원래는 프랑스 요리를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만찬은 철저히 강해민의 호감도를 공략하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해민아."

"어, 왜."

"협회 건물 짓는 건 언제쯤 끝나?"

"올해 안에는 끝나."

"···뭐? 그게 그렇게··· 오래 걸려?"

달콤한 말로 강해민을 살살 꼬셔 다음 건설 계약을 따내려던 유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테이블 위에 달걀 노른자가 올라간 스테이크 타르타르가 등장했지만 이유안은 그것에 집중할 수 없었다.

"협회장님이 기간을 워낙 넉넉하게 잘 주셔서."

강해민이 은근하게 웃으며 스테이크 달걀 노른자의 반을 갈랐다.

끈적끈적한 노른자가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려 다진 소고기를 촉촉하게 적신다.

해민은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스테이크 타르타르를 한 입 맛봤다.

'음식은 진짜 맛있네.'

사실 협회 건물은 단순한 형태로 지으면 되니 한 달도 걸리지 않을 작업이었지만, 류지우와 작당하여 유안을 놀릴 생각으로 기간을 길게 잡은 척했다.

해민은 멍한 표정이 된 유안을 바라보며 와인까지 가볍게 곁들였다.

이유안과 함께 있으면 늘 당황하는 쪽은 자신이었는데, 이렇게 상황이 역전된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유안, 너는 얼른 이거 먹어. 평소에 채소도 잘 안 먹잖아."

해민은 유안 쪽으로 제 몫의 라따뚜이까지 밀어주었다.

침울한 표정으로 주키니 호박을 보던 유안이 포크로 호박에 구멍을 숭숭 냈다.

"그거 다 먹으면 너랑 다시 일하는 것도 뭐··· 고려는 해 본다."

"진짜? 정말이지?"

마음속에 천둥번개가 치다가 간신히 비 피할 곳을 만난 기분이었다.

유안은 냉큼 전투적으로 수저를 놀리기 시작했다.

"오, 이 사장님 오늘 열심히 드시네요."

맥주와 와인을 섞어 마시다가 벌써 알딸딸해진 류민희가 끼어들었다.

"제 것도 많~이 드세요!"

상황이 재미있게 흘러간다는 걸 눈치 챈 민희는 자신의 라따뚜이 접시도 유안에게 내밀었다.

김주현도 킥킥대다가 라따뚜이 기부 행렬에 동참했다.

"······."

유안이 접시 하나를 겨우 비우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2층 단골 손님들의 모든 라따뚜이 접시가 유안 앞에 모여 있었다.

중앙 카페와 친구들

1층에서 친구들과 놀던 윤슬이 바람처럼 나타나서 라따뚜이 지옥에 빠진 유안을 구해주었다.

접시 몇 개는 은근슬쩍 기청해나 류지우, 그리고 뒤늦게 등장한 차건오에게 밀어주기도 했다.

해민은 대놓고 반칙하는 유안을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보았으나 크게 뭐라고 하지는 않고 넘어갔다.

이유안이 1인 분 이상의 채소를 먹은 게 확실해졌을 때 강해민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만큼 했으면 됐다. 다음에 뭐 짓고 싶어서 이러는 건데? 본점 지하실?"

유안은 몇 번이나 본점에도 지하실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 해민은 당연히 그것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 이유안은 고개를 살살 저으며 예상 외의 대답을 했다.

"협회랑 한 번 일 시작하면, 계속 그쪽이랑만 일할 거잖아."

"···누가 그런대."

"류지우 씨한테 빼앗길 수는 없지."

"저는 빼앗아 갈 생각도 없었는데요, 유안 씨."

윤슬을 위해 키쉬를 조각내던 류지우가 갑자기 트집을 잡히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유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협회에서 공무원처럼 시간 지켜가며 일하다 보면··· 나중에는 주말 특근 같은 것도 안 하려고 할 거 아냐!'

이유안은 미래의 강해민이 계속 일 중독자이기를 바랐다.

해민은 일할 때 가장 멋지고 자랑스러운 친구이다.

"어쨌든 협회에 뺏기기 싫어. 해민이 넌 평생 나랑 같이 일해."

"······무슨 억지를."

강해민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반응하며 유안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내가 앞으로는 진짜 잘해줄게."

"······."

"정말로, 응?"

"···아, 알았으니까 그만 해."

유안의 고백 아닌 고백에 2층 전체가 조용해진 상태였다.

모든 단골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낀 해민은 결국 얼굴을 불긋하게 물들이며 상황을 종결시켰다.

"그럼 협회 건물 다 짓고 바로 나한테 와야 돼."

"···알았다고."

이유안은 강해민에게 확답을 받아낸 후에 활짝 웃는 얼굴로 류지우에게서 키쉬 한 조각을 훔쳐왔다.

눈 뜨고 키쉬를 베인 지우는 가볍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잘 풀려서 다행이다. 지하실 다음에는 해민이한테 뭐 시키지?'

유안은 짭짤한 키쉬를 입에 넣으며 다시금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며칠간 걱정하던 강해민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머리가 가볍고 상쾌해진 기분이 들었다.

'일단은 본점이랑 강남점을 이어놓고··· 지상으로도 건물을 몇 채 더 올리고 싶은데. 아파트 같은 주거공간도 괜찮겠다. 자주 이용하는 던전 게이트 근처에 집을 짓고 싶어하는 헌터야 많으니까. 이 기회에 사업을 아예 부동산 쪽으로도 확장해 봐? 간단한 건물 짓는 건 얼마 안 걸릴 테니까 한 달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니티움 길드 있으니까 자재 부족할 일도 없고.'

유안은 강해민이 듣는다면 기겁할 내용의 계획을 술술 풀어나가며 류지우에게서 키쉬 한 조각을 더 빼앗았다.

역시 홍소라가 만든 디저트는 믿고 먹을 수 있었다.

*

미술관 인테리어가 다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윤슬은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뛰쳐나가려 했다.

"윤슬, 신발."

유안이 망아지 같은 어린이를 가까스로 붙잡아 작은 발 두 개에 하얀 운동화를 신겼다.

"빨리, 빨리, 아저씨! 얼른 교실 보고 싶어!"

"그래도 뛰다 넘어지면 다쳐."

"으응, 안 뛸게···."

사실 다치는 건 윤슬이 아닌 땅바닥일 확률이 높았지만, 아이는 유안의 걱정에 순응하며 얌전히 손을 잡았다.

아저씨의 손을 잡고 미술관 건물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중에도 윤슬은 몇 번이나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몸의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발산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달려가면 훨씬 빨리 갈 수 있는데··· 그럼 아저씨가 속상한 표정 짓겠지?'

윤슬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저씨가 슬프지 않기를 바랐다.

평소에는 표정이 단조로운 편인 유안이지만 윤슬이 조금만 다치거나 넘어지면 슬픈 감정이 얼굴 위로 짙게 떠오르고는 했다.

'아저씨가 안 그래 보여도 유리 멘탈? 이라고 했으니까! 말 잘 들어야지.'

윤슬은 홍소라가 했던 말도 떠올리며 유안의 손을 꼬옥 잡았다.

힘을 많이 주면 으스러뜨릴 수도 있는 손이니 너무 세게 붙잡지는 않았다.

여유롭게 걷다 보니 어느새 미술관 건물이 코앞에 있었다.

개관 전의 미술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내부 인테리어를 하며 기청해의 작품 몇 점을 걸어놓아 완전히 휑한 느낌은 아니었다.

"미술 선생님 그림 진짜 잘 그린다!"

몇몇 작품은 미술 수업 시간에 시범을 보여주며 그린 것이었고, 나머지 것들은 기청해가 유안의 부탁으로 따로 그려왔다.

비조 길드 건물에서 그림을 많이 그렸는지 대부분이 제주 바다를 담은 풍경화였다.

당장이라도 바닷소리가 들릴 것처럼 뛰어난 묘사의 유화를 감상하다 보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잘··· 그리긴 하네.'

기청해는 손으로 하는 것 중 못하는 게 없는 편이었다.

요리와 제작, 예술 쪽은 물론이고 지난번에는 중앙 열차 수리까지 도와주고 갔다.

류민희는 기청해의 손놀림을 보더니 보통 실력은 아니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성격도 잘 좀 고쳐보지.'

다른 쪽으로 능력치를 찍느라 그쪽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나 보다.

유안은 기청해의 작품이 가득한 미술관에서 그림 주인에 대한 생각을 계속 이어가며 걸었다.

"아저씨! 여기 내가 그린 것도 있어!"

윤슬은 1층 한가운데에 있는 자신의 그림을 발견하고 반가운 티를 냈다.

제 몸보다 몇 배는 큰 캔버스에 기청해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그림은 유안의 초상화였다.

어린이의 그림 실력이 쑥쑥 성장하고는 있지만, 그림을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아볼 수준은 아니라서 유안은 그림 제목이 '아저씨!'인 것을 보고 겨우 초상화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걸 유추해냈다.

"잘 그렸네, 윤슬."

"그치이! 우리 방에 걸어놓을 것도 그려볼까?"

"그래, 같이 그리자."

"좋아! 근데 아저씨는··· 많이 안 도와줘도 돼."

유안의 그림 실력을 떠올린 윤슬은 작품 활동에서 빠지라는 말을 우물쭈물 에둘러 표현했다.

어린이의 말 속뜻을 바로 파악한 유안은 윤슬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아파아···."

"윤슬, 내 손이 더 아파."

"그러니까 놔 줘!"

유안은 짹짹거리는 윤슬의 양쪽 뺨을 꾹 눌러서 붕어처럼 만들어 본 후에 놓아주었다.

"이제 교실로 올라가 볼까?"

"응!"

다른 층은 아직 비어 있었다.

던전 게이트 근처의 미술관이다 보니 던전 부산물만 활용해 창작한 작품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괜찮은 작품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나마 김주현 씨가 연락하고 지내는 미술 동호회가 있어서 다행이지.'

주현에게 던전 부산물로 만든 화구를 잔뜩 주문했던 동호회에서 수준 높은 작품 몇 점을 보내주기로 했다.

던전 내부 풍경을 그린 작품들이니 미술관이 아니라 던전 박물관에 전시해도 괜찮을 것이다.

중앙 카페 직원들은 요즘 주변 인맥을 총동원해 훌륭한 작가 찾기에 여력을 다하고 있었다.

'태영 씨가 방송에서 한 번 언급해 준다고도 했고··· 다 채우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유안은 미래에 작가와 작품들이 많아지면 시즌별로 특별 전시회도 열 생각을 하며 미술관 최상층에 도착했다.

아래층들과 다르게 여러 개의 벽으로 나뉘어진 공간은 딱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남달랐다.

'진짜 초등학교처럼 인테리어 해 놨잖아.'

인테리어는 류민희의 친구 중 한 명에게 맡겼는데, 학교 건물 인테리어만 십 년을 했다는 사람답게 그 센스가 엄청났다.

"우아··· 여기 진짜 학교 같아!"

복도에 깔린 바닥재가 연한 갈색이라 나무 바닥처럼 따뜻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하얀색 천장 타일에는 희미한 물결 무늬가 보였다.

"교실 이름도 붙어 있어!"

미술실, 음악실, 체육실 등의 팻말을 가리키며 윤슬이 복도를 쌩쌩 뛰어다녔다.

뛰지 말라는 얘기는 금세 까먹은 것 같았다.

유안은 윤슬의 어깨를 붙잡아 멈추게 한 뒤 학교에서 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려주었다.

"복도에서 뛰면 벌점 받아, 윤슬."

"···벌점?"

"응. 벌점 많이 쌓이면 화장실 청소 해야 돼."

"······진짜?"

요즘도 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안은 대충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며 복도 끝의 화장실을 가리켰다.

벌점 얘기에 겁을 먹은 아이는 순한 양이 되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순진한 윤슬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유안이 미술실로 어린이를 이끌었다.

미술실의 절반은 일반 교실과 같은 형태였고, 나머지 절반에는 캔버스를 놓을 수 있는 이젤이 둥근 원을 그리며 놓여 있었다.

가운데 모델을 세우면 딱일 것 같은 구도였다.

"칠판 짱 크다!"

윤슬은 교실 뒤쪽보다는 앞쪽에 더 관심이 많았다.

초록색 칠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는 두리번대며 분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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