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37)

"네, 사장님."

정원은 윤슬을 가뿐히 안고 1층까지 내려갔다.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아이를 맡긴 이유안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유안의 등에 가까이 붙어 서 있던 기청해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오늘은 또 왜 오신 겁니까. 일요일도 아닌데."

"이유안 사장이 제주까지 오기를 기다리다간 망부석이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비조 길드장님이 저를 왜 기다립니까."

"나한테 궁금한 게 있지 않았어?"

"아무것도 안 궁금···."

기청해의 말에 반사적으로 부정하려던 유안은 입술을 멈추었다.

'죽음의 냄새 어쩌고 하던 그걸 말하는 건가.'

비조 길드장의 께름칙한 단어 선정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강남점 오픈을 비롯해 셀라 영입, 거기에 박물관과 미술관 일까지 겹치면서 바빠지자 자연스럽게 기억 저편으로 묻어두게 되었다.

'당장 죽는다고 한 것도 아니니까, 뭐.'

회귀 시점이 되기 전에만 해결하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때 쓰러진 것도 트라우마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멀쩡해졌고.'

건강 검진을 주기적으로 받고 있지만 문제가 발견된 적도 없었다.

항상 운동을 더 열심히 하라는 진단만 받았을 뿐이다.

"기청해 씨가 한 말이 그다지 믿기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그거였다.

의사도 아닌 일개 길드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었다.

유안이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자, 청해는 어울리지 않게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거야?"

"항상 이상한 말만 하시는데 믿고 싶겠습니까. 그리고 제 몸에는 이상 없습니다. 자꾸 죽는다 어쩐다 말해봤자 못 믿을 수밖에 없죠."

"이유안 사장이 까칠하게 나올 건 예상한 일이었어. 그래도 막상 이렇게 무시당하니 상처야."

"제가 까칠한 게 아니라 그쪽이 이상한 겁니다. 어차피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을 거라면··· 됐습니다. 이 주제로 비조 길드장님이랑 더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안이 단호하게 선을 긋자 기청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연기 잘 하네. 배우나 하시지, 왜 길드장을 해서는.'

속상한 표정의 사람을 앞에 두자 쿡쿡 찔려오는 심장을 애써 무시했다.

유안은 아예 기청해를 지나쳐 갈 생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어."

"···예?"

그때 기청해의 목소리가 유안을 붙잡았다.

더 좋은 소식

이유안은 청해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오래 뜸을 들이지 않고 원하던 말이 나왔다.

"이유안 사장이 내 선물을 잘 가지고 놀았나 봐. 약간이지만, 냄새가 옅어지고 있거든."

기청해는 아주 신난 사람처럼 노래하듯 이야기했다.

그 태도에 유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한테 뭘 하신 겁니까?"

"나쁜 거 아냐. 미술관이 완공되면 하루에 한 번은 꼭 찾아가서 작품을 둘러보도록 해. 좋은 그림을 보면 좋은 기운이 전해지니까."

묻는 말에는 정확히 답하지 않고, 비조 길드장은 늘 그렇듯 알쏭달쏭 수수께기 같은 말만 남겼다.

불길해진 유안은 그간 청해에게 받은 선물들을 인벤토리에서 죄다 꺼냈다.

이것저것 받은 게 많아서 3층 복도에 온통 선물이 쏟아졌다.

"좀 더 부드럽게 다뤄줬으면 좋겠어."

유안은 청해의 가식적인 목소리를 무시하고 선물들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나 별다른 특이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인형이나 로봇 같은 장난감 위주였기에 문제가 발견되는 것도 이상했다.

"이건 오늘 주려고 했던 선물."

비조 길드장이 스르륵 다가와 장난감 무더기 위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뻐끔거리며 기포를 내뱉는 물고기 모형이었다.

"재미있게 가지고 놀아. 고장나면 날 부르고."

"뭡니까, 대체."

"선물이라니까. 이유안 사장을 향한 내 마음이라고 해 두자."

기청해가 말끝에 눈웃음을 곁들였다.

심각한 유안과 다르게 가볍기만 한 태도였다.

그런 얼굴을 계속 마주하자 이유안도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래··· 이 인간이 제대로 말해줄 리가 없지.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는 건 아닌지 주현 씨한테 물어봐야겠다.'

유안은 장난감들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기청해에게서 진실을 듣는 것은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자 마음이 오히려 편해진다.

"밑에 내려가서 아침 식사나 하세요."

"이유안 사장이 먼저 비밀을 말해주면 내 비밀도 말해줄 수 있어."

기청해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유안의 속을 박박 긁었다.

'우리가 무슨 비밀 친구야? 뭘 자꾸 비밀 타령이야.'

유안은 궁금하지 않은 기청해의 비밀을 미리 차단해버리고 고개를 휙 돌렸다.

"나한테 궁금한 게 많을 텐데."

"그런 거 없다고 했습니다."

"선물을 그렇게나 가져다 줬는데,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냐?"

"다시 가져가시든가요."

"그건 싫어."

솔직히 말해서 윤슬이 떼를 쓸 때보다 훨씬 비위를 맞추기 어려웠다.

'열 살짜리 애랑 다 큰 성인을 비교하게 될 줄은 몰랐지.'

기청해와 대화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던 유안은 1층 홀에 도착하자마자 방재이가 있는 쪽으로 갔다.

커다란 덩치 옆에 있으면 든든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재이는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드물어 조용한 평화를 즐길 수 있었다.

"재이 씨, 식사는 벌써 다 하셨습니까?"

"···예."

"뭐 만들고 있었어요? 아, 이거 신메뉴죠?"

"······타임 리프 티입니다."

초록 풀잎이 동동 띄워진 차에서는 아침 공기의 냄새가 났다.

이름에 말장난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범인을 바로 특정할 수 있었다.

"소라 씨가 이름을 지었나 봅니다."

"좋은 생각이 났다고 하셔서······ 싫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홍소라 씨도 정말 즐거워 보이셨고···."

순진하고 착한 방재이는 신메뉴 이름 짓기 권한을 홍소라에게 족족 빼앗기고 있었다.

덕분에 소라의 직업 만족도만 쑥쑥 높아지는 요즘이었다.

"마셔보고 싶습니다."

"···이거 사장님 드리려고 만든 겁니다."

유안이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차를 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방재이는 유안에게 타임 리프 티와 바람떡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홍소라 씨가 밀 디저트는 정복했나 봅니다."

"······지금도 떡 만들러 가셨습니다."

어쩐지 1층 진열대에 떡 케이크가 있었다.

밀가루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다 만들어 본 소라가 쌀가루로 시선을 돌린 탓이었다.

'이러다 카페 옆에 방앗간 차리는 거 아닌가 몰라.'

그래도 메뉴가 다양해지는 것은 좋았고, 직원들이 그것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괜찮았다.

유안은 쫄깃쫄깃한 바람떡을 입에 넣고 씹으며 혀에 스미는 단맛을 즐겼다.

가벼운 아침 식사 대용으로는 제격인 메뉴였다.

떡 몇 개를 집어먹고 얼추 배가 찬 유안은 꺄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았다.

서정원에게 붙어 있던 윤슬이 이제는 기청해와 딱 붙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기청해는 S급 헌터라 윤슬이 힘을 조절하지 않고 덤벼도 다 받아주는 편이었다.

"미술 선생님도 나랑 같이 던전 가자!"

비조 길드장의 몸을 등반하던 윤슬이 던전 데이트 신청을 했다.

'수창 길드장이 빠졌으니까 S급 헌터가 하나쯤 더 있는 게 좋기는 하지.'

윤슬을 데리고 자꾸 위험한 던전에 들어갔던 수창 길드장에게는 중앙 카페 사장 권한으로 근신 처분을 내렸다.

그래서 수창 길드장은 중앙 카페에 사적으로 들르거나 윤슬을 따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면 그때 다시 방문을 허락할 생각이었다.

"그건 안 돼."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기청해가 이윤슬의 데이트 신청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다.

제각기 할 일을 하던 중앙 카페 사람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비조 길드장을 보았다.

"던전은 혼자 공략하는 게 편해서 말이야."

"···으응, 그렇구나."

"윤슬이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냐."

청해가 시무룩해진 윤슬을 살살 달랬다.

어린이는 금세 기분을 풀었으나 유안은 아니었다.

'자기가 뭔데!'

윤슬의 부탁을 거절한 비조 길드장이 정말이지 괘씸하게 보였다.

이유안은 마음속 데스노트 첫 줄에 기청해 이름 석 자를 올렸다.

*

미술관 공사와 강남점 지하 공사는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하실과 지하도를 연결하는 것이 워낙 까다로운 일이라 다른 건축을 할 때보다 작업 시간이 몇 배로 늘어났다.

그래도 오늘은 해민이 먼저 유안에게 연락해 지하실 작업의 진전을 알렸다.

"미술관이랑 비슷하게 끝날 것 같다."

강해민을 따라 작업 중인 지하실에 들어온 유안은 상상 이상의 공간 활용도에 놀랐다.

'역시 해민이한테는 개떡같이 의뢰해도 찰떡같이 작업해 주는구나. 최고다.'

강남점 건물은 지하철과 완벽하게 이어진 덕에 접근성이 훨씬 좋아졌다.

지하 열차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만 타면 바로 강남점에 진입할 수 있는 구조였다.

"본점이랑 강남점 지하도 연결하는 건 류지우 파트장이 도와주고 있어서 금방 끝날 거야."

류지우는 협회 정리로 바쁜 와중에도 지하도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지하 헌터, 혹은 그들의 유품이라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지우를 따르는 협회 직원들도 지하도 정리에 가담했기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강해민도 류지우 덕분에 한시름 놓은 부분이 있었다.

파트장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유안이 제시한 기간 내에 공사를 절대 끝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는 이유안이 겉으로 드러나는 작업 속도만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살갑게 웃으며 슬며시 해민 옆으로 다가갔다.

"그럼 해민아, 이번 일 끝나면···."

"다음 의뢰는 너한테 안 받는다고 했지."

"···그거 진심이었어?"

"어."

최대한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는데도 거절당하고 만 유안은 눈을 크게 떴다.

'해민이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강남점 말고 본점에도 지하실을 만들어달라고 조르려던 것은 구상 단계에서부터 막혀버렸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차단당한 유안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해민아··· 이번에는 시간 넉넉하게 줄 테니까, 그러지 말고···."

"안 받아."

"······."

"···해민아, 혹시 삐쳤어?"

"어. 당분간 안 풀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라. 난 일하러 간다."

평소라면 창피해하며 아니라고 대답할 질문에도 강해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유안을 지하에 혼자 두고 떠나버렸다.

믿었던 친구의 파업 선언에 이유안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와··· 어떡하지······?"

넋이 나간 유안은 해강특수건설 말고 다른 업체를 떠올려 보았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역시 해강을 따라갈 특수건설 업체는 없다.

강해민의 화를 풀어줄 방법을 열심히 고민하던 이유안의 앞에 류지우가 나타났다.

"아직 완공도 안 된 곳에서 뭐 하고 계십니까?"

"아··· 파트장님."

"···무슨 일 있었어요?"

"혹시 해민이가 요즘··· 많이 피곤해 했습니까?"

"강해민 씨요? 그분은 늘 피곤해 하시는데요. 아···, 요 며칠 더 심하긴 했습니다. 잠도 거의 못 자는 것 같았는데··· 우리 같은 각성자도 아니니까 몸에 쌓인 피로도가 상당할 겁니다."

강해민이 일하는 모습을 옆에서 많이 지켜보게 된 류지우가 해민의 현재 상태를 조목조목 읊어주었다.

류지우의 말이 길어질수록 유안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해민이 화 어떻게 풀어주지!'

이유안의 머릿속에 중앙 카페 개업 이래 가장 긴박한 비상이 걸렸다.

*

알고 보니 류지우는 할 말이 있어서 유안을 찾아온 것이었다.

강해민의 일로 몸과 마음이 흐물흐물해진 유안은 파트장의 뒤를 따라 강남점 4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를 지나 던전 관리 파트 임시 사무실에 들어가자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벽과 벽 사이에는 가랜드가 매달려 있었고, 협회 직원들은 전부 고깔 모자를 썼다.

그리고 바닥 곳곳에는 종이 폭죽의 흔적이 보였다.

'뭐야··· 파티라도 했나···?'

직원 중 한 명이 생일을 맞은 것이라 짐작한 유안은 류지우와 함께 파트장실까지 쭉쭉 들어갔다.

그런데 파트장실의 목재 데스크 위에 커다란 케이크가 있었다.

"···파트장님, 생일이십니까?"

"아뇨, 생일은 아니고."

"그럼 뭐··· 입사 기념일?"

"그런 걸 어느 직장인이 기념합니까."

하긴.

유안은 빠르게 수긍하며 류지우 파트장이 겪을 만한 기념일의 종류를 생각해 보았다.

목록 최상단에 두 글자가 떠올랐다.

"결혼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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