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우가 메일 내용을 함께 확인하고 깔끔하게 판단했다.
헌터 협회 파트장의 평가를 듣자 잠시 복잡하게 엉켜 있던 머리가 정돈되는 것 같았다.
"지하 상가에 가족 단위로 찾아오는 비각성자들은 종종 있었습니다."
중앙 카페 근처의 안전성이 여러 차례 증명된 덕분이었다.
장다온의 레스토랑은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니 생일 같은 기념일에 축하 파티를 하러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던전 게이트 근처에서 안전하게, 기억에 남을 생일 파티를 진행하고 싶어하는 비각성자가 꽤 있었다.
"이 초등학교라면 중앙 던전이 터졌을 때 피해를 입을 뻔한 곳이네요. 그 후로 던전 안전 교육에 관심을 많이 쏟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그래서 박물관 단체 관람 신청을 한 거군요···."
"박물관이면 현장 체험 학습으로는 적합한 장소이기는 하죠. 교육적이고."
많은 아이들이 헌터의 꿈을 꾸는 시대이다.
그런데 던전에 대한 정보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안전 교육을 받을 환경은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 성인이 되자마자 각성한 헌터들의 안전 사고 비율도 점점 높아지고 있지.'
던전 게이트 참사를 생생하게 겪은 세대와는 달랐다.
던전 파밍과 공략을 두둑한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초보 헌터가 많아지는 건 헌터 협회에서도 눈여겨보던 사회 문제였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걸음에 던전 박물관이 함께하게 된 것이다.
'좋은데?'
곰곰이 생각하던 유안은 초등학교에서 온 메일에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아이들이 체험 학습을 오기 전에 박물관의 던전 안전 교육 과정이나 기념품 샵을 재정비할 계획을 세웠다.
다른 효과도 좋기야 했지만, 유안이 가장 긍정적으로 생각한 부분은 바로···.
"친구들 많이 놀러 오는 거야?"
윤슬이 진짜 또래 친구를 사귀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윤슬을 아끼는 어른들과 잘 지내는 것도 좋기는 했지만, 한창 또래 아이들과 뛰놀 나이에 당연한 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 늘 유안의 마음에 짐으로 남아 있었다.
드디어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응, 윤슬이랑 나이 똑같은 애들이 잔뜩 올 거야."
"···그럼 나랑 친구 해 준대?"
"그럼."
유안은 물론이고 주변 어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의 얼굴이 점차 환하게 밝아졌다.
던전 체험 학습을 처음 갔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설레는 감정이 이윤슬의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만들었다.
박물관 견학
새벽 6시였다.
"아저씨, 일어나! 아침이잖아!"
"응···?"
창밖에 어슴푸레 새벽해가 올라올 기미를 보이기는 했으나 아침은 아니었다.
그런데 윤슬은 이미 반짝거리는 눈으로 유안을 바라보며 침대 위에서 콩콩 뛰었다.
"더 자, 윤슬······."
"안 돼, 아저씨! 오늘 친구들 오기로 했으니까 빨리 준비해야지."
"걔들 오려면 멀었어. 더 자자."
"아냐! 다섯 시간밖에 안 남았잖아!"
윤슬이 자신의 디바이스 화면에 현재 시각을 띄워 보여주며 말했다.
이유안은 어둑한 침실에 퍼지는 액정 빛이 너무 밝게 느껴져서 눈을 찡그렸다.
"얼른 준비하자!"
"그래, 그래."
잠이 덜 깬 유안은 대충 대답하며 어린이를 품에 당겨 안았다.
"아저씨이···!"
"친구들 만나서 더 신나게 놀려면 푹 자야지, 윤슬."
"···그런 거야?"
"응. 친구들도 아직 꿈나라에 있대. 꿈에서 만나려면 윤슬이도 지금 자고 있어야 돼."
유안은 잠기운이 가득한 상태로도 최대한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아이를 설득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꿈과 희망이 가득한 어린이는 그 말을 순수하게 믿어주었다.
"꿈나라에서 친구들 만날 수 있구나···!"
"그렇다니까. 빨리 다시 자자."
"응!"
또래 아이들이 박물관에 견학 온다는 사실에 설레서 일찍 깨기는 했지만, 원래 윤슬이 일어나던 시간보다는 많이 이르다.
유안이 아이의 작은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금세 다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덩달아 눈을 다시 붙였던 이유안은 중앙 카페 오픈 시간에 맞춰 일어나고 말았다.
평소라면 두 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일어나는데 중간에 한 번 깨어서 수면 패턴이 어긋난 탓이었다.
"망아지."
유안은 곤히 잠든 윤슬의 볼을 쿡 찔렀다.
그리고 팔베개를 해주느라 저릿해진 팔을 슬슬 빼내고 아이의 품에 곰인형을 대신 안겨 주었다.
"우응···."
윤슬이 살짝 뒤척이기는 했으나 완전히 깨우지 않고 침대에서 빠져 나오는 건 성공이었다.
다른 방 욕실에서 씻고 나온 유안은 이미 영업을 시작한 1층으로 내려갔다.
'오늘도 장사 잘 되네.'
바쁘게 움직이던 알바생들이 사장을 보고 가볍게 인사했다.
"사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좀 늦게 내려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사장님이랑 윤슬이 아침은 주방 냉장고에 넣어놨어요!"
유안도 직원들에게 마주 인사하고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쿠키 커터를 손에 든 홍소라가 이유안을 보고 히죽 웃었다.
"과, 관장님 오셨네요···."
"채소 쿠키입니까?"
소라에게 놀림받는 데 익숙해진 유안은 킥킥거리는 웃음을 가볍게 무시하고 쿠키 반죽에만 집중했다.
다진 채소와 약간의 치즈 가루가 들어간 반죽 색이 고왔다.
"애, 애들 많이 온다고 해서··· 선물용으로 포장해 두려고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박물관 견학 일은 카페 정식 업무도 아닌데 선뜻 나서주는 홍소라에게 고마웠다.
소라뿐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그랬다.
유안이 먼저 부탁하지 않았는데 방재이는 아이들에게 나눠줄 주스를 만들었고, 서정원은 초콜릿을 대량으로 건조시켰다.
'주현 씨도 기청해··· 랑 같이 인형 눈 열심히 붙였다고 했지.'
던전 박물관 견학 기념으로 고래 인형을 준비한 두 사람은 날을 꼬박 새웠다고 한다.
등급의 차이로 기청해는 멀쩡하고 김주현은 죽어가는 모습을 유안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었다.
'견학 준비는 충분히 된 것 같고··· 이제 윤슬이나 깨워 볼까.'
유안은 주방 냉장고에서 아침을 챙겨 올라갔다.
천사처럼 자던 아이는 유안이 가볍게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눈을 번쩍 떴다.
평소에는 몇 번씩 깨워야 일어나던 아이가 너무 잘 일어나자 이유안은 무척 당황했다.
"윤슬··· 오늘 진짜 잘 일어나네?"
"친구들 왔어? 친구들한테 가야 돼!"
"아직 안 왔어. 일단 밥 먹고, 천천히."
총알처럼 침대 위를 벗어나려고 하는 아이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유안은 베드 테이블을 펼치고 윤슬이 밥을 꼭꼭 씹어먹도록 지도했다.
친구들 만날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는지 음식을 손으로 먹던 예전 습관이 나오려고 해서 결국 이유안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먹여주었다.
'오늘따라 육아 난도가 최상이네···.'
아침을 먹을 때도, 욕실에서 씻을 때도 윤슬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설렘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러는 것이었으니 혼낼 수도 없었다.
"어떤 옷 입고 싶어?"
깨끗하고 보송보송해진 윤슬은 제 옷장을 활짝 열고 고민에 빠졌다.
친한 어른들이 자꾸 옷 선물을 해 주는 바람에 윤슬의 옷은 유안의 것보다 훨씬 많았다.
아이가 빠르게 자라다 보니 한 번 입고 작아져서 못 입게 된 옷들도 수두룩했다.
"못 고르겠어···. 아저씨가 골라 줘!"
한참 고민하던 윤슬은 유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유안도 패션에 문외한이긴 마찬가지였다.
'윤슬이는 뭘 입어도 귀여운데··· 어떻게 고르지?'
어느새 팔불출 아빠 마인드가 된 유안은 심오한 표정으로 옷장 속을 살폈다.
일단 휴멜 대표 디자이너에게 맞춤복으로 선물받은 옷 중에서 고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유안은 가장 먼저 손에 잡힌 상의와 하의를 꺼냈다.
어차피 모델이 완벽하니 아무 옷이나 입혀도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며 윤슬에게 색이 맞지 않는 옷을 입혔다.
'음··· 귀여운데?'
객관성을 잃은 눈으로 아이의 옷매무새를 정돈해준 이유안은 그 상태로 윤슬을 데리고 1층까지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2층에서 서빙하던 서정원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위로 다시 올라가요, 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일단 같이 가요. 윤슬이도 이리 오세요."
정원은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꾸며진 어린이를 번쩍 안고 다시 옷장 앞으로 갔다.
윤슬은 서정원이 골라준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유안의 앞에 섰다.
'뭐야, 아까랑 똑같이 귀엽잖아. 무슨 차이지?'
유안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정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
11시가 가까워지자 윤슬은 지하철 입구 앞을 뱅글뱅글 돌았다.
"심장이 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아!"
"시, 심장은 그렇게 쉽게 안 터져···."
"선생님은 터질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 그럼 강해민 선생님한테 심장 터지는 거 본 적 있냐고···."
"애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소라 씨."
홍소라가 열 살짜리 애보다 더 유치하게 굴려고 하자 서정원이 부드럽게 말렸다.
중앙 카페 직원들도 던전 박물관의 첫 견학 일정을 돕기 위해 나와 있었다.
유안은 중앙 열차를 타고 도착할 초등학생들을 기다리며 알게 모르게 긴장했다.
윤슬처럼 심장이 터질 만큼 두근거리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린이들에게 게이트 근처의 건물들을 소개할 생각에 약간은 떨렸다.
무엇보다 안전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니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사장님."
방재이가 유안에게 뜨끈한 버터 핫 초콜릿을 내밀었다.
어설프지만 진심이 담긴 응원에 유안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단 음료를 입에 넣으니 몸이 따뜻해지면서 기분이 나아진다.
잠시 더 기다리자 아래쪽에서부터 재잘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친구들 왔나 봐!"
윤슬이 발갛게 상기한 얼굴로 가장 먼저 반응했다.
우다다 뛰어 내려가려는 것을 유안이 겨우 붙잡았다.
"여기서 기다리자, 윤슬. 조금만 있으면 친구들이 올라올 거야."
"만나면 뭐라고 인사해?"
"그냥 안녕 하면 되지."
"내 이름도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저씨 이름이랑!"
"···윤슬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아이는 처음 만나는 또래들 앞에서 자기소개라도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유안은 윤슬이 그냥 자유롭게 행동하게 두기로 했다.
열 살 평생 자신과 같은 어린이를 본 적이 없으니 대하는 방식이 어설픈 건 당연했다.
점차 익숙해지면 된다.
"아아, 박물관 던전 관장님 맞으시죠? 중앙 카페 사장님이기도 하신."
인솔 교사가 기다란 줄의 선두에 선 채 유안에게 악수를 건넸다.
"이유안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요. 애들도 놀이공원 가는 것 같다고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열차 덕분에 편하게 잘 왔어요."
교사가 말하자 키 순서로 서 있던 아이들이 짹짹거리며 한 마디씩 보탰다.
"맞아요! 근데 사자 맞죠?"
"아냐, 호랑이야."
"바보야, 고양이거든?"
"너희 너구리 뭔지 모르지? 너구리야!"
열차에 달린 중앙이 얼굴을 가지고 열띤 토론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방금까지는 방방 뛰어다니던 윤슬은 어느새 유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친구들에게 낯을 가렸다.
이미 친해 보이는 무리에 좀처럼 끼어들기 어려운 탓이었다.
"윤슬, 중앙이 종이 뭔지 친구들한테 설명해 줄래?"
유안은 긴장한 아이를 다독이며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유도했다.
이유안의 다리 뒤에 숨어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윤슬이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중앙이는··· 고대 포식자야···. 아르네스 던전에서 살던 애고······."
"고대 포식자?"
"아르네스 던전?"
"던전은 뭔지 알아! 오늘 갈 박물관 이름도 던전 박물관이라고 했어!"
"그런데 너는 누구야?"
"맞아, 이름 뭐야?"
친구들의 관심이 우르르 쏟아지자 윤슬은 멈칫했다.
그러나 당황은 잠시였다.
"나 이윤슬이야!"
윤슬은 긴장을 금세 떨쳐버리고 발랄하게 웃으며 유안의 다리 뒤에서 빠져나왔다.
*
아이들이 윤슬과 금세 친해져서 유안은 더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이윤슬은 어느새 골목대장처럼 모든 아이들 앞에서 전두지휘하며 박물관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번에만 특별히 박물관 도슨트를 맡아준 수창, 새로, 비조 길드장은 각자 맡은 구역에서 던전 관련 정보를 세심하게 전달했다.
특히 심해 던전을 담당한 비조 길드장이 열 살 수준에 맞춰 설명을 잘 해줘서 아이들이 좋아했다.
거기다 심해 던전 구역에서는 기념품으로 고래 인형을 나눠주기까지 했으니 기청해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애들이 진짜 좋아하네요. 역시 견학 장소로 선정하길 잘했어요."
인솔 교사도 만족하며 아이들 사진을 잔뜩 찍었다.
학부모에게 던전 박물관의 안전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견학을 반대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쏙 들어갈 거예요."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째는 훨씬 쉽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