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37)

"뮤즈! 왜 내가 선물한 옷을 입지 않은 것이오!"

"······."

다른 때라면 가차없이 무시했을 테지만 개관식이라는 단어가 유안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떤 옷인지 제대로 보지도 않았으니까··· 괜찮은지 확인만 해 볼까?'

디자이너가 개관식 때 꼭 입으라며 선물한 옷이 있기는 했다.

유안은 홀에 모인 사람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3층 침실로 다시 올라갔다.

*

"······잘 어울리십니다."

평소 목소리를 들어보기 힘든 방재이까지 다가와서 수줍게 칭찬을 전하고 갔다.

유안은 이쯤 되니 사람들이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말인지 진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몸에 잘 맞긴 한데.'

검은색과 검푸른색, 그리고 짙은 와인색으로 포인트 컬러가 들어간 정장은 치수를 재고 만든 것도 아닌데 이유안의 몸에 꼭 맞았다.

휴멜 디자이너가 자신의 신체 사이즈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소름이 돋기는 했으나 좋은 옷을 받았으니 오늘만큼은 넘어가기로 했다.

'기자들도 많이 왔으니까 갈아입길 잘 하기는 했어.'

던전 박물관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처음 생기는 것이라 외신 기자까지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이 정도의 관심을 받을 줄은 몰랐던 유안은 약하게 긴장한 상태로 개관식을 진행했다.

그래도 응원해주는 사람이 많아서 많이 떨리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무사히 개회사를 마치고 박물관 정문을 활짝 열었다.

불필요한 절차는 대폭 줄이고 박물관 내부를 일찍 공개하기로 했기에 바깥에서 시간을 오래 보낼 필요가 없었다.

차가운 기온에 카메라를 잡은 손이 얼어가고 있던 기자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유안이 가장 앞장서서 걷고, 그 뒤를 본점과 강남점 직원들이 줄줄이 따라갔다.

셀라도 오늘만큼은 일찍 일어나 개관식에 참여한 상태였다.

"하~암~. 아직도 잠이 덜 깼어···."

어제도 연장 근무를 한 탓에 피곤해하긴 했지만 S급 헌터이니 크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카페 직원들은 박물관 내부를 미리 구경해 봤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기자들은 건물을 집어삼킬 기세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연신 감탄했다.

"유안! 나 이거 해도 되지?"

셀라는 잠도 깰 겸 시뮬레이터 기계 앞에 앉았다.

플레이어가 체험 중인 화면을 다른 관람객들도 볼 수 있도록 커다란 스크린이 마련되어 있었다.

기자들은 S급 헌터가 전투하는 모습을 찰나의 순간까지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영상으로 담았다.

'기사 엄청 잘 나겠다.'

다른 헌터도 아닌 셀라가 나서줘서 고마웠다.

셀라의 화려한 스킬이 펑펑 터질 때마다 기자들이 환호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층마다 방이 몇 개씩 있기에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무리였다.

유안은 주현이 미리 만들어둔 리플릿을 관람객들에게 나눠주며 자유 관람을 권했다.

"저희는 먼저 점심 준비하러 가 볼게요."

장다온은 제자들을 이끌고 던전 박물관 앞마당으로 갔다.

아르네스 모래가 넓게 깔린 그곳에서는 차건오와 중앙이가 이미 뛰어놀고 있었다.

앞마당에 거대한 솥 두 개가 설치되자 중앙이는 부하1의 몸을 파바박 기어올랐다.

-크우!

"싸우라고? 솥이랑?"

-크응!

"이길 수 있기는 한데··· 솥은 적이 아니야."

고대 포식자와 말이 통하는 차건오는 솥을 공격하라는 난감한 명령을 받고 어색하게 웃었다.

박물관 최상층까지 확인하고 다시 내려온 유안은 앞마당의 솥 두 개를 보고 갸웃했다.

'메인 메뉴가 두 갠가···?'

장다온과 제자들은 메뉴를 끝까지 비밀로 했기에 유안은 아직도 기념 음식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다만 솥에 물이 팔팔 끓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국물 요리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날씨가 추우니까 따뜻한 국물이 좋기는 하지.'

어떤 요리가 완성될지는 몰라도 다온과 제자들의 실력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장다온의 제자들이 손질한 돼지 등뼈를 솥에 던져넣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크기는 아니라서 비각성자의 근력으로 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크우크우!

"뼈랑도 싸우라고? 중앙아,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려고 하지 마."

-킁!

차건오가 중앙이와 티격태격했다.

이중앙이 일방적으로 부하에게 얼토당토 않는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차건오 씨가 있어서 다행이지. 그나저나··· 설마 감자탕인가?'

등뼈와 기본 재료만 등장했을 때는 긴가민가 하던 것이 고산 던전의 왕감자까지 등장하자 확신으로 바뀌었다.

감자탕의 감자는 왕감자의 감자가 아니라지만 머릿속의 연쇄 반응으로 자연스럽게 그 메뉴가 떠올랐다.

'맛있겠다.'

유안이 감자탕 맛을 상상하며 입맛을 다시는 사이 다른 솥에는 사골국 재료가 풍덩풍덩 들어가기 시작했다.

장다온은 오늘 개관식에 기자들에게 국물류 요리를 선보일 생각이었다.

요리연구가는 이렇게 쌀쌀한 날에 뜨끈한 국밥을 먹어줘야 하는 심리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메뉴 선정 좋은데?'

이유안은 다온의 안목에 감탄하며 요리 과정을 홀린 듯 지켜보았다.

거대한 던전산 식재료를 다루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모든 과정이 휙휙 빠르게도 지나갔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거의 모든 종류의 부산물에 익숙해진 다온과 제자들에게 어려운 요리란 없었다.

솥 안의 내용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자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머금은 김이 피어올랐다.

운 좋게도 바람 방향이 박물관 쪽이라 냄새는 곧장 건물을 휘감았다.

"뭐야, 맛있는 냄새 나는데?"

"오, 진짜. 뭐지, 이거? 갑자기 배고프네."

박물관 내부의 먼지 한 톨까지 놓치지 않을 기세로 취재하던 기자들이 코를 킁킁대며 하나둘 1층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침 식사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타이밍도 좋았다.

유안은 손님들이 먼저 테이블과 의자를 차지할 수 있도록 살짝 비켜주었다.

셀라와 함께 박물관을 누비고 다니며 놀던 윤슬도 우당탕 뛰어 내려와서 유안에게 달려들었다.

"아저씨! 맛있는 냄새!"

"응, 곧 밥 먹을 거야."

"좋아! 아저씨 근데 아까 전에 저 사람들이 나한테 막 이것저것 물어봤어."

어린이가 목소리를 작게 줄이더니 유안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기자들이 이곳의 유일한 어린이인 윤슬에게 관심을 크게 보였나 보다.

"괜찮아. 나쁜 일은 안 생길 거야."

"으응···.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다 기억 안 난다고 대답했어!"

"···잘했어."

윤슬은 해맑게 웃으며 기자회견에서의 고전적인 수법을 쓴 것을 자랑했다.

어린이에게 또 이상한 지식을 주입한 건 홍소라일 게 분명했다.

그래도 기자들 앞에서 괜한 말실수를 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유안은 소라를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류지우 파트장 도움으로 미리 호적에 올려놔서 다행이지.'

혹여나 윤슬의 정체를 파헤치려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안전책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

그 덕에 이윤슬은 그저 아빠 일하는 곳에 따라온 어린이로 남을 수 있었다.

아저씨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 척을 했더니 기자들이 알아서 머릿속으로 드라마 한 편을 재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들 다 가면 나도 게임 해 봐도 돼?"

"음··· 주현 씨한테 물어보고 하자.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안 위험해요, 이 사장님."

둘이서만 소곤거리고 있었는데 김주현이 바짝 다가오더니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실 저나 이 사장님보다 윤슬이가 훨씬 튼튼하잖아요."

"맞아! 아저씨는 흐물흐물해!"

"나도 그 정도는 아니야, 윤슬."

"그 정도야! 말랑말랑해!"

아이가 꺄륵거리며 이유안의 체력과 근육량을 비판했다.

규격 외 등급의 어린이에게 듣는 말이니 더 반박할 수도 없어서 유안은 그냥 인정하고 넘어갔다.

"슬라임 아저씨!"

"···윤슬, 슬라임 나오는 던전도 갔었어?"

"응! 헉··· 맞다, 이건 비밀이라고 했는데."

수창 길드장이 데려간 것이 분명하다.

슬라임이 나오는 던전은 국내에 하나뿐인데 처치가 까다로워서 윤슬의 체험 학습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물론 수창 길드장과 길드원들이 아이를 충분히 보호하고 다녔겠지만··· 유안은 수창 길드장 번호로 무시무시한 문자 하나를 남겼다.

[앞으로 수창 길드장님한테는 애 안 맡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윤슬이 데리고 갔던 던전 보고서 자세하게 적어서 보내세요.]

수창 길드장 진 선 역시 박물관 개관식에 초대받았기 때문에 건물 내부에 있었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건물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아니, 왜! 왜요!"

계단을 구르듯 내려온 진 선이 새빨간 얼굴로 외쳤으나 유안은 들어주지 않았다.

아이를 수창 길드장에게 맡기느니 고대 포식자에게 맡기는 편이 믿음직스러울 것 같았다.

"윤슬이가 절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어제는 볼에 뽀뽀도 해줬다고요!"

"뽀뽀해주면 선물 준다고 했어! 그래서 해준 거야."

"아니, 윤슬아! 그걸 말하면 어떡해!"

"어쨌든 수창 길드장님은 윤슬이 던전 체험 학습에서 빠지시죠. 위험해서 안 되겠습니다."

진 선이 위험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호소했으나 유안은 들어주지 않았다.

윤슬은 말실수로 대형 길드장 한 명을 울부짖게 만들어 놓고 모르는 척했다.

"아저씨, 나 배고파···."

"응, 밥 먹으러 가자."

윤슬은 유안에게 안긴 채 뒤쪽의 수창 길드장을 향해 작은 혀를 빼꼼 내밀었다.

그간 선물과 용돈을 빌미로 여러 차례 애교와 뽀뽀를 받아간 대가였다.

*

감자탕과 설렁탕은 그 인기가 상당했다.

던전산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께름칙하게 여기던 보수적인 사람들도 국밥 앞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한 꺼풀 내려놓았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이것만 찾게 될 텐데.'

유안은 지금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앞으로 장다온의 레스토랑을 매일같이 찾아오게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몇몇 기자들은 사진을 찍거나 다온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장다온의 레스토랑이 더 유명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국밥집을 할까 봐요."

짧은 인터뷰를 마친 장다온이 유안에게 다가와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유안은 그것을 농담으로만 듣지는 않았다.

"정말 괜찮은 생각입니다. 이번에 제자가 더 늘었다고 하셨죠. 레스토랑 일은 잠깐 제자들에게 맡기고 다온 씨는 새로운 국밥집에 전념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레스토랑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장다온이 잠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음식의 질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레스토랑 음식의 대부분은 제자들이 만들고 있었고, 다온은 신메뉴 개발에만 힘을 쏟는 요즘이었다.

유안이 눈까지 반짝반짝 빛내며 국밥집 제안을 하자 장다온이 피식 웃었다.

"사장님. 한국인 같네요."

"예, 한국인이니까요."

"구, 국밥에 진심이실 줄은 몰랐는데··· 좀, 좀 안 어울려요···."

옆에 있던 홍소라가 참견했다.

"사, 사장님은 뭔가··· 밥보다 빵을 더 좋아하실 것 같은 이미지잖아요···."

"가리는 거 없이 잘 먹는 편입니다."

"에이···, 잘 먹는 건 저쪽이 잘 먹는 거고요···."

소라가 정태영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영은 솥단지를 통째로 들고 남은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중이었다.

규격 외 대식가와 비교당한 유안의 식사량은 한없이 초라하게 보였다.

"태영 씨는 논외로 둡시다."

"그, 그럼 이쪽···?"

홍소라가 이번에는 근처의 윤슬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뜨거워서 잘 못 먹던 이윤슬도 국물이 어느 정도 식자 거침없이 식사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주변에 대식가가 너무 많았다.

"···그래도 편식은 안 합니다."

"내일 아침은 브로콜리 수프로 준비할게요, 사장님."

"······."

서정원이 이때다 싶어 냉큼 끼어들자 유안은 할 말을 잃었다.

중앙 카페 직원들은 사장의 입맛을 지나치게 잘 아는 편이었다.

유안이 식사 시간 내내 놀림을 당했다는 것만 빼면 평화로웠다.

음식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배불리 먹은 기자들은 만족하며 던전 박물관을 떠났다.

뒷정리를 마친 중앙 카페 사람들은 본격적인 박물관 운영에 앞서 건물을 최종 점검했다.

"여기에는 이걸 장식하면 좋겠습니다."

유안이 심해 던전 구역 초입에 상어 인형을 놓았다.

인벤토리에서 자리 차지를 하던 것인데 이렇게라도 쓰면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준 선물을 너무 함부로 대하는 거 아니야?"

"여전히 한가하시면 인형이나 로봇 몇 개 더 만들어 주시죠. 기념품으로 팔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가 없이 부려먹으려 하고."

"심해 던전 부산물도 다양하게 파밍해서 가져다 주시고요. 제주에 있는 던전은 비조 길드에서 관리하지 않습니까."

유안은 기청해의 징징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 심해 던전 전시관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에만 집중했다.

다른 구역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채워 나갔지만, 심해 던전 구역은 오직 비조 길드장의 인벤토리에서 꺼낸 아이템만으로 꾸며 두었다.

'비조 길드 리셉션 직원도 요즘은 연락을 안 받으니까···.'

기청해가 직원에게 무슨 명령을 내린 것인지 곧잘 연락해오던 직원이 지나치게 잠잠했다.

길드에서 휴가를 받을 때마다 중앙 카페에 놀러 오던 단골 하나가 사라지니 허전했다.

'그래도 등급은 꽤 높아 보였으니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유안은 걱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분명 낚시에 푹 빠져서 연락을 잊은 것일 테다.

*

기다리던 연락은 오지 않았지만, 그 대신 상상도 못한 곳에서 던전 박물관 대표 메일로 연락해 왔다.

발신지는 바로 중앙 던전 게이트 제한 구역 바깥에 있는 한 초등학교였다.

"좋은 소식입니다. 아이들을 보내도 될 만큼 이곳이 안전하다고 입증된 셈이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