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37)

농담 아닌 것 같았는데.

소라는 킥킥거리며 헌터 디바이스로 화환을 촬영하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중앙 카페 공식 헌터그램에 화환 사진이 올라오기까지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요즘 협회로도 박물관 관련 문의가 많이 들어옵니다."

유안이 걱정한 것과 다르게 아직도 멀쩡히 협회 소속인 류지우가 말했다.

주말이라서 강남점의 사무실로 출근하는 대신 중앙 카페에 놀러 온 지우는 간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협회와 같이 하는 일인 줄 알아서 그럴 겁니다."

"예, 아무래도 그렇겠죠. 처음 생기는 던전 박물관이니까요. 전시품 준비는 잘 되어가나요?"

"이니티움 길드가 많이 도와줬습니다. 던전 공략법 같은 건 수창 길드와 새로 길드에서 정보를 자세하게 줬고요."

"상급 던전이나 신규 던전 정보는 구하기 힘든 것도 있을 텐데, 필요하시면 제가 아는 것도 말씀드릴게요."

여기저기서 던전 박물관을 돕지 못해 안달이었으니 유안은 따로 준비할 것이 별로 없었다.

중앙 카페의 단골 손님들은 방문할 때마다 던전 관련 정보를 잔뜩 넘겨주었고, 단골이 아닌 손님들도 은근슬쩍 쉬운 공략 루트를 속삭이고 갔다.

카페에 방문하는 모든 헌터들이 던전 박물관의 화려한 개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던전 정보를 다양하게 알 수 있는 박물관이 생기면 헌터들한테 좋은 점이 많기는 하지.'

김주현과 류민희의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던전 시뮬레이션 기계도 준비 중이었다.

실제로 던전에 들어갔을 때 몬스터를 어떻게 잡을지 연습해볼 수 있는 기계라서 벌써부터 헌터들의 기대감이 상당했다.

던전 박물관에 그 기계가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티켓을 미리 살 수 없겠냐는 문의가 쇄도하기도 했다.

"박물관 생기면 카페 손님도 늘어나겠네요. 알바생은 더 안 뽑으세요?"

"파트장님은 안 쓸 겁니다."

"아쉽네요. 잘할 수 있는데."

"협회 일이나 열심히 하시죠."

요즘 류지우가 틈만 나면 중앙 카페 알바생 자리를 노렸다.

농담으로 하는 말 같기는 한데 표정은 또 진지해서 유안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흠칫 놀라곤 했다.

류지우 퇴직 결사 반대 1인 시위라도 하고 싶었다.

"협회가 많이 뒤숭숭하긴 하죠. 재판 일정도 잡혔잖아요."

서정원이 포도씨 차 두 잔을 건네며 말했다.

나효숙은 지은 죄가 생각보다 많아서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사법 처리 과정이 더디기는 했으나 협회장 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은 국민 모두 느끼고 있었다.

"···차기 협회장 자리는 류지우 파트장님이 맡게 될 거라는 말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방재이가 찻잔 옆에 비스킷 접시를 놓으며 말했다.

중앙 카페 직원들과 류지우는 많이 친해졌기에 협회 관련 뉴스라면 모두의 관심이 상당했다.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류지우는 직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매크로 답변 같은 말을 돌려주었다.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싶어서 유안은 그냥 달달한 포도씨 차나 홀짝였다.

쌀쌀한 날씨를 사르르 녹여주는 온도였다.

슈바인스학세

던전 박물관 완공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중앙 카페 직원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개관식 기념 음식을 무엇으로 하는 게 좋을지 정하는 것이 그들의 주요 논제였다.

"요즘 소고기는 많이 먹었으니까 돼지고기는 어떨까요?"

"조, 좋아요···! 안 그래도 어제 재윤 씨가 돼지 한 마리 버리고 갔어요···."

수창 길드의 권재윤은 은혜 갚은 호랑이라도 된 것처럼 중앙 카페 뒷마당에 종종 식재료를 두고 가기는 했다.

바로 냉장고에 넣는 것이 신선하니 그러지 말라고 해도 서프라이즈가 중요한 거라며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중앙 카페 직원들은 출근하자마자 뒷마당에 특이점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첫 일정이 되었다.

권재윤이 하는 것을 따라하는 단골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눈여겨 볼 필요가 있었다.

"이니티움에서 상급 던전 하나를 추가로 파밍하기 시작했으니까 그쪽 식재료를 써도 괜찮을 겁니다."

중앙 카페 본점 옆자리를 꿰찬 이니티움 길드는 창립 이후 최고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중급이나 하급 헌터는 물론이고 A급 헌터들도 종종 길드에 지원했기에 이전에는 공략할 수 없던 던전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니티움 길드장은 중앙 카페 덕으로 공을 돌리며 던전산 식재료를 대폭 할인해주기도 했다.

'이번에 들어간 상급 던전은 수도권 근교의 산에 있는 던전이라고 했지. 괜찮은 게 많이 나오겠는데.'

이니티움 길드에서 던전 하나를 휩쓸면 중앙 카페의 곳간도 넉넉해진다.

유안은 벌써부터 배가 부른 기분이 들어 곁에 있던 윤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귀여워서."

"으응, 난 고기가 좋아! 고기 요리 많이 해주세요!"

윤슬은 이제 무언가 부탁할 때는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른들에게는 더 효과적으로 먹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댓말의 희소성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남발하지는 않았다.

유안은 가끔 어린이의 적절한 강약 조절에 감탄하곤 했다.

어른들을 아주 휘어잡고 사는 10살 꼬맹이였다.

"스승님! 저는 오늘부터 돼지고기 요리 폐관수련 하러 갑니다!"

"저도 같이 가요!"

"나도 데려가요···."

장다온과 제자들도 함께 개관식 음식을 고민 중이었다.

제자들은 이제 스승님보다 윤슬에게 껌뻑 죽기 시작했다.

다온은 그들에게서 해방되어 은근히 만족하는 눈치였으니 서로서로 좋기는 했다.

"그럼 돼지 몇 마리 주방에 넣어줄 테니까 나오지 마세요."

다온이 이때다 싶어 제자들을 주방 지옥에 빠뜨렸다.

이제 한동안 레스토랑 음식은 저들이 전부 만들게 될 것이다.

"이 사장님, 개관식 할 때 누구누구 초대할지는 정했어요? 초대장 만들려고 하는데!"

던전 시뮬레이션 기계를 완성한 후에는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김주현이 말했다.

초대장을 수제로 만들어서 이름도 일일이 적어 보낼 의욕이 넘실거렸다.

명색이 중앙 카페 사장의 던전 박물관 개관식인데 평범하게 갈 수는 없었다.

주현은 홍소라와 함께 초대장에 어떤 디저트를 동봉할 것인지 고민하기도 했다.

"일단 주요 길드장들은 다 부르려고 합니다. 류지우 파트장에게 명단을 받기로 했습니다."

"우아! 그럼 미술 선생님도 와?"

"···응, 비조 길드장도 와."

기청해는 초대장을 받지 못해도 꾸역꾸역 찾아올 것 같기는 하지만.

윤슬은 제 친구이자 미술 선생님인 비조 길드장이 온다는 소식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던 중앙이도 벌떡 일어나서 영문도 모른 채 같이 뛰었다.

고대 포식자는 몇 개월 간의 학습 끝에 어린이의 장단을 맞춰주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제 몸이 편해지는 길임을 터득했다.

"그럼 일단 수창, 새로, 비조 길드장은 다 참여한다는 거죠? 이니티움 길드장도 올 거고. 이 사장님 누님 분들도 초대하나요?"

"예, 올 겁니다."

"잘 됐다! 그 초대장은 좀 더 신경 써서 만들게요!"

김주현이 열정을 불태웠다.

유안은 알아서 잘 하겠지 싶어 초대장 제작을 주현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명단만 간추려서 넘겨줘야지.'

중앙 카페의 단골들만 추려서 보낸다 쳐도 수십 명은 될 것이니 빠르게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유안은 강남점에 들러서 그쪽 단골들 명단도 받아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남점 가실 거죠? 저도 같이 가요."

제자들을 일찌감치 지하 레스토랑으로 보내버린 장다온이 함께 나갈 채비를 했다.

"강남점 매니저 분께 와인을 받기로 했거든요."

셀라가 다온에게 그런 약속을 했나 보다.

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장다온과 함께 본점을 나섰다.

*

강남점에 도착해 잠시 기다리자 오늘도 일찍 출근한 셀라를 만날 수 있었다.

셀라는 유안과 다온을 보고 곧장 돌진해 다가오더니 두 사람 모두에게 공평하게 비쥬를 날렸다.

'참··· 애정이 과다한 친구라니까.'

유안은 셀라의 쪽쪽거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후에 입을 열었다.

"다온 씨한테 와인 드리기로 했다며. 창고로 가자."

"좋아, 유안~!"

셀라가 앞장서고 그 뒤를 유안과 다온이 따랐다.

창고까지 이어진 숲길은 사람들의 걸음으로 걷기 편하게 다져져 있었다.

"나도 와인을 혼자 만들어보는 건 처음이거든~. 그래도 몇 번 더 연습하면 이번 것보다 맛있는 게 나올 거야!"

던전산 포도를 와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셀라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래도 노력 끝에 결실을 맺어 지금은 창고 지하실에 상당한 양의 오크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숙성 기간이 길어지면 더 맛있을 거야! 지금 다온한테 주려는 건 첫 수확한 포도로만 만든 빈티지~."

셀라가 숫자 1이 새겨진 오크통을 가리켰다.

지하실 온도가 와인이 빠르게 숙성되도록 맞춰져 있기에 당장 오크통을 열어도 되는 품질이었다.

"잠시만~ 여과해서 병에 담아 올게! 창고 좀 구경하고 있어!"

셀라가 오크통을 번쩍 들고 여과기 쪽으로 향했다.

장다온과 이유안은 와인 완성을 기다리며 창고 위층을 둘러보았다.

매일 새로운 발효 식품이 채워지고 있는 저장소에는 못 보던 것들이 많았다.

"···이건 뭔지 아시겠습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곁에 장다온이 있어서 어떤 음식인지 물어보면 답이 척척 나온다는 것이었다.

유안이 작게 썬 양배추가 가득 든 유리병을 가리키며 묻자 다온이 설명해주었다.

"자우어크라우트네요. 독일식··· 양배추 백김치라고 보시면 돼요."

"김치······."

이제는 하다하다 김치도 담갔나 보다.

유안은 셀라의 생산성에 감탄하며 유리병을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코를 가까이 대니 시큼한 냄새가 났다.

"맥주 안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죠."

"그럼~ 내가 만든 자우어크라우트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 벌써 몇 번째 다시 만드는 건지 몰라."

어느새 와인 여과를 마친 셀라가 손가락 사이사이에 와인병을 잔뜩 끼우고 나타났다.

"이건 화이트, 여기는 레드."

오른손과 왼손에 각기 다른 종류의 와인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비각성자라서 인벤토리가 없는 다온 대신 유안이 와인을 받았다.

인벤토리에 넣자 '셀라 빈티지'라는 이름이 반짝반짝 빛난다.

"아, 온 김에 다크 비어도 가져가!"

"흑맥주?"

"응~ 흑맥주. 이번에 만들었거든."

던전 박물관 개관 준비로 바빠서 강남점에 며칠 못 왔는데 그사이 양조장이 된 모양이다.

셀라가 흑맥주 여러 병을 가지고 와 유안에게 넘겼다.

인벤토리가 술로 가득 차자 술고래가 된 기분이었다.

"사장님, 개관식 기념 음식 고민 중이라고 하셨죠."

"예. 돼지고기 요리를 하게 될 것 같기는 합니다."

"돼지고기에 흑맥주라··· 괜찮은 요리가 떠올랐어요. 이제 본점으로 돌아갈까요?"

장다온은 막 떠오른 레시피를 얼른 쓰고 싶어 마음이 분주해졌다.

유안도 덩달아 동작이 급해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밥도 안 먹고 가는 거야~?"

곧 저녁 시간이기는 했다.

셀라가 아쉬운 티를 팍팍 내자 유안은 하는 수 없이 양팔을 벌렸다.

중앙 카페의 토템이 이유안의 품으로 거침없이 돌진했다.

"윽, 너 진짜··· 달려들지는 마."

S급 헌터가 몸통 박치기를 하면 갈비뼈가 또각 부러질 수도 있다.

셀라는 나름대로 힘조절을 한 것 같지만 그것도 E급 헌터인 유안에게는 과하게 느껴졌다.

"허그로 내 마음을 풀어줄 생각이었으면 이 정도는 각오해야지!"

셀라가 팔에 힘을 실어서 유안을 으스러트릴 듯 껴안았다.

코끼리에게 밟히는 기분을 체험한 유안은 몇 번 켈록대다가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유안이 귀엽게 먼저 안아달라고 했으니까 오늘은 특별히 봐 준다! 그래도 다음에는 꼭 저녁 먹고 가~! 다온도!"

"네. 알았어요."

장다온도 셀라와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다온을 안아줄 때는 힘을 거의 싣지 않는 셀라를 보고 유안은 한껏 억울함을 느꼈다.

*

본점에 도착한 장다온은 레스토랑으로 내려가는 대신 카페 주방을 택했다.

"큰 오븐이 필요하거든요."

홍소라가 효율 좋게 빵을 구워내기 위해서 김주현에게 의뢰한 초대형 오븐이 있었다.

다온은 오븐 속에 있는 팬을 전부 빼내어 오븐을 단층으로 만들었다.

"뭐, 뭐 구우시려고요···.?"

가게 정리를 마친 홍소라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장다온을 지켜보았다.

"소라 씨. 돼지 한 마리 들어온 거 있다고 했죠."

"네, 네···. 기본 손질은 해 뒀어요···! 드, 드릴까요?"

"앞다리만 주세요."

"네···!"

홍소라가 육류 냉장고에서 돼지 앞다리 두 개를 낑낑대며 들고 나왔다.

유안이 나서서 하나를 받아주었다.

'대체 이걸로 뭘 하려고··· 족발?'

장다온은 손질된 앞다리 위에 빠르게 시즈닝을 마치고 오븐에 초벌했다.

화력이 세서 오래 구울 필요는 없었다.

"사장님. 흑맥주 꺼내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맥주병을 받은 다온은 오픈 팬 위로 흑맥주를 콸콸 쏟아부었다.

"기대되네요."

카페 마감을 끝내고 막 들어온 서정원은 어떤 요리가 탄생할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정원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미어캣처럼 서서 요리 과정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10분에 한 번씩 흑맥주로 샤워한 돼지 앞다리는 먹음직스럽게 거뭇거뭇한 색상으로 익어갔다.

"조, 족발···?"

유안과 비슷한 생각을 하던 소라가 그 음식 이름을 입에 올렸다.

"독일식이죠."

완전히 틀린 건 아니라고 말한 장다온이 앞다리를 접시에 세팅하고 그 옆을 자우어크라우트로 채웠다.

강남점에서 넉넉히 받아 챙겨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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