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소라는 포도나무에 [던전화] 스킬이 더는 들어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손을 거두었다.
"따려면 셀라를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쵸···? 사장님이랑 제가 하면··· 따다가 떨어뜨릴 것 같아요."
크기가 상당한 만큼 무게도 엄청날 것이다.
이유안과 홍소라는 괜한 허세를 부리지 않고 얌전히 S급 헌터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강남점 건물이 아닌 맥주 창고로 가자 막 출근한 셀라를 만날 수 있었다.
"유안~, 챠오!"
"좀 떨어져서 얘기하자."
유안은 오늘도 쪽쪽거리는 셀라를 익숙하게 밀어내며 말했다.
맥주 창고는 꾸준히 조금씩 채워지는 중이었다.
"어제도 몇 통 더 만들고 갔다며. 무리하지는 않아도 돼."
"하하, 유안! S급 헌터 체력을 걱정하는 거야? 귀여워~."
남는 게 체력인 셀라가 갑자기 팔근육을 자랑하며 눈앞의 맥주통을 번쩍 들어 보였다.
"우, 우와··· 대단해요···!"
홍소라가 가볍게 박수를 치며 감탄하자 신이 난 셀라는 맥주통을 양 어깨에 차곡차곡 쌓는 묘기까지 보였다.
'왜 저러는 걸까···.'
유안은 셀라의 엉뚱한 행동에 한숨을 쉬며 본론을 꺼냈다.
"셀라, 힘자랑 그만하고 포도나 따러 가자."
"오, 포도! 포도 열렸어? 우리 숲에?"
"숲은 아니고··· 이리로 와 봐."
유안이 앞장서고 셀라가 그 뒤를 따랐다.
홍소라는 맥주통을 좀 더 구경하다가 그들을 놓칠 새라 종종걸음으로 뛰어왔다.
*
이유안은 생애 두 번째 인터뷰를 앞두고 있었다.
이번에도 게이트 뉴스의 손수혜 기자가 인터뷰어를 맡았기에 크게 긴장은 되지 않았지만···.
"이거 보세요! 예쁘죠!"
"하하, 유안! 머리 올리니까 올드해 보여~!"
인터뷰 소식을 들은 중앙 카페 직원들이 우르르 모여 사장님 꾸미기 놀이를 시작한 게 문제였다.
유안은 반쯤 포기한 채로 제 얼굴과 머리를 직원들에게 맡겼다.
머리가 몇 번이나 다시 감겨졌는지··· 다섯 번까지는 세었다가 그 후로 마음을 놓아버렸다.
"피곤하면 주무시고 계세요, 사장님. 다 끝나면 깨워드릴게요."
서정원이 유안의 얼굴 앞에 손거울을 비춰주며 말했다.
"···예, 그럼 눈 좀 붙이겠습니다."
다들 사라져주면 안 피곤할 것 같기는 했지만, 유안은 직원들의 소소한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잠깐 졸았다 일어나니 머리와 얼굴이 정돈되어 있었다.
유안은 최대한 깔끔한 옷을 챙겨 입고 손수혜 기자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인터뷰 장소는 뒷마당이었기 때문에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사장님! 저 왔어요!"
중앙 카페가 첫 방송을 탄 이후로 종종 찾아오던 손수혜는 어느새 수습 기자에서 벗어나 정식 기자로 승급했다.
매일같이 중앙 카페에 얼굴을 비출 정도의 단골은 아니지만, 가끔 올 때마다 선배들 커피까지 잔뜩 싸 가던 모습을 유안도 기억하고 있었다.
"인터뷰 바로 시작하면 될까요? 아, 카메라, 카메라. 내 정신 좀 봐. 사진 먼저 한 장 찍고 시작할게요! 사장님 오늘 인터뷰라고 신경 좀 쓰셨나 봐요."
그래도 여전히 덜렁거리는 면이 있는 손수혜 기자가 인벤토리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자연스럽게 포즈 취해 주세요!"
뭐가 가장 자연스러운 걸까 고민하던 찰나에 셔터음이 몇 번 들렸다.
'이상하게 찍혔을 것 같은데···.'
막상 카메라를 보니 참았던 긴장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였다.
-크우!
장식용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버터 핫 초콜릿을 본 이중앙이 돌진했다!
"허, 억··· 주, 중앙아··· 거기로 가면 안 돼···!"
홍소라가 다급하게 중앙이를 잡아보려 했지만 늦었다.
고대 포식자는 빠르게 달려와 유안의 다리를 등반하기 시작했다.
이미 앵글 안으로 들어가버려서 소라도 더는 포식자의 뒤를 쫓지 못했다.
'고소한 냄새를 좋아했지, 참.'
평소에도 중앙이가 가끔 카페 음료를 노릴 때가 있었기에 유안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테이블 위로 짧은 팔을 뻗은 이중앙이 음료를 엎어버리기 전에 잔을 붙잡았다.
"오, 지금 표정 좋아요!"
찰칵!
이유안이 사고뭉치 마스코트를 막아내는 순간 경쾌한 셔터음이 터졌다.
"사진은 이거 쓰면 되겠어요. 바로 인터뷰 들어가요, 사장님!"
카메라 액정을 확인한 손수혜가 만족스럽다는 듯 엄지를 치켜올리고 유안의 앞자리에 앉았다.
던전 박물관
평범하게 근황 이야기로 시작한 인터뷰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층적인 부분까지 파고들었다.
손수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물어볼 걸 다 물어보는 인터뷰어였다.
'말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상관은 없지만.'
중앙 카페는 어차피 SNS에서도 유명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기에 신메뉴 하나만 내도 소문이 일파만파 퍼진다.
강해민이 설계한 건물을 본점 근처에 짓기 시작했다는 것도 당연히 전국민이 아는 사실처럼 되었다.
새로 짓는 건물에는 어떤 가게가 들어오는 거냐고 궁금해하는 단골 손님도 많았다.
"새 건물은 중앙 카페 본점의 역할을 일부 분담하게 될 거라는 추측도 있는데요, 사장님 이거 진짠가요?"
손수혜가 기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손님으로서 궁금해 안달이 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유안은 물음에 쉽게 대답해줄 수 없었다.
'···아직 못 정했는데!'
행복한 고민을 시작한 것도 며칠이 흘렀으나 이렇다할 뾰족한 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본점과 강남점으로 손님들이 분산되면서 이전처럼 웨이팅이 길어질 일도 없었기에 카페를 하나 더 만드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본점 근처에는 지하 상가도 있기에 가게를 확장하고 싶으면 지하를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직 구상 단계라, 확실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유안은 인터뷰에서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인터뷰가 원만히 끝난 후에는 차일피일 미뤄뒀던 고민을 제대로 시작했다.
'쌍둥이 건물이라··· 뭐가 좋지.'
도면을 봤을 때는 웅장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그곳에서는 뭘 해도 의미 있는 일일 것 같아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이거 드세요, 사장님."
이유안이 1층 홀의 전용석에 앉아 있자 서정원이 포도 크레이프 케이크를 내밀었다.
날씨가 슬슬 쌀쌀해져 뒷마당에 나가 있는 시간이 줄었다.
주방과 접근성 좋은 곳에 머무르면 한 시간에 한 번씩 새로운 간식이 배달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홍소라가 '그레이트 그레이프 크레이프 케이크'라는 이름을 붙여버린 포도 케이크에는 서정원이 직접 졸인 포도잼이 사용되었다.
던전산 포도 자체의 당분이 강해서 설탕을 많이 쓰지 않고도 포도향 가득한 잼을 만들 수 있었다.
"오늘부터 파는 겁니까?"
"네, 지금 주방 오븐에서 굽고 있어요. 사장님 드린 건 소라 씨가 미리 만들어 둔 거예요."
"맛있습니다. 적당히 상큼해서 좋네요."
"레몬 필링도 약간 넣었대요."
정원은 포도 케이크에 들어간 속재료를 조금 설명하더니 지하 레스토랑에서도 포도 한 송이 받아갔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다온 씨가 포도 피자를 만들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셀라 씨도 잠깐 들러서 레시피를 받아 갔어요."
"포도 피자···?"
상상이 안 가는 비주얼에 유안이 당황했다.
그러자 서정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은 파인애플 피자도 좋아하시니까 마음에 드실 거예요. 완성되면 가져다 달라고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 배부릅니다."
"한 조각 정도는 먹을 수 있잖아요, 사장님."
중앙 카페 직원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유안이 보일 때마다 먹을 것을 바리바리 꺼내준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유안은 대체로 배부름 상태였다.
'강남점에 있으면 그래도 덜했는데··· 이제 거기 가면 자꾸 술안주를 줘서.'
강남점에서 맥주를 정식으로 판매하게 된 후에는 메뉴판에 안주류가 대거 추가되었다.
그리고 직원들은 사장인 유안에게 시식해보라고 권하며 매번 다른 종류의 안주를 몇 접시씩 가져다 주었다.
이유안이 술은 즐기지 않아서 차선책으로 술안주 먹이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끊임없이 먹어야 하는 음식 지옥에 빠진 것 같았다.
"천천히 드세요."
서정원이 따뜻하게 말하며 포도 스콘과 도넛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유안은 우선 포크 끝으로 그것들을 조금씩 떼어내 맛만 보았다.
문제는 다 맛있어서 아무리 배가 불러도 남기기 싫어진다는 것이었다.
정원의 말대로 천천히 먹을 생각으로 일단 포크를 내려둔 유안은 1층 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저마다 신나게, 혹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들이 홀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항상 새롭고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기도 했다.
장사 잘 되는 가게를 흐뭇하게 둘러보던 사장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가서 멈추었다.
기청해의 흔적이었다.
'저건 왜 계속 붙여놓는 거야?'
기청해는 꾸준하게도 매주 일요일마다 찾아와서 미술 수업을 하고 갔다.
소문을 들은 단골 손님들도 재미로 참여했기 때문에 수업이 한 번 끝나면 그림 실력이 천차만별인 작품들이 십수 점씩 생겼다.
그것들을 모두 걸기에는 중앙 카페의 벽이 부족했기에 타협 끝에 이유안, 이윤슬, 그리고 기청해의 것만 전시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내 건 걸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유안의 그림은 셀라가 그 작품성을 강력 어필하는 바람에 전시 작품 목록에서 빠질 수 없었다.
어린이의 그림은 쭉쭉 성장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유안의 실력은 굳어 있는 편이라 비교가 더 잘 되었다.
이유안은 가끔 자신의 그림만이라도 홀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기청해 작품 정도면 미술관에 걸어도 되지 않나?'
비조 길드장의 수려한 그림을 꼼꼼히 살피던 유안의 머릿속에서 사고가 무럭무럭 확장되었다.
카페 옆에 지어질 건물의 쓰임새를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강해민은 유안의 연락을 받자마자 하던 일도 내팽개친 채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유안이 이상한 오해를 해서 카페가 한바탕 뒤집어졌던 날 이후로 해민은 더 훌륭한 친구로 거듭났다.
유안이 부탁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 됐든 들어주려고 했고, 아무리 바빠도 연락을 흘려보내는 일이 없었다.
'역시 해민이랑 다시 연락하고 지내길 잘했어.'
회귀 전에는 강해민과 연락이 뜸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뭐 필요한 거 있냐? 공사 곧 마무리 작업 들어가긴 할 건데."
"건물 어떻게 쓸지 정했거든."
건설 허가증을 받을 때, 일단은 건물의 용도를 상가로 적어 내기는 했다.
류지우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절차가 좀 복잡해지긴 하겠지만, 나중에 제대로 정해졌을 때 바꿀 수 있으니까 그 부분은 걱정 마세요.'
협회 사람을 주변에 둔 것이 빛을 발하는 시점이었다.
"상가 말고 다른 거 하게?"
"응, 박물관으로 쓰려고."
"···뭐?"
"던전 박물관."
유안이 회귀하기 전, 그러니까 3년 후의 미래에는 헌터 협회에서 직접 추진하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헌터 디바이스로 간단한 던전 정보를 검색해볼 수는 있지만, 작은 액정 속에 모든 것을 자세하게 담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그래서 막 각성한 헌터들, 혹은 던전에 대해 알고 싶은 비각성자들을 위해 던전 박물관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국가 사업을 빼앗아 온 셈이지만··· 뭐 어때. 어차피 헌협은 요즘 정신 없으니까 내가 대신 해 주면 좋지.'
그리고 협회가 하는 것보다 잘할 자신도 있었다.
회귀 전, 헌터 협회는 던전 게이트 근처가 아니라 접근성 나쁜 애먼 곳에 던전 박물관을 만들겠다고 해서 원성을 사기도 했었다.
이유안과 중앙 카페는 던전 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한 기초 자료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니 협회가 나서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박물관을··· 뭐 어떤 걸 전시할 건데?"
미래 정보가 없는 해민은 엉뚱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유안은 자신 있게 설명했다.
회귀 전, 던전 박물관 리플렛을 잘 봐둔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건물이 7층이나 되잖아. 층마다 방도 따로 있고. 국내 던전을 하나씩 소개하는 거야, 방마다.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 공략법은 뭔지 하는 기본 정보부터··· 그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도 같이 전시하면 되겠다. 이니티움 길드한테 도움 받으면 어렵지 않을 거야."
"···그거야 그렇긴 한데, 이런 건 또 어떻게 생각했냐?"
해민은 유안의 통통 튀는 사고를 따라갈 수 없어 감탄만 했다.
매일 맛있는 걸 먹으며 멍하니 있는 줄만 알았는데 머릿속으로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고작해야 백화점이나 마트 정도를 생각했던 강해민은 자신보다 훨씬 나은 유안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류지우 파트장한테 건물 용도 변경 요청은 내가 한다. 어차피 연락할 일 있어서."
"응, 고마워. 그리고 옆에 지을 쌍둥이 건물은 미술관으로 쓸 생각이라고도 전해줘."
"···미술관?"
박물관 옆에 미술관이 있는 구도가 나쁘지는 않겠지만, 전시할 만한 작품이 있는지가 문제였다.
해민이 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유안은 1층 홀의 벽을 가리켰다.
이유안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자 기청해의 '당장 내다 팔아도 될 그림' 여러 점이 보였다.
"비조 길드장한테 연락은 내가 할게."
재밌는 일에는 사족을 못 쓰는 기청해이니 허락해줄 것이 분명했다.
'자기 이름이 알려지는 게 꺼려지면 작가명으로 걸어도 되니까.'
이유안은 윤슬의 디바이스를 잠깐 쓰기 위해 3층으로 올라갔다.
기청해의 헌터 코드는 여전히 이윤슬의 디바이스에만 저장되어 있었다.
*
건물이 완공되지도 않았는데 중앙 카페 본점 앞으로 자꾸만 화환이 도착했다.
[이유안 관장, 개관 축하해.]
발신지가 비조 길드인 기념 화환은 육지의 풀 대신 바닷속 해초와 산호로 꾸며져 있었다.
비린내가 날 줄 알았는데 후처리를 어떻게 한 것인지 상쾌한 향기만 났다.
그리고 상하거나 썩지도 않아서 인테리어 겸 방향제 용도로는 좋았다.
"이, 이제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관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곧 박물관 관장이 되는 유안에게 홍소라가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편한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그, 그럼 유안이라고 해도 돼요···?"
"···예?"
"노, 농담이에요···. 그냥 계속 사장님이라고 부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