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37)

"예, 그럽시다."

서정원이 눈웃음을 남기고 셰프를 데리러 지하로 내려갔다.

중앙 카페 직원들이 저마다 헌터 디바이스를 들고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기 시작하자 윤슬도 자신의 작은 디바이스를 만지작거렸다.

"나도 친구 부를래!"

"···그래, 윤슬."

누구를 부르겠다는 건지 모르지만 윤슬이 가진 연락처는 중앙 카페의 단골 손님들 것뿐이었으니 괜찮았다.

유안은 윤슬이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응! 나 윤슬인데 우리집에 밥 먹으러 와! 내가 고기도 줄게."

만찬 컨셉이 한식으로 잡히다 보니 윤슬의 오늘자 스테이크는 떡갈비로 결정되었다.

그것을 선뜻 나눠주겠다고 할 정도로 친한 사람이 누구인지 유안도 궁금해졌다.

"윤슬, 누구한테 연락한 거야?"

"으응··· 비밀!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어!"

"두 시간?"

"응!"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하던 중이었나 보다.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는 얘기를 듣자 유안의 궁금증이 커졌다.

그래도 윤슬은 끝까지 통화 상대를 밝히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신만의 비밀을 가져본 어린이는 신이 나서 키득거렸다.

"아저씨랑도 친한 사람이야!"

"나랑 친하다고?"

"응. 엄청엄청 많이 친해!"

"···윤슬, 선생님 불렀어?"

"흐응, 안 알려줄 거야! 비밀이니까!"

유안이 일괄적으로 파티 안내 문자를 넣은 사람 중 해민도 있기는 했다.

그런데 강해민이라면 두 시간이 걸린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청 많이 친한 사람들이 또 누가 있을까 생각하던 유안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 시간 후에 정답이 밝혀지는 퀴즈를 낸 윤슬이 히히히 웃으며 유안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누구지?'

유안은 윤슬을 번쩍 안아들고 계속 고민했다.

*

친숙하게 입맛을 자극하는 냄새가 뒷마당에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둥글고 깊은 팬에 잡채를 볶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커다란 솥에 소고기 미역국이 팔팔 끓었다.

윤슬이 좋아하는 떡갈비는 특별히 크게 만들어서 모두 함께 나눠먹기로 했다.

"엄청 커!"

가운데 쫀득쫀득하고 하얀 떡이 화룡점정처럼 콕 박힌 떡갈비를 바라보는 윤슬의 눈이 반짝거렸다.

워낙 커서 팬이나 화덕에 올릴 수 없어 서정원이 직접 떡갈비 내부에 골고루 스킬을 쓰는 조리법을 택했다.

이윤슬은 육즙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 익은 떡갈비를 무심결에 만져보려 했다가 서정원에게 부드럽게 저지당했다.

"지금은 뜨거워서 다칠 수도 있어. 이따가 잘라줄게요, 윤슬아."

"그럼 나는 제일 큰 거!"

"알았어."

정원이 따뜻하게 웃으며 윤슬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잔소리를 양쪽에서 듣던 유안은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다.

손으로는 제육볶음이 타지 않게 열심히 뒤적이며 점점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았다.

거의 모든 요리가 완성되어서 이제 곧 식사가 시작되는데 윤슬이 부른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윤슬, 네 친구는 아직 멀었대?"

"오고 있대! 먼저 먹어도 된댔어!"

"···그래?"

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

'때 되면 오겠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한 유안은 윤슬에게 제육볶음의 양념이 덜 묻은 쪽을 한 입 먹여주었다.

이유안의 자연스럽게 육아하는 모습을 본 누나들이 감탄했다.

"애가 애를 키우네."

"정말 네 애는 아니라는 거지? 이렇게 닮았는데···."

유경과 유월은 윤슬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유안의 등짝부터 한 대씩 때렸다.

사고 친 적이 없는 유안은 별안간 누나들에게 얻어맞고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윤슬을 정식으로 소개하며 자신이 낳은 아이가 아님을 확실하게 알렸다.

누나들은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일단 이윤슬 어린이를 무척이나 예뻐했다.

"아가, 이것도 먹어 봐."

"볼살 너무 귀엽다! 유안이 어릴 때랑 똑같아. 그치, 언니?"

"우응··· 이거 맛있어요."

윤슬도 눈치 빠르게 자신이 줄 서야 할 곳을 알았다.

다른 어른들에게는 공평하게 반말 화법을 구사하는 어린이가 유안의 누나들에게는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예쁜 존댓말을 썼다.

아기라고 불려도 아니라고 바락바락 소리치는 일이 없었다.

"더 줄까?"

"네에."

"아, 해 봐. 너무 귀엽다! 윤슬이는 밥도 잘 먹고 착하네. 유안이 쟤는 어릴 때부터 밥 먹기 싫다고 얼마나 땡깡을 부렸는지 몰라. 영양실조 걸릴 뻔한 거 나랑 유경 언니가 겨우 살려놨지."

"내가 언제··· 요···!"

어린애들은 원래 밥 먹기 싫다고 투정 좀 부리며 크는 게 아닌가.

유안이 합리화하는 사이 윤슬이 그래도 아저씨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도 아저씨 요즘은 많이 먹어요!"

"그럼, 우리 윤슬이가 역시 잘 아네."

유안은 잘 키운 어린이의 머리를 삭삭삭 쓰다듬었다.

그런데 윤슬이 굳이 말하도 되지 않았을 이야기까지 덧붙여버렸다.

"아까도 초콜릿이랑 사탕이랑··· 케이크 먹었어요! 나랑 같이!"

"그랬니?"

이유경이 달콤한 간식거리만 잔뜩 먹은 막냇동생을 은은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순간 유안은 직감했다.

'오늘 밥 세 공기는 먹어야겠는데···.'

강경한식파인 누나들 앞에서 간식 말고 밥도 잘 먹는다는 걸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요리의 가짓수가 많아서 뒷마당 한가운데에 긴 테이블을 놓고 뷔페식으로 차렸다.

물론 서정원은 떡갈비의 가장 잘 익은 부분을 큼직하게 잘라서 잊지 않고 윤슬에게 주었다.

이윤슬은 양옆에 유안의 누나들을 끼고 떠먹여주는 음식을 얌전히 받아먹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훨씬 어리광을 부리는 윤슬의 태도에 얼이 나간 유안은 맞은편에 앉아서 헛웃음을 지었다.

'근데 윤슬이가 부른 사람은 대체 언제 오려나.'

유안은 노릇노릇한 새우전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벌써 식사가 한창인데···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으면 만찬에 완전히 늦을 수도 있다.

"윤슬, 네 친구 오고 있는 거 맞지?"

"웅!"

윤슬이 제 팔뚝 만한 등갈비를 손에 들고 발랄하게 대답했다.

"늦게 오면 음식 안 남는다고 전해···."

"음식이 남아있을 때 도착했으니 다행이야. 그렇지?"

유안은 자신의 귓가에 갑자기 속삭여지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쳐서 흠칫 돌아보았다.

비조 길드장 기청해의 얼굴··· 대신 리얼하게 생긴 꽃게 로봇이 끼릭끼릭 움직이고 있었다.

당장 솥에 넣고 싶은 비주얼의 꽃게가 입에서 부글부글 기포를 뿜어냈다.

물총 기능도 있는지 집게발 끝에서는 시원한 물줄기가 핏 쏘아진다.

"선물."

기청해는 수제 꽃게 로봇을 윤슬에게 건넸다.

"우아! 신기해!"

윤슬이 마냥 좋아하며 웃었다.

심란해진 건 유안 뿐이었다.

'이 사람이랑 아저씨는 안 친해, 윤슬···.'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어린이의 표정이 너무 해맑아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친구!

유안은 윤슬의 디바이스 연락처 목록을 확인하고 기함했다.

어린이는 자신이 만난 모든 어른들의 헌터 코드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이유안이 잘 모르는 손님들의 것도 있어서 입이 다물리지 않았다.

"디바이스 내미니까 그냥 다들 입력해주던데!"

헌터 코드 따기 신동 어린이가 말했다.

확실히 윤슬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다가온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사람들이 대부분이기는 했다.

"그래도 친구는 아직 한 명이야. 나중에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

대부분의 헌터는 깔끔하게 이름만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예외는 아저씨, 선생님, 친구!뿐이었는데 여기서 친구!를 비조 길드장이 담당했다.

"기청해 씨, 저한테는 코드 안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이유안 사장이 먼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지금이라도 알려줄까?"

"허··· 됐습니다."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만나려면 대뜸 제주로 찾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기는 했다.

그런데 윤슬에게 기청해의 헌터 코드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괜찮았다.

유안은 제 헌터 디바이스에 비조 길드장의 헌터 코드를 저장하는 것보다는 윤슬의 디바이스를 빌려 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호감 있는 상대의 번호를 알고 싶을 때는 괜한 자존심 세우지 않는 게 좋아."

"저는 기청해 씨한테 호감 없습니다."

"이유안 사장 얘기는 아니었어."

뺀질뺀질하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기청해가 얄미웠다.

유안은 비조 길드장을 한 번 노려보고 관심 끄는 쪽을 택했다.

경험상 말만 걸지 않으면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다.

그런데 유안이 기청해를 무시하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일단 윤슬부터가 비조 길드장에게 팔을 뻗으며 안아달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기청해는 곧장 윤슬을 안고 뒷마당 가장자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로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꺄르륵 높은 음으로 터지는 윤슬의 웃음이 뒷마당에 경쾌하게 퍼졌다.

'애들한테 잘할 것처럼 생기지는 않았는데 의외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생겼으면서 요리를 잘 하는 것부터 시작해 찾아올 때마다 직접 만든 장난감을 들고 온다는 것이 인지부조화를 일으켰다.

세간에 알려진 비조 길드장의 모습과는 철저하게 달랐다.

"막내, 저 사람도 새로 사귄 친구니?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우리 유안이 능력 좋다? 어디서 저렇게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만 긁어모으는 거야, 응? 애가 어릴 때부터 반짝거리는 걸 좋아한다 싶더니 까마귀 본능이 있나?"

누나들도 기청해를 썩 괜찮게 보고 그 외모부터 칭찬했다.

"친구도 아니고 까마귀도 아니거든······."

이유안이 반박하거나 말거나 누나들은 윤슬 대신 막냇동생에게 이것저것 반찬을 놓아주기 바빴다.

'갈비찜 맛있네.'

유안이 얌전히 우물거리며 식사를 계속했다.

어린이 한 명이 빠지니 밥 먹기가 수월해지기는 했다.

배가 어느 정도 찬 이유안은 슬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기청해가 윤슬을 안은 채 담벼락 근처를 돌고 있었다.

이제는 중앙이도 함께였다.

'저 인간은 밥도 안 먹나?'

윤슬이 연락할 때도 저녁 먹으러 오라는 식으로 말했을 테니 식사를 따로 하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진수성찬을 눈앞에 두고 한 입도 먹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지난번에도 안 먹었던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기청해의 입으로 무언가 들어가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중앙 카페의 음식이 마음에 든다고 칭찬했으면서 정작 먹지는 않는다.

'왜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던 유안은 살이 많이 붙은 등갈비 하나를 손에 들었다.

궁금한 건 까먹기 전에 바로 해결해야 한다.

커다란 갈빗대를 들고 담벼락에 다가가자 중앙이가 먼저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크우으으으

"네 거 아니야."

원하는 게 있을 때마다 길게 우는 습관이 든 이중앙은 유안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유안은 그런 중앙이를 부드럽게 떼어내고 비조 길드장과 윤슬 쪽으로 다가갔다.

"아저씨! 선생님이 돌아다니면서 먹으면 안 되는 거랬는데!"

"배달하러 온 거야, 윤슬."

"응? 내 거야?"

"윤슬이는 많이 먹어서 배부르잖아."

더 먹고 싶었으면 진작 테이블로 돌아왔을 것이다.

윤슬은 지금 먹을 만큼 먹어서 산책으로 소화시키는 중이었다.

유안은 윤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따끈따끈한 등갈비를 기청해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음식을 주문한 기억은 없는데."

"선물입니다. 드세요."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면 받아야지."

비조 길드장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우아하게 등갈비를 집었다.

유안은 기청해의 입에 음식이 들어갈 때까지 버티고 서 있을 심산으로 지긋이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방은 눈웃음만 지을 뿐 입을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안 드십니까?"

"나중에 먹을게."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습니다. 지금 드시죠."

"맛있는 건 아껴두는 주의라서 말이야."

기청해는 변명 같지 않은 변명으로 상황을 모면하며 제 인벤토리에 등갈비를 넣었다.

그리고 손에 묻은 소스까지 휴지로 깨끗하게 닦아냈다.

일련의 동작을 지켜보던 유안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기청해 씨, 우리 카페 음식 좋아하시는 건 맞습니까?"

"평생 중앙 카페의 음식만 먹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

"···여태 사간 음식들, 기청해 씨 인벤토리에 그대로 들어있을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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