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37)

코앞에 역이 있는데 사무실에 앉아서 손 놓고 있는 것은 류지우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팀원들과 함께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자 어느 정도 깔끔해진 내부가 보였다.

"선생님, 우리 오늘도 환경 미화 하나요?"

팀원 하나가 장난스레 지우에게 물었다.

류지우도 풀어진 얼굴로 농담을 받아주었다.

"똑바로 안 하면 벌점 줄 겁니다. 쓰레기봉투 하나씩 가득 채우세요."

"에이··· 우리 선생님은 너무 FM이야."

팀원이 능청스럽게 굴자 다른 팀원들도 키득거렸다.

농담이 몇 번 오가자 어두컴컴한 지하의 분위기도 말랑말랑해졌다.

"여러분은 이쪽을 정리하고 계세요. 저기 안쪽은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네, 네, 선생님."

"몸 조심하세요, 선생님!"

"알겠습니다."

팀원들에게 지하도 청소를 맡긴 류지우는 혼자서 더 깊은 굴로 들어갔다.

열차가 지나다녔던 곳으로, 던전 게이트가 터지며 난리통이 되었으나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게 버틴 굴이었다.

집결지의 정확한 위치에서는 벗어난 장소였지만 류지우는 이런 곳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류지우는 인벤토리에서 여러 물건을 꺼냈다.

이유안 사장의 도움으로 얻은 것으로, 중앙만쥬를 파는 지하 헌터들의 소지품이었다.

'이걸 보여주면··· 그래두 우리가 살아있다는 걸 믿어줄 거유.'

'그렇다고 경계를 완전히 풀지는 않을 테니까 조심허구.'

지금은 중앙 카페 역의 지하 상가에서 안전하게 장사하고 있는 헌터들이지만, 그들도 지하에서 나오지 못하고 고생하던 시기가 있었다.

류지우는 소지품을 받는 대가로 그들의 말소된 기록을 복구시키고 헌터 자격증도 정식으로 발급해주었다.

협회장에게는 알리지 않고 류지우가 독단으로 행한 일이었다.

이유안 사장을 만나고부터는 그런 일이 왕왕 생겼다.

이전에는 협회장과 한 몸처럼 움직이던 류지우였기에 자기 자신조차도 이런 변화가 낯설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야.'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리고 중앙 카페가 여러 사람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견고해진 마음이 그렇게 말했다.

류지우는 전국의 모든 헌터들을 위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협회장의 뜻과는 불합치하는 길이 되더라도.

굴의 끝에 닿았다.

이 뒤로는 지하의 잔해가 무너져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류지우는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누, 누구냐!"

불신과 불안, 경계와 의심이 싹튼 외침이었다.

류지우는 들고 온 손전등을 천장을 향하게 켜고 목소리에 대답했다.

"류지우입니다."

"류지우라면··· 협회 소속의···!"

"그건 맞습니다만, 지금은 협회 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지우가 반대쪽 손에 들고 있던 지하 헌터들의 소지품을 들어 보였다.

손전등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들은 집결지의 헌터들이 과거에 나눠 가졌던 금속 조각이었다.

하나의 커다란 철판에서 뜯어낸 금속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모두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빛을 만날 때까지.'

약속이자 염원 같은 문장이었다.

류지우는 지하 헌터들의 흔들리는 동공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이분들의 부탁으로 여러분을 찾아온 겁니다. 같이 나가시죠."

*

던전 공략을 마친 체험 학습단이 돌아왔다.

유안의 품에 안겨서 꿀 같은 낮잠을 자던 중앙이가 가장 먼저 사람들 기척을 눈치채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오늘의 체험 학습단 인솔교사는 차건오였다.

-크우으우?

"하나도 안 다쳤어. 자, 멀쩡하지?"

부하 1의 안부부터 물은 고대 포식자가 그 품으로 폴짝 달려들었다.

중앙이를 익숙하게 안은 차건오는 유안에게 던전 공략 보고를 했다.

"운이 좋았어요. 번개가 쳤거든요."

건오가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뜨끈뜨끈한 뿔소 우유를 꺼내 보여주었다.

중앙 카페의 텀블러와 일회용 잔을 여러 개 챙겨가길 잘했다.

"나도! 나한테는 고기 많이 있어!"

윤슬도 질 수 없다는 듯 인벤토리의 소고기를 꺼내 흔들었다.

아이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함께 출렁이는 마블링이 예술이었다.

"같이 레스토랑 내려가서 전해주고 올까?"

"응!"

"가자."

유안이 윤슬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근처의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자 점심 장사가 한창인 장다온의 레스토랑이 보였다.

"어, 윤슬이 왔어?"

"어이고, 윤슬이가 고기 가져왔어요?"

"예뻐라!"

홀에 있던 장다온의 제자들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윤슬의 머리를 순서대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히이··· 엄청 많이 가져왔는데!"

"잘했어, 잘했어!"

모두에게 칭찬받는 상황에 신난 어린이는 그 자리에서 인벤토리의 소고기를 전부 꺼냈다.

주방에서 꺼냈다면 정리가 더 쉬웠겠지만 어른들 모두 신난 어린이의 자랑을 막지 않았다.

"짱 많지!"

"응, 우리 윤슬이가 최고야. 제일 멋져."

"히······."

윤슬은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유안의 옆구리에 얼굴을 비볐다.

처음 만났을 때는 허벅지 중간쯤 왔던 아이가 벌써 이렇게 자랐다는 게 순간 실감났다.

"윤슬, 키 많이 컸네?"

"나는 성장기랬어! 그래서 금방 아저씨보다 더 커질 거야!"

"···진짜 그러겠는데."

이 속도라면 불가능은 없을 것 같았다.

유안은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는 아이의 성장 속도가 놀라웠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를 일이었다.

"윤슬이가 고기 갖다줬으니까 우리도 선물로 이거 줄게."

"우아! 이게 뭐야?"

"솔즈베리 스테이크라고 하는 건데, 먹어보고 맛있으면 또 해줄게."

"맛있을 거 같아! 아저씨, 그치?"

다짐육과 야채를 섞어 동그랗게 뭉친 뒤 구워낸 스테이크는 편식하는 아이들도 잘 먹을 수 있을 것처럼 생겼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 생각해서 음식 포장해 가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아예 포장해서 냉동식품 형태로 만들어 봤어요."

다온의 제자가 유안에게 덧붙여 설명했다.

하나하나 낱개 포장된 스테이크는 전자레인지에 몇 분만 돌리면 따끈따끈하게 먹을 수 있다.

동봉된 브라운 소스에 귀여운 중앙이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나 이거 저녁에 먹을래!"

"그래, 밥이랑 같이 먹자."

안 그래도 저녁 메뉴가 고민이었는데 일단 윤슬의 식사 걱정은 한술 덜었다.

유안은 기분이 좋아서 방방거리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카페 뒷마당에 들어서니 그사이 손님이 한 명 와 있었다.

"파트장님, 지금 근무 시간 아니십니까?"

이 시간에는 강남점 4층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일해야 할 사람이 떡하니 본점 뒷마당에 와 있었다.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게다가 사뭇 진지한 표정이기까지 했다.

유안은 일단 자신이 최근 삼 개월 내에 헌터적으로 잘못한 일이 있는지 되새겼다.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뭐지?'

유안은 궁금증을 가득 안고 류지우를 3층 사무실로 데려갔다.

괜찮겠습니까?

류지우는 평소와 다르게 말하기 전 길게 뜸을 들였다.

유안은 크게 재촉하지 않고 지우에게 마카롱을 건넸다.

방재이가 필링을 채워 넣은 것으로, 한 입에 넣기에는 버거울 정도의 크기였다.

그러나 류지우는 알록달록한 디저트를 보고도 웃기는커녕 계속해서 진지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보다 못한 유안이 먼저 물었다.

기다려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날이 새도록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계획이··· 좀 있습니다."

"저도 알아야 하는 계획인 겁니까?"

류지우가 자신의 계획에 동참해주기를 바라서 말을 꺼낸 것이라면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들어봐야 알겠지만 지우가 허튼 일을 꾸민 적은 없다.

그러니 중앙 카페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할 의향이 다분했다.

류지우는 마른 입술 사이로 한숨과 같은 목소리를 흘렸다.

도와달라는 내용의 말은 아니었다.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많이 놀라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불안하게 왜 그러십니까. 파트장님, 퇴직이라도 하세요?"

"비슷할 수도 있겠네요."

"예?"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농담으로 건넨 말인데 상대방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유안은 아주 오랜만에 심각한 수준으로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지금, 퇴직한다고 하셨습니까? 그러니까··· 협회 일을 그만두신다고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도 있죠."

"···무슨 일 말입니까. 아니, 그보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유안은 어질어질한 정신을 겨우 붙잡고 1층으로 내려갔다.

'업무 과중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아 보이기는 했는데 퇴사까지 고민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 협회의 얼굴 간판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 일을 관두면 어떻게 되는 거지? 헌협··· 망하는 건 아니겠지.'

백 바(Back bar)를 살피던 유안은 세 종류의 차를 꺼냈다.

모두 정신 안정과 피로 회복에 특화된 것들이었다.

자스민과 비슷한 향기가 나는 꽃잎차를 투명한 찻잔에 우리고 있자 방재이가 다가왔다.

"···사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해도 됩니다. 재이 씨는 쉬고 계시죠."

"······손이 떨리십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재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유안은 덩치만 컸을 뿐 여린 마음씨를 가진 방재이를 잘 다독여 돌려보내고 나머지 두 종류의 차도 마저 준비했다.

던전산 식물의 뿌리를 말려서 만든 차와 밀크티였다.

세 잔의 따끈한 차를 들고 올라온 유안은 그것들을 곧장 류지우의 앞에 주르륵 내려두었다.

"이거 다 마시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파트장님."

"···갑자기 차를요."

"예, 얼른 마시시죠."

류지우는 유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차를 리터 단위로 마셔도 지우의 계획과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지만, 일단 준비해온 사람의 성의가 있으니 한 잔씩 마시기 시작했다.

"향기가 좋네요."

"마음이 편해지고 피로가 풀리지 않습니까?"

"예, 그러게요."

"다시 생각해보니 퇴사는 역시 아닌 것 같죠?"

유안은 진심으로 헌터 협회가 건재하길 바랐다.

협회가 흔들리면 헌터들에게도 혼란이 찾아올 것이고, 그건 곧 중앙 카페의 매출에도 직격타를 날릴 수 있다!

헌터 협회의 든든한 1번 버팀목이라고 볼 수 있는 류지우가 계속 소처럼 일해줬으면 했다.

처음에는 중앙 카페와 사이가 별로였다지만, 요새는 게이트 근처에 건물을 세울 때도 허가를 잘 내주고 있는데··· 그런 류지우가 협회에서 빠지면 곤란했다.

중앙 카페에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이 류지우 파트장의 후임으로 들어올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말없이 두 번째 찻잔까지 비운 류지우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퇴사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있다면서요.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런데 무슨 일을 말하는 겁니까? 지금 파트장님이 맡고 계신 일은 강남 던전 관리가 제일 큰 거 아닙니까?"

"이건 사장님께 더 필요할 것 같네요."

류지우는 평소보다 말하는 속도가 배로 빨라진 유안에게 밀크티 잔을 건넸다.

테이블 위에 놓인 가나슈 마카롱을 집어 이유안의 손에 쥐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단 먹고, 차 다 마시면 말씀드릴게요. 진정 좀 하시고요."

"예."

유안은 지우가 요구한대로 커다란 마카롱을 한 입에 쑤셔넣고 뜨거운 밀크티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높은 당분과 온도에 혈관과 식도까지 사르르 녹는 맛이 아주 끝내줬다.

"···안 뜨거워요?"

류지우가 생수 한 병을 건넸다.

유안은 그걸 낚아채듯 받아서 원샷해버리고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뜸 그만 들이고 말 좀 하시죠, 파트장님. 기다리다 답답해서 죽겠습니다."

"강남역 지하도를 매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이 지하 헌터들의 집결지로 쓰였다고 하니까 혹시 몰라서요."

"예,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매일 조사하시는 것까지는 몰랐지만요."

드디어 본론이 나오자 유안은 뾰족한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류지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지하 헌터들이 아예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거라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그래도 집결지였던 곳을 한 번쯤은 다시 방문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헌터들이 생활했던 흔적 같은 건 그대로 뒀습니다. 발견했어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요."

"효과가 있었습니까?"

"처음 몇 주는 허탕만 쳤는데··· 오늘 드디어 무리 중 일부를 만나기는 했습니다. 지금 강남점의 임시 사무실에서 보호 중이에요."

"지하 헌터들을, 말입니까? 경계가 심했을 텐데요."

"이유안 사장님 덕분이었어요."

유안이 거둔 지하 헌터들의 금속 증표가 없었다면 큰 전투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런 탈 없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던 자초지종을 설명 들은 유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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