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37)

유안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대충 가리니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정체를 들키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혼자 알아서 구경하고 가겠습니다. 저 말고 다른 손님 챙겨주시죠.”

“사장님 뭐 사러 오셨는데요?”

직원이 소곤소곤 물었다.

유안은 아차 싶었다.

그냥 제일 구석에 있는 가게로 피신해 온 것이라 무언가 사려는 생각은 없었다.

하나 사실대로 말하면 직원이 무척 실망할 것 같았다.

결국 이유안은 근처를 둘러보다가 가장 눈에 띠는 가구를 말했다.

“책장··· 을 사러 왔습니다.”

“아! 사장님 애기 거 고르시는 거죠?”

“···예, 뭐.”

윤슬은 이니티움 길드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직원 역시 이윤슬 어린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경험이 몇 번 있었기에 밝게 알은체했다.

“낮은 책꽂이는 저쪽에 많이 있어요.”

“예···.”

유안은 안내를 거절했으나 직원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평범한 손님과 직원으로만 보여서 주변의 시선이 쏜살같이 따라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동화책 꽂으실 거면 이런 것도 괜찮아요. 말랑말랑한 재질이라서 윤슬이가 좋아할 거예요!”

직원은 칸칸이 알록달록한 책장을 소개했다.

가죽과 나무를 함께 써서 만든 가구는 놀랍도록 부드럽고 푹신했다.

뾰족한 모서리가 아니라서 윤슬과 중앙이가 함께 뛰어다니다 부딪혀도 다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이걸로 하겠습니다.”

“다른 거 더 안 보시고요?”

“이게 마음에 듭니다. 본점 뒷마당으로 보내주시죠.”

“네! 계산 바로 해드릴까요?”

그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정말 조용히 혼자서 구경하겠다는 유안의 말에 직원은 총총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금세 다른 상급 헌터 한 명에게 붙어서 가구를 소개하는 모습이 능숙해 보였다.

‘여기서 삼십 분 정도만 버티면 되겠지?’

유안은 헌터 협회장과 식사하던 류지우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접시에 남은 음식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삼십 분이라면 충분히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주말이 아니라 평일이라서 협회장도 협회로 돌아가 할 일이 많을 것이라 믿었다.

‘그나저나··· 장사 엄청 잘 되네.’

카페나 음식점보다 가격대가 훨씬 있는 편인데도 헌터들은 던전 부산물 가구를 망설임 없이 결제했다.

어떤 헌터는 이사를 준비하는지 가구를 종류별로 싹 구매하고 가기도 했다.

가구는 이니티움 길드의 생산 라인에서 만들어지는데, 이대로라면 공급보다 수요가 몇천 배는 커서 매장에 물건을 채워넣기 무섭게 팔려나갈 것 같았다.

오늘 새로 들여놓은 가구의 대부분에 벌써 ‘판매 완료’ 팻말이 붙었다.

“감사합니다, 손님! 또 오세요!”

“테이블 큰 거 내일 들어온다고 했죠?”

“네! 그런데 일찍 오셔야 물량이 남아있을 거예요.”

“여기 몇 시 오픈이죠?”

유안은 벽에 걸린 커튼 샘플을 만지작대며 손님과 직원의 대화를 들었다.

이 가구점도 며칠 뒤에는 오픈 시간 전부터 가게 앞으로 웨이팅 라인이 길게 늘어질 것이 쉽게 예상되었다.

중앙 카페 본점에도 한창 그런 시기가 있었으니 모두 한 번씩 거치는 관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유안이 바쁘게 돌아가는 가구점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볼 때였다.

가구점 입구에 또다시 눈에 띠는 두 사람의 조합이 보였다.

‘밥 다 먹었으면 카페나 협회로 갈 것이지 왜 가구점을 와!’

유안은 속으로 경악하며 급한 대로 커튼 뒤에 몸을 숨겼다.

발이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조금 늦었나 보구나. 거의 다 매진이네.”

“필요한 가구 말씀해주시면 제가 내일이라도 구매해서 협회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급한 건 아니라서 괜찮아. 구경이나 하고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예, 협회장님.”

이유안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로 협회장의 목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커튼에 숨어서 십 분 정도 기다리자 협회장과 류지우가 작별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협회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지우야, 너 면허도 없잖니.”

“······4층에 팀원들 있습니다.”

“내가 가면 괜히 불편할 뿐이지. 괜찮으니 이만 올라가렴.”

다행스럽게도 나효숙과 류지우는 여기서 파할 생각인 것 같았다.

협회장의 발걸음이 확실하게 멀어지자 유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커튼 뒤에서 빠져나오려 꾸물거리는데···

“이유안 사장님?”

류지우가 커튼 앞에 서 있었다.

지우의 옆으로는 가게 직원들도 함께였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유안의 기행에 감히 말조차 얹지 못했다.

“아니, 이건, 그게··· 커튼이 부드러워 보여서 말입니다.”

유안은 스물여섯 먹고 가구점 커튼 뒤에 숨었던 이유를 꾸역꾸역 설명했다.

*

유안은 얼룩 상어의 기포를 빵빵하게 넣은 얼음물을 연달아 세 잔 들이켰다.

그렇게 해도 얼굴의 화끈거림이 완전히 식지는 않았다.

“협회장과 마주치기 싫어서 숨어 있었던 겁니다. 진짭니다.”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쳐다보셨잖아요.”

“우리 둘밖에 없는데 그럼 땅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류지우는 유안이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은근히 놀리는 듯 굴었다.

빙글빙글 웃는 모습에서 서정원이나 기청해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이유안은 얼음을 까득까득 잘게 씹어 삼켰다.

“이제 안 오실 거니까 걱정 마세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레스토랑이나 가구점이 꽤 마음에 든 눈치던데.”

“제가 협회장님 성격을 압니다. 한 번 방문한 곳에 다시 걸음하는 일은 잘 없어요. 업무상의 일이라면 모를까.”

“이 건물에 헌터 협회 던전 관리 파트도 있습니다만.”

업무상 방문하기 딱 좋은 환경 아닌가.

유안은 오늘처럼 지뢰를 밟은 기분으로 나효숙을 또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류지우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살 저었다.

“안 오실 겁니다. 이유안 사장님이 커튼 뒤에 숨을 일, 다시는 없게 할 테니 걱정 마세요.”

“······.”

역시 놀리는 게 맞았다.

유안은 지우를 있는 힘껏 노려보며 얼음물을 리필했다.

“류지우 파트장님, 일하러 안 가십니까?”

“사장님은 계속 여기 계실 건가요?”

“예. 본점은 서정원 씨에게 맡겨뒀으니 오후에는 강남점에 있을 겁니다.”

제대로 확인한 건 1층 카페와 3층 가구점밖에 없으니 다른 매장들도 싹 돌며 특별한 이슈가 없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유안의 대답을 들은 지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사무실에 가보겠습니다. 저녁에 같이 퇴근해요.”

“···예, 수고하십시오.”

얼떨결에 함께 퇴근하기로 약속이 잡히기는 했지만 유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도 카페 마감 시간에 맞춰 돌아갈 생각이고, 류지우의 퇴근 시간도 그와 비슷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오늘 점심을 직장 상사와 함께하는 고통을 겪은 사람이니 중앙 카페 본점으로 데려가서 맛있는 저녁을 대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녁 커리랬지. 여럿이서 먹기 딱 좋은 메뉴네.’

남은 얼음물을 싹 비운 이유안도 강남점 순회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류지우 파트장님 팀원 분들까지 데려와도 돼요, 사장님. 오늘 밥을 좀 많이 했거든요.]

마감 시간쯤 되자 서정원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유안은 류지우를 데려가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본점 매니저는 손이 무척 컸다.

함께 보내온 사진에는 한 솥 가득 보글보글 끓고 있는 커리가 있었다.

‘뭘 얼마나 만든 거야.’

이건 도저히 중앙 카페 직원들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분량이었다.

성장기 어린이가 아무리 다섯 그릇씩 해치운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이유안은 4층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나온 협회 직원이 곧바로 류지우를 불러주었다.

“파트장님, 팀원 분들도 저녁 아직이면 다같이 본점으로 갑시다.”

“예? 갑자기요?”

“직원들이 오라고 합니다.”

유안은 헌터 디바이스의 커리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 일단 시간 되는 팀원들 모아보겠습니다.”

“예, 1층에서 봅시다.”

강남점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류지우가 팀원 전원을 우르르 데리고 내려왔다.

“중앙 카페 음식 먹을 기회인데 빠질 수는 없죠!”

팀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렇게 말했다.

유안은 몇 명 정도 데리고 오냐는 서정원의 문자에 팀원들 숫자를 세어본 뒤 답장했다.

이유안과 류지우의 뒤로 길게 이어진 행렬이 중앙 카페 본점에 도착했다.

중간에 이탈하는 사람 하나 없어서 마감 후의 카페 뒷마당이 꽉 찼다.

“아저씨 친구들이야?”

윤슬이 유안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물었다.

“내 친구들 아니고 파트장님 친구들.”

“우아··· 파트장님도 친구 많아?”

“그런가 봐.”

“맨날 혼자 와서 친구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이윤슬은 조금 의외라는 눈빛으로 류지우 쪽을 보았다.

어린이의 팩트 폭격에 지우가 주춤했다.

윤슬은 그 모습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오늘 한 일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나 오늘 받아쓰기 백 점 맞았어!”

“잘했네, 윤슬.”

“그래서 선생님이 선물도 줬는데··· 이거!”

“중앙이 모양 풍선이구나. 귀엽다.”

김주현이 중앙 열차 홍보용으로 만든 것을 강해민의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해민은 받아쓰기 백 점 맞은 천재 어린이를 위해 풍선을 열심히 불어서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내가 파밍한 재료로 만들었어!”

윤슬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유안은 아예 윤슬을 무릎에 앉히고 이야기를 경청했다.

메인 메뉴가 시금치 크림 커리라서 윤슬이 파밍한 던전산 시금치를 썼다고 한다.

“시금치는 맛 없는데 커리는 맛있어. 신기하지?”

“응, 신기하네.”

“내가 파밍한 걸로 만들었으니까 아저씨도 다섯 그릇 먹어야 해!”

“그래, 노력해 볼게.”

이유안은 아이의 말에 대꾸하며 테이블 위에 차려지기 시작한 음식들을 보았다.

은은한 녹색 커리 위로 달콤한 크림이 듬뿍 뿌려져 있었다.

홍소라가 구운 난도 있어서 찍어 먹기 좋을 것 같았다.

유안은 윤슬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여 배를 채웠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마저 평화로운 저녁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유안의 테이블 근처에 협회 직원들이 모인 대형 테이블이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지 않으려고 해도 바로 옆이라서 말소리가 다 들렸다.

“협회장이 또 파트장님 엄청 괴롭히고 갔죠!”

“아닙니다. 식사만 하고 가셨어요.”

“으휴,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제가 커피 사러 내려오는 길에 가구점 뺑이 도는 거 다 봤는데! 협회장 그건 왜 자꾸 우리 파트장님만 못 살게 군대요?"

"저는 괜찮습니다."

"차라리 파트장님이 협회장 했으면 좋겠어요. 진짜로."

"지금 이 자리가 좋습니다."

류지우는 계속 괜찮다고 했지만 던전 관리 파트의 팀원들이 화를 참지 못했다.

유안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거리며 팀원들의 분노에 공감했다.

'정말 맞는 말만 하잖아.'

이유안은 입안에서 달큰하게 퍼지는 커리 맛을 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싫어하는 사람 욕을 다른 사람 입에서 들으니 짜릿한 쾌감이 느껴진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마저 그려졌다.

"아저씨 왜 고개 끄덕끄덕 해?"

"윤슬이가 파밍한 걸로 만들어서 그런지 더 맛있는 거 같아서."

"히이··· 그치! 많이 먹어!"

"응, 윤슬이도."

유안은 윤슬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배경음처럼 깔리는 협회장 욕을 집중 감상했다.

매니저

본점과 강남점을 오가는 것은 유안만이 아니었다.

중앙 카페 본점의 직원들도 각자의 이유로 종종 강남점을 방문하고는 했다.

오늘은 홍소라가 유안과 함께였다.

"마, 마나 차는 속도가··· 예전보다 훨씬 빨라졌어요···!"

"좋은 일입니다. 협회에서 등급 재측정은 해 보셨나요?"

"아··· 등급은 그대로예요······."

마나 저항력을 비롯해 여러 항목을 재측정했지만 여전히 평균 F급의 범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홍소라에게는 그마저도 감지덕지인 일이니 별 불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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