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37)

'어디서 약을 팔려고 해.'

아플 때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유안은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 류지우가 아주 괘씸했다!

2호점의 조건

"그렇게 나쁜 조건은 아닐 겁니다. 얘기 좀 들어보시죠."

류지우는 3층에서 뒷마당으로 향하는 이유안의 뒤를 졸졸 쫓아가며 계속 제안했다.

유안은 걸음을 더 빠르게 하고 철저하게 무시할 뿐이었다.

뒷마당에 도착하자 중앙이가 우다다 돌진했다.

제법 묵직해진 이중앙을 안아든 유안이 제 지정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수십 번은 한 말을 반복했다.

"싫습니다."

"협회의 간섭은 없을 겁니다. 계약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고, 저도 따로 약속할게요."

"아무리 간섭이 없어도 손님들이 불안해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다른 부서가 아니라 던전 관리 파트라서 대중의 평판이 그나마 괜찮기는 했다.

이번에 부산에서 류지우가 이유안을 구해준 것으로 기사가 크게 나 한창 추앙받는 중이기도 하고.

헌터 협회의 영웅이 유안의 앞에 서서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지내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곳에서 지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강남 던전 기초 분석이 마무리되면 바로 협회에 돌아갈 거예요."

"···기초 분석이 얼마나 걸리는 작업입니까?"

유안이 드디어 한 발 물러서자 지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오래 안 걸려요. 헌협의 기술도 많이 발달해서 요새는 세 달 안에 해결되기도 합니다. B급 던전이니 그보다 적게 걸릴 수도 있고요. 저와 제 팀원들이 협회로 떠나면 비게 될 4층과 5층은 이유안 사장님께 드리겠습니다. 이건 협회장님과 대화도 끝난 부분이에요."

건설 비용은 협회에서 전부 부담하고 3개월만 사용수익한 후에 소유권을 넘겨준다니.

앞선 리스크를 생각하더라도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던 유안은 빙긋 웃으며 류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 달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류지우 파트장님."

"하··· 저도 잘 부탁합니다."

지우는 유안의 손을 맞잡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뒷마당에서 공부 중이던 이윤슬과 강해민이 두 사람을 흘깃거렸다.

테이블 위에는 어지럽게 공책과 필기도구가 늘어져 있었다.

"아저씨, 술래잡기는 다 끝났어?"

3층부터 뒷마당까지 쫓고 쫓기는 광경이 어린이의 눈에는 단순한 놀이로 보인 것 같았다.

유안은 류지우에게 건강 주스를 건네며 대답했다.

"응, 다 끝났어."

"누가 이겼어?"

"글쎄. 무승부 아닐까."

"···잘 마시겠습니다."

협상에 실패할까 봐 목이 탔던 류지우는 시큼텁텁한 맛의 주스를 원샷했다.

주스의 맛을 알고 있는 유안이 입가심하란 의미로 견과류 토피를 건넸다.

윤슬의 간식 만들기에 재미를 붙인 서정원이 건강과 맛을 모두 생각해 재료를 고심해서 만든 사탕이었다.

바삭거리고 오독오독 씹히는 식감이 좋아서 유안도 종종 찾는 주전부리였다.

"포장된 것도 있습니다. 좀 드릴까요?"

"···팀원들이 좋아하겠군요."

"그건 파트장님 드시고, 팀원 분들 건 따로 챙겨드리겠습니다."

서정원은 손이 큰 편이라 한 번 만들 때 대량생산을 했다.

매일 새로운 간식이 뭉텅이로 쌓이는 형국이었으니 여기저기 퍼주고 다녀도 남는다.

유안은 지우에게 사탕과 초콜릿을 넉넉히 챙겨주었다.

"다음에는 강남 건물에서 뵙겠습니다."

"···네, 그러죠."

목적을 달성한 류지우는 중앙 카페에서 쫓겨나듯 떠났다.

유안은 항상 바쁜 지우를 나름대로 배려해서 바로 보내준 것이었으나 배려 받은 당사자의 얼굴에는 아쉬운 빛이 돌았다.

유안은 지우를 배웅하고 뒷마당으로 돌아와서 강해민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윤슬의 연필 잡는 자세를 교정해주던 해민은 옆얼굴이 따가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이유안의 초롱초롱한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강해민은 저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만 나오는 표정이다.

"···뭐, 왜."

"해민아."

"하···, 또 뭐냐."

"5층 건물 올리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건설을 최대한 빨리 끝내달라는 압박이었다.

던전 부산물을 이용한 건설에는 도가 텄을 강해민이니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도면 나왔으니까 반은 완성한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아?"

"네가 하는 거 아니라고 쉽게 말한다."

"쉬운 거 맞잖아, 해민아. 훨씬 복잡한 지하 정리도 금방 끝냈으면서."

"······지하 상가 지을 때 가공해둔 재료 많이 남았어. 그거 쓰면 얼마 안 걸릴 거다."

해민은 툴툴대면서도 결국 유안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2주 내로 끝내보겠다는 확답을 받은 유안이 만족하고 해민에게 과일을 갖다주었다.

유안이 직접 깎으려고 노력한 과일이라 모양새는 별로였지만 맛은 훌륭했다.

*

강남 던전, [늑대 숲의 미로] 던전 게이트 앞에 2호점을 짓는 일은 큰 어려움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다들 빠릿빠릿하게 움직인 덕에 일정이 딜레이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히려 예정보다 며칠 빠르게 완공될 것 같다는 소식에 유안은 바쁘게 2호점 직원 면접을 준비했다.

"이, 이번에는··· S급도 지원했어요. 뭐, 뭐하는 사람이지···."

"S급 헌터라면 길드에 들어가 있거나 길드장일 확률이 높은데요."

"그러니까요! 어, 사실 A급인 정원 씨도 던전 안 들어가고 카페에서 일하는 중이니까 할 말은 없지만요!"

"······S급 프리 헌터는 몇 없는 걸로 압니다."

이력서를 확인하던 유안은 눈에 띠는 몇몇 사람을 눈여겨 보았다.

문제의 S급 헌터는 경력이나 소속도 적어두지 않은 채 이름 석 자와 헌터 등급만 달랑 적힌 이력서를 제출했다.

유안은 가차 없이 그 S급 이력서를 서류 탈락시켰다.

"굳이 상급 헌터를 뽑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점의 직원들도 거의 하급이고, 지하에는 비각성자도 많다.

그들만으로도 멀쩡하게 잘 굴러가고 있으니 강남점에도 상급 헌터가 필수는 아니었다.

유안은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보이는 사람들 위주로 이력서를 추리며 S급 지원자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지워버렸다.

면접까지 순조롭게 진행하고 나니 이제는 정말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유안의 눈앞에 들이닥쳤다.

"지하 상가나 이니티움 길드 건물 지을 때는 매일 드나들더니 이번에는 뭐냐? 왜 한 번을 안 와."

"음, 해민이 너를 믿으니까. 내가 꼭 확인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겠지 싶어서."

"···아무리 그래도 건물주가 너무 관심 없는 건 안 좋아. 이제 마무리 단계라서 안전하게 위층도 볼 수도 있으니까 한 번 와라."

"으음······."

유안은 침음하며 망설였다.

해민의 말이 백 번 옳았지만, 강남 던전 게이트 근처까지 갔을 때 자신이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죽음을 경험한 던전이다.

던전 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안전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정신에 깊게 새겨진 공포 탓에 몸이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극복하기는 해야지.'

계속 이렇게 회피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유안은 바싹바싹 마르는 입을 따끈한 밀크티로 조금 축이고 결단을 내렸다.

"오늘 점심에 갈게."

부서질 때 부서지더라도 일단은 부딪혀 보자.

그렇게 결정한 유안은 해민을 비롯한 인부들을 위한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도와드릴게요, 사장님."

냉장고에 있던 요리를 도시락 통에 모양 좋게 옮겨 담는 작업일 뿐이지만, 그 양이 많아서 시간이 꽤 걸렸다.

서정원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오전 중으로 끝내지 못했을 것 같다.

유안은 점심 도시락을 인벤토리에 넣고 정원에게 제안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어차피 브레이크 타임이랑 겹치니까 그렇게 할까요?"

"예. 정원 씨가 있으면 좀 더 안심입니다."

"네, 사장님."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한다니 마음이 놓였다.

유안은 내친 김에 류지우도 강남 던전 게이트 앞으로 불렀다.

공무원의 점심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지만 지우가 괜찮다고 했으니 정말 괜찮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또 부를 사람 없을까.'

주변의 상급 헌터들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유안은 그냥 일괄적으로 연락을 넣었다.

강남 던전으로 오겠다는 헌터가 많아질수록 이유안 손의 떨림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

중앙 카페 본점과 가장 가까운 대형 길드는 수창이었다.

그리고 이번 강남점과는 새로 길드가 가까워서 길드장인 차건오도 건물을 구경하러 나왔다.

"길드원들이 좋아했어요. 가까운 곳에 생겼으니 매일 다닐 거라던데요."

"건오 씨도 자주 오시죠."

"저는 뭐··· 중앙이 때문에라도 본점을 방문하지 않을까요?"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손님으로 오기만 하면 된다.

차건오는 중앙 카페와 친하면서도 단골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지점에 있었다.

길드 일을 처리하느라 늘 바빠서 한 달에 두어 번 방문하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바쁜 부하 1을 기다리느라 이중앙만 늘 애가 닳았다.

"건오 씨는 길드장이면서 너무 성실합니다. 수창 길드장의 반만 닮아보세요."

수창 길드가 길드장이 부재하더라도 매끄럽게 굴러갈 수 있는 형태의 조직이라면 새로 길드는 정반대였다.

길드장인 차건오를 가장 중심에 두었을 때 비로소 완성되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뭐."

게다가 차건오 본인도 자신이 과로하는 것을 기꺼이 여기는 편이라서 그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유안은 건오가 지금보다 여유를 찾았으면 싶어서 그 부분이 늘 아쉬웠다.

"그런데 오늘따라··· 제 옆에 오래 계시네요."

강남 던전 게이트 근처로 가는 길에 보라색 핵을 징검다리처럼 박아두었다.

은은한 조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따라 걷는 동안 유안은 차건오에게 찰싹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여기서 제일 등급 높은 사람이 차건오이기 때문이었다.

"추워서요."

그러나 진실을 밝힐 수 없으니 이유안은 대충 둘러댔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했으니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차건오는 유안의 등급을 떠올리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했다.

이유안은 E급 헌터인 덕분에 차건오의 겉옷을 받아 걸치며 그저 추위 많이 타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많이 추우세요, 사장님? 몸도 떨리고 있어요."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서정원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스킬 써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차건오의 겉옷에 서정원의 화염계 스킬까지 더해지니 금세 훈기가 감돌았다.

떨림의 원인이 추위 때문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따뜻해서 그런지 유안도 쿵쾅대던 심장을 조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 저기 보이네요."

차건오가 손가락으로 정면의 가건물을 가리켰다.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킨 채 걷던 이유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본점처럼 은은하게 보라색이 감도는 건물은 살짝 굴곡진 형태로 지어져 어딘가의 문화 유산을 보는 것 같았다.

카페뿐 아니라 이것저것 많이 입점시킬 생각으로 크게 지어달라고 해서 건물의 너비가 본점의 세 배 규모를 넘어섰다.

층고도 높아서 압도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던전 제한 구역 허허벌판에 건물이 있는 모습은 여러 번 봐도 신기하네요."

"······예."

차건오의 감탄에 유안은 간신히 대답했다.

건물 뒤쪽으로 [늑대 숲의 미로] 던전 게이트가 일렁이고 있었다.

유안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그쪽으로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자꾸 늑대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사지를 물어뜯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까드득 뼈가 씹히는 소리와 쩝쩝대며 피와 살을 맛보던 푸른 혓바닥.

기억 저편에 억지로 매장해둔 것들이 기어나와 유안의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하아······."

거칠어지는 호흡을 더는 숨길 수 없었다.

'건물 내부도 봐야 하는데. 이번에 에스컬레이터도 만들었다고 해서··· 그거 안전한지 확인을······.'

한밤중에 불을 껐다 켰다 반복하는 것처럼 시야가 암전되었다 원상태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유안은 양옆의 차건오와 서정원의 팔을 힘껏 붙잡고 버텨보려고 했다.

차건오의 겉옷은 따뜻하고 서정원의 스킬 역시 다정하다.

그러니 쓰러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유안의 몸과 마음 전부를 짓누르는 트라우마의 흔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사장님!"

"이유안!"

걱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E급 헌터의 몸이 축 늘어졌다.

병문안

'건강검진 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유안은 종합 검진을 받기 위해 대학 병원에 끌려온 상태였다.

강남점을 확인하러 가다가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응급실이었다.

"진짜 괜찮습니다. 이제 멀쩡해요."

"네, 사장님."

중앙 카페 대표로 보호자가 된 서정원이 이유안의 의사표명을 부드럽게 무시했다.

"얼마 전에 검진 받았습니다. 아무 이상 없었어요."

"네, 사장님."

"···정원 씨, 제 말 듣고는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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