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37)

아이의 감정이 행동에서 모두 드러나는 모습이 귀여웠다.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윤슬은 유안의 손을 잡고 미용실 밖으로 나왔다.

슬슬 점심 시간대라 지하도에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중앙이를 닮은 열차에서도 승객들이 우르르 하차했다.

그 중에 남들보다 키가 훨씬 커서 눈에 띠는 사람이 있었다.

"우아! 저 사람 머리 파란색이야!"

윤슬도 푸르스름한 머리칼의 주인공을 발견하고 신나게 외쳤다.

작은 손가락 끝을 따라가니 처음 만나는 얼굴이 보였다.

'근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유안은 서늘해지는 뒷목을 매만지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바닷바람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확인 작업

유안은 허공에서 마주친 눈을 애써 피했으나 소용 없는 짓이었다.

푸른 바다를 닮은 불청객이 유안과 윤슬 쪽으로 거침없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른 볼일 있어서 온 거겠지. 내 뒤에 아는 사람 있겠지.'

이유안이 행복회로를 가동했지만 애석하게도 불청객의 걸음은 유안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안녕."

제주에서 봤을 때와 다르게 얼굴이 흐릿하지 않았다.

시시각각 생김새가 변하지도 않았고, 키나 몸집도 그대로였다.

이 모습 역시 진짜는 아닐 확률이 높았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이 봐줄 만한 얼굴이기는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소리가 똑같았다!

단조롭고 부드러운 느낌의 인사말이 빼도 박도 못하게 비조 길드장의 목소리라 유안은 하는 수 없이 아는 체를 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카페에 꼭 용건이 있어야만 오는 건 아니잖아."

"한가하신가 봅니다."

"요즘은 다소 그런 편이지."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대화가 팅팅 이어지자 윤슬은 고개를 왔다갔다 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결론을 내렸다.

"아저씨 친구구나!"

"윤슬, 그런 거 아니야."

"친구 많아서 좋겠다아···."

윤슬은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은 또래 친구가 하나도 없는데 유안을 보면 주변에 비슷한 나이대의 어른들이 많았다.

중앙 카페 사람들만 해도 한가득이었다.

게다가 그들 모두 유안을 진심으로 아끼는 게 느껴졌으니 그것이야말로 진짜 우정일 거라고 어린이는 학습했다.

언젠가 자신도 친한 친구를 가지고 싶었다.

윤슬의 눈동자에서 반짝반짝 동경의 광선이 뿜어져 나오니 유안은 더 부정하기도 뭐했다.

'그냥 대충··· 친구인 걸로 치고······ 넘어가자.'

께름칙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지만 중앙 카페의 손님으로 온 것이라면 못 받아줄 것도 없었다.

유안은 출구 계단 쪽으로 걸어가며 손짓했다.

"중앙 카페는 저쪽입니다. 가시죠."

"위치는 알고 있지만 에스코트는 거절하지 않을게."

"···조용히 따라오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친구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유안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워낙 큰 키라서 이유안의 몸 위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궁금한 것도 많고."

그리고 귓가에 속살거렸다.

이유안은 온몸에 소름이 끼쳐 상대방를 거칠게 밀어냈다.

다행히 순순히 밀려주었으나 밀어낸 쪽의 손목이 조금 시큰거렸다.

"이유안 사장도 나한테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저는 비조 길드장님한테 궁금한 거 없습니다."

"친구 사이에 이름도 모르면서."

"······우리 친구 아니지 않습니까."

윤슬의 반짝 광선에 휘말려 어영부영 넘어갔던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질 생각인 것 같았다.

유안의 뒤에 딱 붙어서 따라오며 궁금하지도 않은 제 이름을 읊어주었다.

"기청해. 다른 사람에게 이름을 알리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그럼 저도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기왕 알려준 거니까 자주 불러줬으면 좋겠어."

"······."

유안은 윤슬을 번쩍 안아들고 걸음을 빠르게 했다.

"우아! 아저씨 짱 빨라!"

"윤슬, 내 목 꽉 잡아."

"웅!"

지하철 계단에서부터 카페까지 전력질주하니 기청해를 간신히 따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 카페 담벼락 근처에서 또다른 복병을 만났다.

"나의 뮤즈! 우리의 길이 엇갈렸나 보오!"

유안은 제 앞에서 서른다섯 번째로 무릎을 꿇는 휴멜 대표 디자이너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오늘 운이 텄나.'

이유안은 디자이너가 건네는 노란색 프리지아 꽃다발을 한 손으로 받았다.

꽃다발을 어디서 사 오는 줄 알았는데 던전에서 직접 파밍한 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받아주고는 있었다.

받은 꽃은 카페에 며칠 장식하다가 때가 되면 서정원이 바싹 말려주었다.

그리고 그걸 다시 예쁜 유리병에 넣어 홍소라가 카페 곳곳에 전시했다.

"가게는 어떻게 하고 여기까지 올라오셨습니까."

"잠시 직원들에게 맡기고 나왔소! 뮤즈에게 줄 것이 있어서!"

"흰색 옷은 안 입는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흰색이 아니오!"

지난번 다른 옷도 아니고 헌터용 전투복을 온통 새하얗게 만들어 와서 기겁한 경험이 있었다.

던전에 들어가지 않고 일상 생활만 해도 하루도 안 가 더러워질 게 분명한 옷이었다.

그래도 선물 받은 맞춤복을 버릴 수는 없었으니 지금도 흰색 전투복은 유안의 인벤토리 한쪽 구석에서 고이 잠들어 있었다.

"이걸 입어주시오, 나의 뮤즈!"

"······."

"뮤즈의 얼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하얀색이지만, 이렇게 달콤한 색도 괜찮을 것 같아 준비했다오. 생각보다 더 아름다워!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소!"

가벼운 재킷과 바지는 솜사탕 색이었다.

연하늘과 연분홍이 딱 절반의 비율로 섞인 옷을 보니 유안은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그간 얼토당토 않는 옷 선물을 잔뜩 받으며 학습한 것이 있었다.

이럴 때는 그냥 받아주고 돌려보내는 게 가장 빠르다.

"잘 입겠습니다. 손님 많아서 바쁘실 텐데 얼른 가게로 돌아가시죠."

"내 뮤즈는 배려심이 깊기도 하지!"

"이따 저녁 먹으러 오세요."

"오! 좋소, 좋소!"

마음 먹고 구매하려면 어마어마한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휴멜의 맞춤복을 받았으니 식사 대접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포장된 간식거리 몇 개를 꺼내 디자이너에게 건넸다.

성수라도 받듯 경건하게 간식을 챙긴 디자이너는 다시 가게를 관리하러 지하로 내려갔다.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청해가 입을 열었다.

"그사이 또 사람이 늘었나 봐."

"안으로 들어갑시다."

"나는 몇 번째야?"

"조용히 하시고요."

유안은 마음 속으로 '손님한테 욕 하면 안 된다' 염불을 외며 기청해를 카페 안으로 데려갔다.

1층 홀에 들어서는 순간 그 공간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따갑게 쏟아졌다.

*

"사장님 친구 중에 저런 분도 있었어요? 진작 데려오시지!"

"사, 사진··· 헌터그램에 올려도 되는지 물어봐 주세요···!"

"친구 아닙니다. 헌터그램 업로드 안 됩니다. 찍은 사진도 지우세요."

"친구 아닌데 왜 사장님만 쳐다보고 있어요?"

"저, 저분이 찍어달라고 하신 건데요······."

기청해는 사람들 시선을 지나치게 끄는 면이 있어서 뒷마당으로 옮겨 두었더니 이번에는 카페 직원들이 난리였다.

아직 저 사람이 비조 길드장인 것도 밝히지 못한 유안으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현상이었다.

"윤슬아, 선생님 오실 시간이에요."

그래도 서정원은 이 난리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했다.

어린이의 가정학습 시간이 되자 뒷마당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자고로 공부할 때는 주변이 조용해야 한다.

"뭐야. 왜 다들 모여있어요? 브레이크 타임도 아닌데."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한 가정교사는 뒷마당에 와글와글 모인 인파를 보고 놀랐다.

유안은 강해민에게 설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뒷마당 소파 위로 몸을 늘어뜨렸다.

"오늘도 잘 부탁한다, 해민아."

"어··· 그래."

"윤슬, 너도 선생님 말 잘 듣고."

"나는 맨날맨날 말 잘 듣는데? 선생님도 나처럼 착한 학생은 본 적 없다고 했어!"

유안은 당당하게 외치는 윤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중앙 카페 직원들은 각자의 할일을 찾아 해산했지만 뒷마당의 유안은 도저히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기청해는 윤슬의 가정학습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짙푸른 색감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감정을 담은 채 윤슬과 해민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느낌이 별로지.'

기청해를 그냥 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비조 길드 지하에서 보았던 광경이 언뜻 떠오를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잠시 고민하던 유안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청해 씨."

"얼마나 기다려야 불러줄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빨라."

"이제 장난은 그만 하시고 진짜 목적이 뭔지 말씀하시죠."

기청해의 테이블 위에는 홍소라가 직접 서빙해준 크루아상 다섯 종류가 있었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기본 크루아상은 조금 썰어서 먹었으나 생크림, 초콜릿, 레드 잼, 펠덤 스프레드가 발린 크루아상들은 손도 대지 않았다.

음료도 종류별로 시켜서 전시하듯 올려뒀을 뿐 에스프레소를 제외하고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진짜 목적이라···."

기청해가 룽고 잔을 일정한 간격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끝을 늘였다.

성질 급한 민족으로서 두고 볼 수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일단 사무실로 올라가서 얘기합시다. 여기 있는 건 안 먹을 거죠? 치우라고 하겠습니다."

"아니, 포장해줬으면 좋겠는데."

"···예, 알겠습니다."

"역시 사장이 친절하다는 평가는 사실이었어."

칭찬을 받았으나 썩 즐겁지는 않았다.

유안은 서정원과 함께 테이블 위의 모든 음식을 포장하여 기청해에게 건넸다.

인벤토리에 통째로 넣을 수 있어서 번거롭지는 않았다.

이유안은 기청해를 데리고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여태까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방문했으면서 오늘 갑자기 티를 내는 건··· 뭔가 이유가 있기는 할 거야.'

자신이 비조 길드장이라는 걸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오늘 보여준 기청해의 태도를 곱씹어보면 누군가 물어봤을 때 가감 없이 대답해줄 것 같았다.

평소 대중에 알려지기를 극도로 꺼려하던 비조 길드장의 모습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설마 비조 길드장인 척하는 사람은 아니겠지.'

합리적인 의심이 쌓인 유안은 3층 계단을 오르다 말고 휙 뒤를 돌았다.

이유안이 서너 계단 위쪽에 있었기에 얼추 눈높이가 맞았다.

"기청해 씨."

"너무 적극적인데."

"비조 길드장님 맞으십니까?"

"이유안 사장이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게 맞는 거겠지."

"말장난 하려고 물어본 거 아닙니다."

목소리나 말투가 똑같아서 의심을 전혀 하지 못했다.

유안은 몇 계단 더 올라가 기청해와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눈초리를 매섭게 곤두세우며 말했다.

"믿기 힘듭니다. 기청해 씨가 비조 길드장인 걸 증명하시죠."

"곤란한데."

"헌터 디바이스를 보여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곤란하다는 말이었어."

"···스킬은 안 보겠습니다."

유안이 약속했지만 기청해는 끝끝내 품에서 디바이스를 꺼내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행동의 연속에 의심의 골은 깊어만 갔다.

*

"일단 근력은 저보다 센 게 확실한 것 같아요, 사장님."

팔씨름부터 시작해서 할 수 있는 힘겨루기는 모두 끝낸 서정원이 말했다.

기청해는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며 자신이 S급인 것을 증명해냈다.

"그, 그렇지만··· 대한민국에 S급이 몇 명인데요···! 아직 믿기는 일러요!"

중앙 카페 극소수의 직원들에게만 기청해가 비조 길드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시험해보는 중이었다.

홍소라는 기청해의 진짜 정체가 궁금하다기보다는 상황 자체가 재미있어서 유안을 계속 부추겼다.

'맞아, 근력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 A급 헌터도 스킬이나 아이템을 쓰면 일시적으로 근력을 높일 수도 있으니까 바로 S급이라 단정짓기는 일러.'

유안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

기청해는 그런 유안을 향해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다음 종목은 뭐지?"

재미있는 것을 좇는 눈빛과 화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유안은 기다렸다는 듯 김주현을 불렀다.

"주현 씨, 부탁드린 건 준비 됐습니까?"

"네! 이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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