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37)

참다 못한 유안이 대놓고 말하자 비조 길드장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러나 깊은 미소 밖으로 나온 말은 긍정의 표현이 아니었다.

"첫만남에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인걸."

곤란함을 가장한 목소리가 가증스러웠다.

유안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인벤토리에서 곰인형을 꺼냈다.

"그럼 이걸로 얼굴이라도 가리고 있으시죠. 보고 있기 힘듭니다."

"너무한데."

그래도 비조 길드장의 얼굴이 커다란 인형으로 가려지기는 했다.

울렁울렁 움직이던 시야가 안정되니 유안의 속도 조금 나아졌다.

지독한 배멀미를 겪은 기분이었다.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나 부탁드립니다. 인형 내리지 마시고요."

"용건이 그것뿐이라니 아쉽지만."

곰인형을 품에 안은 비조 길드장이 앞장섰다.

유안은 그 뒤를 따르며 국내 3대 길드에 대한 생각을 했다.

'어쩐지 수창과 새로 길드장이 상식인이더라. 사람 셋 모이면 한 명은 이상하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유안은 비조 길드 건물에서 볼일만 얼른 보고 빠져나가고 싶었다.

불청객

부산에서 붙잡은 헌터들은 최상층이 아닌 최하층에 있었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

'건물을 어떻게 지었는지 파도 소리가 바로 들리네.'

유안은 벽에 금이라도 가는 순간 침수되기는 식은 죽 먹기일 거라 생각하며 비조 길드장의 뒤를 계속 따랐다.

지하 깊숙한 곳으로 끊임없이 들어가고 있었다.

'인형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그런가? 뒷모습은 변화가 없네.'

다행인 건 비조 길드장의 모습이 더는 오락가락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에 따라 유안의 멀미도 슬슬 멎어갔다.

으슥한 지하의 끝에 두꺼운 철문이 보였다.

비조 길드장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은 여전히 인형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유안은 어쩐지 길드장이 지금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데려온 건 이유안 사장이 처음이야."

"문이나 열어주십시오."

"감상은 어떤가?"

"꽁꽁 숨겨도 두셨네요."

유안은 대충 대답하고 얼른 철문을 열라는 뜻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안쪽에서 무언가 파바밧! 빠르게 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손톱으로 문을 긁는 듯한 소음이 나더니,

쿵쿵쿵!

일정한 박자로 육중한 것들이 부딪히는 마찰음이 이어졌다.

절로 소름이 끼친 유안은 문에서 훌쩍 떨어졌다.

그리고 비조 길드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뭘 하신 겁니까?"

그러자 비조 길드장이 들고 있던 곰인형의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허튼 짓 못하게 가둬달라고 부탁했잖아. 그래도 이제 비명은 참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

방 하나에 얌전히 넣어놓기만 하라는 말이었는데 비조 길드장은 그보다 더한 짓을 한 것 같았다.

"아직 죽이지는 않았어."

"······."

"그래도 멀쩡히 협회에 등록된 헌터들이니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귀찮은 일이 생기거든."

귀찮은 일만 아니었으면 이미 죽이고도 남았을 거라는 뜻이었다.

"투정이 심해지기는 했지만 이전보다 말은 잘 들을 거야."

비조 길드장은 알쏭달쏭한 말을 하며 철문을 천천히 열었다.

일반인이라면 온 힘을 다해야 열 수 있을 무게의 철문을 한 손으로 가볍게 여는 모습이 S급은 S급이었다.

철문 안쪽의 상황을 제대로 살피려면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려야 했다.

이유안이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그으으···."

인간이 아니라 짐승 같은 소리를 내는 자는 환각 스킬을 쓰던 바로 그 헌터였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한 것처럼 새빨갛게 충혈된 눈, 그리고 그 주변의 피부에 검은 핏줄이 토도독 올라와 있었다.

유안은 시선을 오래 마주하고 있지 못했다.

"데리러 온 거라며. 어서 데려가야지."

"···차라리 기절시켜 주시죠."

기절해서 축 늘어진 사람들을 들쳐메고 가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비조 길드장은 이유안의 말을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게 해놔서 기절시키기는 어려운데."

"정신계 스킬이라도 쓰신 겁니까?"

비조 길드장은 베일에 싸인 존재였으니 세간에 밝혀지지 않은 정신계 스킬 하나쯤은 있을 것 같았다.

꼭 스킬이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아이템이라도.

그러나 곰인형의 얼굴은 좌우로 도리도리 움직였다.

"그냥 미래를 말해줬을 뿐인데 스스로 잠을 포기하던걸. 내가 시킨 건 아니었어."

"무슨 미래 말입니까?"

"삶의 끝에는 죽음만 있을 뿐이지."

비조 길드장이 나른한 음성으로 말하자 바닥을 기어다니던 헌터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겁을 먹었는지 개중에는 굳은 채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유안은 처절한 광경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셨습니까?"

류지우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간 헌터들이기는 했으나 이런 말로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복수를 할 거였으면 당사자인 류지우가 나서서 처리하는 게 맞았다.

사람을 맡아주는 건 자신이 있다고 해서 맡긴 건데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대화로 해결해보려 했지."

그렇게 말한 비조 길드장이 인벤토리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종이를 가득 채운 필체가 다양했다.

"반성문도 쓰게 했는데 반성하는 기미가 없었어."

비조 길드장은 그런 헌터들이 정말 안타깝다는 듯 굴었다.

"탈출도 여러 번 시도해서 어쩔 수 없이 지하에 데려다 둔 거야. 여긴 나만 문을 열 수 있거든."

언뜻 듣기에는 상식적으로 느껴졌으나 헌터들은 비정상적으로 겁을 먹고 있었다.

비조 길드장이 숨기는 무언가 더 있는 게 분명했다.

'물어봐도 대답 안 해주겠지.'

대놓고 물어본다고 해도 특유의 화법으로 스르르 빠져나갈 것이다.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 유안은 이 길드장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기 얘기는 절대 안 하는 타입이지.'

이유안은 비조 길드장에게서 유의미한 정보 얻기를 포기했다.

대신 자신도 뻔뻔하게 나가는 쪽을 택했다.

"제가 E급밖에 안 돼서 이 사람들을 전부 지상으로 옮기기는 힘듭니다. 배달까지 깔끔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F급인 줄 알았는데."

"E급 맞습니다."

유안은 순간 울컥하여 자신의 헌터 디바이스를 꺼내 등급을 보여주었다.

비조 길드장이 놀리려는 악의 없이 정말로 F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 더 불쾌했다!

"저는 먼저 올라가 있겠습니다."

바닷물의 비린내인지 피비린내인지 모를 냄새가 풍기는 이 지하에서 한시라도 빠르게 벗어나고 싶었다.

유안은 비조 길드장을 그대로 두고 먼저 지상을 향해 나아갔다.

*

비조 길드장은 정말 헌터들을 건물 정문 앞에 옮겨주기만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유안의 연락을 받은 류지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조 길드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상태로는 기자를 부를 수도 없겠는데요."

류지우가 헌터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래도 각자의 헌터 디바이스가 망가지지는 않아서 협회에 등록된 헌터임을 입증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래도 비조 길드장이 증거를 많이 줬습니다."

헌터들이 직접 적은 반성문에는 그간의 만행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비조 길드장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반성하는 기미가 없다고 했으나 유안에게는 뜻밖의 수확이었다.

[원래부터 지하에 살던 헌터들은 모조리 쫓아냈습니다. 죽이지는 않았어요! 진짜 안 죽였습니다!]

반성문의 한 구절이었다.

유안은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 류지우에게 보여주었다.

"역시 있긴 있었다는 말이군요."

"발견하기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러 차례 위협을 느꼈으니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숨었을 겁니다."

"네. 그래도 존재를 확인했으니 됐습니다. 사장님께 도움을 많이 받네요."

유안에게 감사를 전한 지우는 헌터들에게 마나 억제 아이템을 단단히 채웠다.

그러고는 자신이 가진 회복 스킬을 쏟아부어 헌터들의 외상을 싹 사라지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 있었다.

실핏줄이 다 터져 붉게 충혈된 눈과 그 주변의 거뭇한 피부.

신체의 다른 부분이 멀쩡했음에도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얼굴이 그렇게 망가져 있으니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스킬로도 회복되지 않는 겁니까?"

"가끔 스킬끼리 충돌할 때가 있기는 한데··· 이번에는 어떤 경우인지 모르겠군요."

스킬끼리 충돌하는 거라면 류지우가 회복 스킬을 썼을 때 불쾌한 장벽에 닿은 느낌을 느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헌터들은 류지우의 회복 스킬을 기다렸다는 듯 쭉쭉 빨아먹었다.

"이상하네요."

"비조 길드장이 무슨 짓을 한 것 같기는 했습니다."

"비조 길드장을 만나셨습니까?"

"어쩌다 보니··· 원래는 직원이 대신 나오기로 했는데 길드장이 직접 나왔습니다."

정말 뜬금없는 일이기는 했다.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는 걸 극도로 기피하는 사람이 갑자기 먼저 모습을 드러내다니.

물론 인식 방해 아이템을 덕지덕지 바르고 나오기는 했지만, 목소리까지 변조한 것 같지는 않았다.

유안은 아직도 짙푸른 심해처럼 느껴지던 그 음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게이트 뉴스에 연락은 해두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서울에서 만나자고 하던가요?"

"아뇨. 곧장 부산으로 내려오겠다고 하던데요. 우리도 지금 출발해야 먼저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류지우와 이유안은 오랜 고민 끝에 부산 지하철에서 벌어진 사건을 잘 포장해보기로 했다.

우선 피해자는 S급 헌터인 류지우가 아니라 E급 헌터 이유안으로 변경되었다.

류지우는 헌터 협회의 주축인데 목숨이 위급했다는 얘가 새어나가면 대중들이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E급 헌터인 중앙 카페 사장이 휴가차 부산에 놀러 갔다가 질 나쁜 헌터들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시나리오라면 많은 이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송 덕분에 유안의 인지도가 높아진 상태라서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알려도 괜찮겠습니까? 사실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인데요."

"사실대로 알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실상은 유안이 지우를 구해준 것이었지만, 언론에는 그것과 반대로 보도하기로 했다.

이유안은 자신이 의인이나 영웅으로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중앙 카페 사장으로 여기저기 알려진 것만으로도 충분해.'

길을 가다 유안을 알아보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여기서 인지도가 더 올라가버리면 일상 생활이 불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안은 자신의 안온한 삶을 위해 영웅 역할은 지우에게 넘기기로 다짐했다.

*

"사, 사장님이랑 파트장님··· 엄청 친해 보이게 나왔네요···?"

홍소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헌터 디바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게이트 뉴스의 손수혜 기자가 쓴 기사에는 유안과 지우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나란히 선 둘은 제법 사이가 좋아 보였다.

"둘이 같이 여행도 가는 사이라고 알려졌으니 친해 보이기는 해야죠."

서정원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게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었는데.'

이유안과 류지우가 함께 부산에 가 있던 당위성을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작한 부분이었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두 사람은 휴가 일정을 맞춰 함께 부산 여행을 떠났다.]

기사에 실린 문장 하나를 읽은 유안의 입이 씁쓸해졌다.

대외적으로 류지우와 절친이라고 잘못 알려진 점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유안은 휴가의 마지막 날을 중앙 카페에서 보내고 있는 류지우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S급 헌터는 상대의 눈빛을 빠르게 느끼고는 유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슬, 머리 자르러 가자."

"우응? 갑자기?"

"응, 갑자기."

유안은 제 무릎에 앉혀두었던 윤슬을 데리고 지하철 쪽으로 향했다.

앞머리가 슬슬 눈을 찌르기 시작한 어린이는 별 의심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유안을 따라 걸었다.

"근데 이제 파트장님도 우리랑 같이 사는 거야?"

윤슬은 요새 중앙 카페를 떠나지 않는 지우를 보고 단단히 오해를 한 듯했다.

유안은 얼굴 표정이 구겨지려던 것을 꾹 참고 대답했다.

"아니야, 파트장님 이제 휴가 끝났어. 일하러 가실 거야. 그리고 그분은 집도 따로 있어."

"으응··· 그렇구나."

아쉬운 티가 역력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기에 유안은 윤슬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너는 아저씨랑 평생 같이 살 거라며. 그런데 파트장님이 왜 필요해."

"다같이 살면 재밌잖아!"

"난 윤슬이랑 둘이 있을 때가 제일 재밌는데."

"히이··· 정말로?"

"응, 정말."

윤슬은 금세 아쉬운 기색을 내려놓고 유안의 하트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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