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37)

자르기 전에 홍소라가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어서 만족한 것도 있었다.

중앙 카페 공식 헌터그램에는 그 누구도 토끼라는 걸 짐작할 수 없는 케이크 사진이 여러 장 올라갔다.

"잘 먹겠습니다!"

케이크 배식이 끝나자 정태영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간식 시간이 시작되었다.

유안은 윤슬의 배려로 특별히 토끼 귀 조각을 받았다.

흰색과 분홍색이 오묘하게 섞인 케이크를 포크로 베어내 입안에 넣으니 풍부한 우유 크림의 맛이 느껴졌다.

'재료가 좋아서 그런지 맛은 끝내주네.'

모양만 잘 잡는다면 당장 카페 진열장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 맛이었다.

베이킹에 능통한 요리사들이 혼신을 다해 만들어낸 작품이니 당연했다.

유안은 케이크를 계속해서 먹어갔다.

금세 반 정도가 사라진 케이크에 포크를 푹 찔러넣었을 때였다.

팅!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났다.

유안은 케이크 속에 단단한 무언가가 들어있음을 느끼고 그 근처를 살살 파냈다.

작은 하트 모양 보석이 크림을 잔뜩 묻힌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야.'

유안은 하마터면 이가 모조리 나갔을 거라 생각하며 포크로 보석을 들어올렸다.

꺼내고 보니 보석 뒤쪽으로 은색 링도 붙어 있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이런 구식 케이크 이벤트를 준비한 게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이 주인공은 아니기를 바랐다.

주인을 잘못 찾아온 반지일 거라 믿으며 이유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이윤슬 어린이가 히죽히죽 웃으며 유안 곁으로 다가왔다.

유안은 직감적으로 케이크에 반지를 넣은 범인이 윤슬임을 알 수 있었다.

'대체 누가 애한테 이런 걸 가르쳤어.'

윤슬이 혼자 계획했을 리는 없다.

어른들 중 부추긴 사람이 있을 텐데 인원이 워낙 많아 의심가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유안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데 윤슬이 쩌렁쩌렁 외쳤다.

뒷마당에 모인 사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였다.

"아저씨! 평생 나랑 놀 수 있는 기회를 줄게! 그 반지 받으면 나랑 계속 같이 사는 거야!"

"······."

회귀 전의 기억까지 합치더라도 이런 공개 고백은 처음 받아보는 이유안이었다.

비조 길드

윤슬은 유안의 왼손 새끼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틈만 나면 매만지며 히죽댔다.

"히이."

"윤슬, 뭐가 그렇게 좋아."

어린이를 울릴 수는 없어서 고백을 받아주었던 유안은 윤슬의 뺨을 아프지 않게 살살 꼬집었다.

"이제 아저씨 나랑 평생 살아야 하잖아. 아무 데도 못 가!"

"······."

윤슬은 제법 무서운 소리를 눈 반짝반짝 빛내며 했다.

어차피 이맘때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부분에서 억지를 부리고는 하니까 유안은 윤슬이 며칠 그러다 말 거라고 믿었다.

"잘 때도 반지 빼면 안 돼!"

"안 빼."

이윤슬은 이유안의 새끼 손가락을 닳아지게 만지다가 색색 잠이 들었다.

던전에 들어가 스킬을 시원하게 쓰고 나와서인지 평소보다 잠드는 타이밍이 빨랐다.

윤슬의 목에는 작은 팬던트가 걸려 있었다.

김주현이 빠르게 만들어낸 것으로, 체내 마나를 약간이나마 흡수해주는 기능의 아이템이었다.

아직 개발 초기 단계라 많은 양을 해결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유안은 윤슬이 매주 토요일마다 던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계획을 짰다.

윤슬은 더 자주 들어가고 싶어했지만, 가뜩이나 바쁜 상급 헌터들을 매일같이 불러낼 수 없으니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제한한 것이다.

류지우도 복잡한 계산 끝에 그 정도라면 윤슬이 마나 폭주를 겪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 내렸으니 잘 된 일이었다.

'이제 좀 안심이네.'

유안은 어느새 조금 자란 윤슬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지하에 미용실도 하나 들어왔던 것 같은데.'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미용실이었다.

헌터들의 머리카락은 일반인보다 훨씬 억세기 때문에 던전 부산물로 만든 가위를 사용해 잘라야 했다.

유안은 지하 건물 임차인에게 김주현이 만든 보호구와 가위를 제공하며 오래오래 일해줄 것을 당부했다.

요식업 말고 다양한 방면으로 편의시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좋았다.

유안은 다음에 윤슬과 함께 미용실에 갈 계획을 세우며 천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아침이었다.

잠 많은 어린이는 그대로 더 자게 두고, 유안은 침실 밖으로 나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때마침 바로 옆 침실에서 류지우가 나오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협회의 파트장은 며칠 남지 않은 휴가를 중앙 카페에서 보내고 있는 중이라 요즘은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게 익숙해졌다.

"아침 먹고 바로 출발합시다."

오늘은 이유안과 류지우가 함께 방문할 곳이 있었다.

"비조 길드에서 쉽게 허락할 줄은 몰랐습니다. 협회 측에서 방문 요청할 때마다 거절하던 게 비조 길드였거든요."

아침으로 준비된 바이스부어스트를 썰며 류지우가 말했다.

협회는 대형 길드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것을 선호한다.

수창이나 새로 같은 길드들은 비교적 협조적으로 헌터 협회의 요청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대형 길드 관리는 류지우 말고 다른 부서의 파트장이 도맡고 있기는 하지만, 협회에서 근무하며 심심치 않게 비조 길드의 욕을 들을 수 있었다.

"길드장이 굉장히 비협조적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바, 방송 출연도 안 하잖아요···. 인터넷에 검색하면 얼굴 나오기는 하지만······."

하얀색 소시지를 우물거리던 홍소라가 내친김에 헌터 디바이스로 비조 길드장을 검색했다.

"와··· 이름도 안 떠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자신의 모든 신상을 베일에 감쌌다.

인터넷에 공공연하게 알려진 비조 길드장의 얼굴마저도 진짜라고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일부러 특수 효과를 준 것도 아닌데 이목구비가 흐릿한 느낌이 들었고, 사진을 뇌리에 각인시키려 해도 금세 잊힌다.

"밖에 나설 때 인지 방해 아이템을 몆 중첩으로 쓰고 나오는 것으로 압니다. 알려진 모습도 진짜가 아닐 거예요. 매번 얼굴이 조금씩 변하기도 하고요."

수창 길드장 진 선의 등급이 저주로 인해 잠시 하락했을 때 쓰던 검은 마스크와 비슷한 아이템.

비조 길드장은 그런 아이템을 무수히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저도 길드장에게 직접 방문 허가를 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유안은 비조 길드장의 연락처도 모른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비조 길드 직원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 길드 직원이 길드장의 연락을 대신 전해주는데, 흔쾌히 방문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다만··· 건물에 들어오는 건 저 혼자여야 한다는 단서를 걸긴 했습니다."

"위험한 거 아니에요, 사장님?"

"지난번에도 받아야 할 서류가 있어서 혼자 방문했었는데 별일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비조 길드의 동의서를 받아오게 시킨 것도 류지우였다.

유안은 갑자기 괘씸한 기분이 들어 류지우의 접시 위에 자신의 브로콜리를 버렸다.

"···뭡니까?"

갑자기 채소를 떠맡게 된 지우가 어이 없는 표정을 지었으나 유안은 무시했다.

"거기 직원이 중앙 카페를 아주 좋아하니까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비조 길드장도··· 언제 방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페에 명함을 놓고 간 적이 있고요."

이름과 연락처도 없이 '비조 길드장'이라고만 적힌 종이였지만.

"직원 말로는 길드장도 중앙 카페 음식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나온 신메뉴도 마음에 들어서 와인을 몇 병이나 보내주기도 했고요."

비조 직원이 해산물과 함께 보낸 최고급 와인은 그 길드장이 직접 고르고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와인 양이 종류별로 넉넉했기에 신메뉴인 뱅쇼를 만들 때 재료가 부족할 일이 없었다.

화이트 와인은 물고기 요리를 할 때 썼고, 스파클링 와인은 중앙 카페에서 가끔 진행하는 저녁 만찬에 요긴하게 쓰였다.

그래서 유안은 비조 길드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내리고 있는 편이었다.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고는 하나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조심하시죠. 협회에도 밝히지 않은 스킬을 보유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대표 스킬이 물과 공기를 함께 다루는 것이지 않습니까."

"하위 스킬이 대표 스킬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말을 마친 류지우가 브로콜리를 포크로 콕 찍어 먹었다.

고기 육즙이 잘 배인 채소는 딱 좋은 식감으로 익어서 부담감 없이 꿀꺽 넘어간다.

그 모습을 보던 유안이 나머지 브로콜리도 우르르 류지우의 접시로 넘겨버렸다.

"······."

지우가 제 접시 위로 탑처럼 쌓인 초록의 향연을 바라보는 사이, 김주현이 인벤토리에서 작은 호루라기 형태의 아이템을 꺼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이거 쓰세요!"

"호신용 호루라기입니까?"

"비슷해요. 근데 입으로 부는 게 아니고 손으로 깨는 거예요. 위기 상황에 언제 호루라기 불고 앉아있어요. F급 악력으로 테스트해 봤을 때도 조금만 힘 주면 바로 깨지니까 사용이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굳이 호루라기 모양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 같지만, 유안은 빨간 호루라기를 고맙게 받아 챙겼다.

"비상 연락이 가는 사람은 일단 류지우 파트장님으로 해놨어요."

"예,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쓸 일 없어야죠, 이 사장님!"

"음··· 그럼 멀쩡하게 다시 가지고 오겠습니다."

"좋아요! 빌려드리는 거니까 꼭 반납하셔야 해요."

주현은 하트 반지가 끼인 유안의 새끼 손가락과 제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진짜 안전하게 돌아오세요. 카페는 저희가 안전하게 지키고 있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유안은 지우와 함께 공항으로 출발했다.

*

지난번 부산행에 수창 길드의 전용기가 활약했다면 이번에는 새로 길드장이 준비해준 비행기였다.

깔끔하고 안락한 내부에 유안은 만족했다.

'수창 길드 전용기는 좀 화려했지.'

푹신한 가죽 소파에 앉은 유안이 인벤토리에서 리본 달린 곰인형을 꺼냈다.

윤슬에게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둘러댔더니 친구에게 선물하라며 건네준 것이었다.

인형 감촉이 훌륭하기는 했으나 어른에게 선물하기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줄까 말까 고민하며 곰인형을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류지우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비조 길드장이 아주 좋아하겠군요."

놀리는 것이 분명했다.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냉큼 다른 인형을 꺼냈다.

이곳저곳 붕대가 칭칭 감긴 채 엉엉 우는 사자 인형이었다.

윤슬의 머리에는 류지우가 중환자로 각인되었는지 류지우를 닮았다며 준 인형도 이런 모습이었다.

이유안이 사자를 류지우에게 건넸다.

"파트장님 것도 있으니 질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윤슬이가 꼭 전해주라고 부탁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인형의 꼬리에 '선물!'이라고 삐뚤빼뚤 적힌 아이의 쪽지도 매달려 있었다.

던전산 인형을 하나씩 끌어 안은 두 어른의 짧은 비행이 시작되었다.

제주에 도착해서 비조 길드까지 가는 길도 순탄했다.

새로 길드에서 아예 풀코스로 준비해둔 덕분에 차를 따로 잡을 필요도 없었다.

월정리에 도착해서는 류지우를 먼저 비조 길드와 가까운 카페에 내려주었다.

"어차피 기절한 상태일 겁니다. 끌고 나올 테니 연락하면 건물 앞으로 오세요."

부산에서 검거한 헌터들의 거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 전에 류지우가 그 헌터들에게 확인할 게 있다고 해서 만나러 온 것이었다.

아마 대화 후에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될 것이다.

비조 길드 직원에게 연락은 미리 하고 왔다.

그러나 리셉션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유안은 혹시 몰라서 안쪽 홀의 식당에 발을 디뎠다.

비조 직원과 함께 왔을 때는 길드원들로 북적이던 곳이 오늘따라 고요하게 침잠해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한데.'

살아있는 생명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느낌이었다.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액자 속에 홀로 들어와 서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지난번에는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비조 직원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던전산 물고기를 회 떠주고 다른 직원들이 환호를 지르기도 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는 전부 환영처럼 느껴졌다.

"이상해."

유안은 홀의 분위기에 자신까지 잡아먹히지 않도록 소리 내어 말했다.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건물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그때였다.

"그리 이상한 모습은 아니야. 오히려 이게 평범한 상태이지."

"······."

처음 듣는 목소리가 너른 홀을 묵직하게 울리고, 단조로운 구두굽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보고 인사하는 건 처음이지. 반가워, 중앙 카페의 사장."

"···비조 길드장님이십니까?"

"맞아."

유안은 일단 인벤토리에서 호루라기를 꺼내어 손 안에 쥐고 있었다.

비조 길드장의 얼굴은 흐릿하게 보였다.

인지 방해 아이템이 중첩되면 나타나는 효과로, 아무리 눈을 찡그리고 쳐다보아도 모자이크 처리를 한 것 같은 흐릿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길드장의 키나 몸집도 커졌다 작아졌다, 부풀었다 홀쭉해졌다를 반복하니 유안은 머리가 슬슬 아파왔다.

"그때 맡긴 헌터들은 어디 있습니까?"

"각자의 스위트룸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지."

"···최상층 말입니까?"

물음에 대한 답은 없었다.

비조 길드장에게서 일부러 시선을 돌리고 있던 유안은 침묵이 계속되자 결국 그 표정을 확인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희미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아이템 좀 빼시면 안 됩니까? 어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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