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37)

한가하게 휴식을 취하다가 불려 나온 S급과 A급 선생님들이 아이의 작은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었다.

"이제 가자, 윤쓸!"

"응!"

정태영이 아이 손을 잡고 앞장섰다.

목적지는 페데릭 백작 저택 던전이었다.

"다녀올게, 아저씨! 나 없다고 울면 안 돼!"

윤슬이 방방 뛰며 손을 흔들자 유안이 피식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중앙 카페에서 자리를 비운 사람은 서정원과 이윤슬 둘 뿐인데 무척이나 휑한 느낌이 들었다.

유안은 오랜만에 조용해진 카페 뒷마당에서 강해민을 불러 지하 공사 논의를 시작했다.

"강남 쪽으로 이을 생각이라며."

해민이 탁자 위의 지하철 노선도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이중앙을 안고 뱃살을 주무르던 유안이 긍정했다.

"협회 허가만 떨어지면."

"거기 파트장이 너한테 완전히 넘어온 것 같던데. 당연히 허락해주겠지."

"무슨 소리야···."

류지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요즘은 중앙 카페에 너그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러다가 또 언제 돌변해서 이상한 요구를 할지 모른다.

류지우가 헌터 협회의 사람인 이상 유안은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릴 생각이 없었다.

"근데 지하 정리하기 전에 지상부터 어떻게 하는 게 낫지 않겠냐."

"그렇긴 하지."

유안이 눈을 찡그렸다.

강남 던전 근처의 지상은 헌터 협회에서 편평하게 밀어둔 그대로였다.

방해물이 없기에 건물을 짓기에도 딱 좋은 상태.

중앙 카페 2호점을 내기에는 무척이나 적절하기는 했다.

"이번에 알바생도 더 뽑았으니까 인력 부족할 일도 없잖아. 더 미룰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그럼 뭐가 문젠데?"

그 질문에는 유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말하기 싫은 건 죽어도 말하지 않는 이유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해민은 이럴 때 강격책을 쓰는 게 좋다는 것도 파악했다.

"다른 업체에서 먼저 건물을 세울 수도 있어. 마나 문제가 있으니까 게이트 근처에는 못 짓겠지만, 제한 구역 바깥에 지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업체는 많다. 마침 근처에 지하철 역도 있겠다."

어차피 지하철 재개통 프로젝트를 계속할 거라고 판단한 자본가들이 슬슬 움직일 때가 됐다.

더 늦기 전에 중앙 카페에서 나서야 했다.

"파트장님 돌아오면 얘기해 볼게."

유안이 고대 포식자의 부드럽고 따끈따끈한 뱃살을 계속 주무르며 말했다.

강남 던전 근처로 가는 건 여전히 꺼려졌으나 사업 확장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케이크, 로맨틱, 성공적

윤슬이 공략할 만한 던전을 고를 때는 여러 요소가 고려되었다.

당연하게도 안전하게 공략할 수 있을 것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건···

"엄청 재밌었어!"

기왕 하는 던전 체험 학습이니 아이가 즐길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

더불어 던전에 등장하는 몬스터가 잔인하다거나 징그럽게 생기지 않아야 했다.

윤슬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유안은 아이의 정서상 좋지 않을 것 같은 요소를 모조리 배제했다.

"보스방에는 안 들어갔지?"

"응! 문 근처로도 안 갔어."

"착하네. 잘했어."

"히이."

기분이 좋은 윤슬은 방방거리며 유안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페데릭 백작 저택 던전은 윤슬이 좋아할 만한 인형이 많이 나오고, 몬스터들도 아기자기한 맛이 있기 때문에 체험 장소로 선택받은 던전이었다.

그러나 보스방에서는 인상이 절로 써질 만큼 흉측한 모습의 페데릭 백작이 나온다.

그래서 윤슬은 수창 길드장이 홀로 보스를 격파하는 동안 다른 보호자들과 체스를 두며 놀았다.

어른들이 티 내지 않고 져주었기에 윤슬은 체크메이트를 스무 번이나 외칠 수 있었다.

"아저씨 선물도 가져왔어!"

"···내 선물?"

"이거! 아저씨 닮아서!"

"······이게 날 닮았구나."

윤슬이 인벤토리에서 꺼내 건넨 것은 하얀색 꽃 모양 인형이었다.

아니, 꽃이라 부르기에는 뾰족한 귀 두 짝이 달려 있었다.

종을 특정할 수 없이 기괴한 모양새에 유안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겨우 감추었다.

"고마워. 침대에 둘까?"

"응! 이건 내 건데 이것도 같이!"

이번에는 노란색 해 모양 인형이 튀어나왔다.

노란 해와 하얀 꽃이 함께 있으니 그럭저럭 동심이 피어나는 것 같기는 했다.

해와 꽃에 눈이 달린 것은 애써 무시하고, 유안은 윤슬에게 침실에 인형을 배치할 수 있는 권한을 일임했다.

"다른 인형도 많으니까 예쁘게 꾸며 놓을게!"

우다다 달려가는 윤슬의 뒷모습에서 아직도 넘치는 기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킬 많이 쓰고 오게 했는데 여전히 팔팔하네요."

"우린 거의 산책 수준이었어요~. 던전 들어가서 스킬 한 번도 안 쓴 건 처음이라니까요."

서정원과 권재윤이 말했다.

던전 안에서의 윤슬은 정말이지 폭주기관차 같았다.

몰려드는 인형 몬스터 무리가 눈 깜빡할 새에 사라졌으니 어른들은 따로 할 일이 없었다.

"제 스킬을 한 번 보고 그대로 따라하기도 했습니다."

수창 길드의 던전 공략 팀 매니저 자리를 책임지고 있는 조서혁이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덧붙였다.

"다른 사람의 스킬을 복사하는 능력인 것 같던데··· 이대로 크면 세계적으로 봤을 때도 저 아이를 뛰어넘을 헌터는 없을 겁니다."

"지금도 이미 그럴 걸."

수창 길드장이 서혁의 어깨에 자연스레 팔을 기대며 말했다.

내로라하는 국내 1위 길드의 헌터들이 윤슬의 칭찬을 끊임없이 해대니 유안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움직였다.

'윤슬이가 대단하긴 하지.'

어쨌든 아이가 신나게 즐기고 왔다니 다행이었다.

윤슬은 3층 침실에 인형 배치를 금세 마치고 다시 내려와서 유안의 팔을 질질 끌어당겼다.

"빨리이···! 구경하러 가!"

"알았어, 가자."

셔츠가 찢어질 것 같아서 유안은 그냥 윤슬을 품에 안고 계단을 올랐다.

뭘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기대하며 침실 문을 열어보니···

"윤슬. 이러면 우리 잘 곳이 없을 것 같은데."

"응? 아닌데! 여기서 자!"

던전에 있는 인형을 싹 긁어온 것인지 침대 위는 물론이고 바닥에도 발 디딜 틈 없이 푹신한 인형들이 깔려 있었다.

유안은 인형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침대 근처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이미 사람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인형이랑 같이 자면 돼!"

윤슬이 유안의 품에서 빠져나와 인형 위로 다이빙했다.

유안은 윤슬 몰래 인벤토리에 인형 몇 개를 집어넣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밤에는 인형의 탑에 깔려 죽는 꿈을 꿀 것 같았다.

"이름도 다 지어줬어."

윤슬은 인형 하나하나를 작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발음도 어려운 이름들을 읊어댔다.

성씨가 전부 이 씨인 대가족 소개를 잠자코 끝까지 들어준 유안이 윤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시락은 먹고 왔어?"

"응! 근데 또 배고파! 케이크 먹을래!"

"케이크?"

"던전 안에서 엄청 큰 케이크 봤는데 독 있어서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 먹어보고 싶었는데···."

페데릭 백작 저택의 다이닝룸에 등장하는 장식품을 말하는 것 같았다.

겉모습은 번지르르하지만 입에 대는 순간 정신을 잃는 맹독을 가진 케이크였다.

아이의 눈에는 충분히 예뻐 보였을 것이다.

중앙 카페에서도 다양한 케이크를 만들어 팔기에 윤슬도 매일 다른 종류의 조각 케이크를 접하고 있지만, 거대한 5층 높이의 케이크는 이번에 던전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유안은 윤슬의 눈에 비친 욕망을 읽어냈다.

이건 필시 케이크를 먹고 싶은 눈이 아니라 그냥 5층짜리 거대 케이크를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던전에서 안전하게 돌아온 아이에게 해주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유안은 바로 마음을 정했다.

"윤슬, 우리는 더 큰 케이크 만들자. 네가 만들고 싶은 모양으로 해도 돼."

"우아! 진짜아?"

"응."

"좋아!"

윤슬이 만세를 부르며 유안에게 안겼다.

유안은 아이를 안은 채 한 손으로 헌터 디바이스를 두드렸다.

탑처럼 거대한 케이크를 해치우려면 먹을 입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

케이크 시트를 만드는 일은 홍소라와 장다온이 맡았다.

"이, 이러다간 케이크로 만백성을 먹여 살리겠어요······."

"무겁네요."

"아, 아···! 제가, 제가 들게요!"

비각성자인 다온이 반죽이 든 보울을 무거워하자 F급 헌터 홍소라가 나섰다.

미미한 차이이기는 했으나 각성자 쪽이 좀 더 힘이 세기는 했다.

"그래도 제자 분들이 도와주셔서 금방 끝나겠어요."

서정원은 장다온의 제자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크림을 만들고 있었다.

윤슬도 거들겠다고 나섰다가 얼굴과 몸에 생크림을 잔뜩 묻히는 바람에 목욕이나 당하고 말았다.

그 후에 윤슬은 그냥 뒷마당에서 중앙이와 뛰어놀며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음료는 얼마나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너무 달지 않은 걸로 최대한 많이 부탁드립니다."

방재이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 머신을 한꺼번에 작동시켰다.

한 사람이 한 잔씩만 마시는 건 아니라 최소 오십 잔은 필요할 듯했다.

"이유안, 지금 얘기하는 게 낫지 않겠냐."

강해민이 다가와 유안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류지우 쪽을 힐끔거리는 것으로 보아 재개통 프로젝트의 연장선을 말하는 것 같았다.

'강해민 이 녀석··· 역시 일 중독자구나. 어떻게든 일을 빨리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네.'

유안은 해민이 원하는대로 일거리를 물어다주기 위해 지우에게 다가갔다.

"파트장님."

"예, 사장님."

"잠깐 대화 좀 나눕시다."

"···예."

지우는 유안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지 못하고 일단은 뒤를 따랐다.

한적한 3층 사무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제가 무슨 말씀 드릴지 예상하셨을 것 같습니다."

류지우는 눈치가 빠르니까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안은 사무실에 있는 지하철 노선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넓게 펼쳤다.

"중앙 카페 근처의 정거장 세 개는 깔끔하게 정리가 돼서 비각성자들이 많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게이트 근처라는 두려움도 슬슬 종식되어 요즘은 정말 지하도 전체가 인산인해였다.

"열차도 있으니 좀 더 멀리까지 길을 이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류지우는 협회장과 대화한 것을 떠올리며 유안의 말에 쉽사리 반응하지 못했다.

협회장에게는 둘러대는 식으로 재개통 프로젝트를 헌터 협회가 꽉 잡을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류지우도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중앙 카페가 맡아주는 게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남 쪽으로 생각 중인데··· 지하를 뚫기 전에 지상부터 좀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쪽에 2호점을 내고 싶은데 협회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아, 파트장님은 지금 휴가 중이시니까 당장 답을 달라는 건 아닙니다."

유안은 류지우의 휴가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류지우는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앙 던전 근처에 건물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주도적으로 허가를 내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협회장이 게이트 근처의 이점에 크게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말을 하긴 해야하는데.'

협회의 상황이 어떤지 유안에게 알리는 편이 낫기는 했다.

그런데 묘하게 기대감을 띠고 있는 이유안의 얼굴에 대고 단호한 거절을 말하기 꺼려졌다.

'휴가가 끝나기 전까지 방법을 찾아보면 되겠지.'

지우는 결국 자신이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내기로 결론을 내렸다.

중앙 카페 2호점은 어느새 유안 혼자만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최대한 빨리 건물 허가 나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류지우는 협회장과 또 한 번 담판 지을 궁리를 하며 유안에게는 긍정적인 대답만 들려주었다.

*

두 시간에 거쳐 완성된 케이크는 과장 하나 섞지 않고 중앙 카페의 담벼락 만한 높이였다.

케이크 꼭대기의 마지막 별 장식은 정말로 윤슬이 담벼락 위에 올라가서 얹은 것이었다.

"크기도 최고니까 맛도 최고겠죠?!"

정태영은 벌써 침을 줄줄 흘리며 케이크의 맛을 기대했다.

케이크 탑의 절반을 책임지고 해치울 오늘의 MVP였다.

"그런데 윤슬, 이거 무슨 모양이야?"

"웅? 아저씨 토끼도 몰라?"

토끼··· 라기에는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많았지만 유안은 최대한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이건 귀엽고 깜찍한 토끼다···. 어린애가 토끼라고 했으니까 무조건 토끼인 거야.'

자세히 살피니 길쭉한 귀가 있기는 했다.

유안은 윤슬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잘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히이··· 아저씨 닮은 토끼야!"

"······."

그 말에는 살짝 울컥했지만 윤슬의 미적 감각이 남다른 것이라 생각하며 애써 넘어갔다.

토끼 케이크는 생크림이 다 녹아내리기 전에 여러 조각으로 나누었다.

윤슬은 만드는 과정에서 재미를 충분히 느꼈기에 토끼가 잘리는 것을 슬퍼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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