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우가 어떤 죽을 좋아하는지 모르니 종류별로 다 끓여볼 생각이었다.
마침 김주현이 만들어준 냄비 중에 안쪽이 네 구역으로 나뉜 것이 있었다.
국물 요리 여러 개를 한꺼번에 만들 때 무척 좋았다.
윤슬은 아직 매운 걸 잘 못 먹어서 모든 요리를 맵지 않게 따로 만들어줘야 했는데, 그럴 때도 이 냄비를 쓰면 번거롭지 않았다.
죽 종류를 고민하던 유안은 가장 기본적인 미음과 야채죽, 소고기죽과 해물김치죽을 만들기로 했다.
재료 손질은 다 되어 있어서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지 않았다.
'어차피 다들 저녁 전일 테니까.'
이유안 자신도 오랜만에 몸을 긴장시켜서인지 속이 영 좋지 않았다.
이런 날에는 몸도 마음도 편해지는 따뜻한 죽이 최고다.
먹는 입이 많으니 음식이 남을 걱정은 하지 않고 모든 재료를 듬뿍 넣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네 종류의 죽을 돌아가며 저어주고 있자니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제 궤도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역시 집이 최고라니까.'
휴식이 아닌 요리를 하고 있는데도 몸이 나른해진다.
잠깐 외출했던 것 뿐인데 막상 카페에 돌아오니 정신력이 충전되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유안이 느긋하게 죽을 만들고 있는데 맛있는 냄새를 맡은 윤슬이 주방으로 뽀르르 달려왔다.
"이거 뭐야?"
"죽. 쌀 끓여서 만드는 음식."
"볼래!"
"냄비 뜨거우니까 만지는 건 안 돼."
"아저씨, 나도 열 살이나 먹었어.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
윤슬이 팔짱을 끼고 젠체했다.
유안은 열 살이나 먹은 어린이를 번쩍 들어서 냄비 안쪽을 구경시켜줬다.
다양한 색의 죽이 보글보글 끓는 모습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본다.
"저게 제일 맛있어 보여."
"빨간색? 너한테는 좀 매울 텐데."
"그래도 좋아. 으음··· 화끈한 맛이 있어!"
윤슬은 정태영이 매운 걸 먹을 때마다 하던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새로운 표현을 성공적으로 써서 신난 것 같았다.
유안은 윤슬의 머리를 쓰다듬고 바닥에 내려주었다.
"다 되면 부를게. 놀고 있어."
"웅!"
다시 뽀르르 달려나간 윤슬은 뒷마당이 아닌 3층으로 향했다.
아까 보니까 빈 방에 누군가 들어온 것 같은데 아저씨가 따로 보여주지 않아서 궁금해하고 있었다.
"안 잠겨 있다!"
문고리는 윤슬이 힘을 싣자 소리 없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침대를 제외한 가구는 하나도 없이 삭막한 방에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윤슬도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아저씨가 맛 없는 채소들을 갈기 시작하면 금방 카페에 나타나는 사람이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뭐야아··· 새로운 사람 아니었어."
잠든 류지우의 모습에 살짝 실망한 윤슬은 그대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픈 건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도 그렇고, 호흡이 고르지 못한 게 어린이에게도 느껴졌다.
침대 위로 기어오른 윤슬은 류지우의 이마에 작은 손을 올려보았다.
손바닥이 화끈해졌다!
윤슬은 얼른 손을 떼어내고 탈탈 털었다.
"아저씨는 바빠 보였는데··· 으음."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익어버릴 것처럼 뜨거운 사람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윤슬은 동화책에 나오던 착한 주인공들의 마음씨를 본받아 아픈 류지우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스킬 쓰면 안 된다고 하긴 했지만··· 이건 다치는 거 아니니까."
윤슬은 류지우가 회복계 스킬을 쓸 때의 모습을 기억해내어 그대로 따라했다.
은은한 달빛을 닮은 빛무리가 윤슬의 작은 손바닥에서 흘러나와 지우의 이마에 닿았다.
측정 불가
머리를 쥐어짜던 통증에서 벗어난 류지우가 눈을 떴다.
고사리 같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일어났다!"
윤슬이 명랑하게 외치며 침대에서 폴짝 뛰었다.
아직 전부 회복되지 않은 몸이 울려서 살짝 무리가 갔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이것도 환각은 아니겠지.'
마지막 기억이 하필 환각을 본 것이었던 탓에 방방거리는 윤슬마저 의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침대의 흔들림이나 따뜻한 아이의 체온 같은 것을 스킬로 완벽하게 따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심한 류지우는 윤슬을 잠깐 안았다 놓아주었다.
"중앙 카페구나."
"응! 3층. 아저씨한테 깨어났다고 말하고 올게!"
3층 사무실에만 몇 번 들어가봤을 뿐 침실은 처음이었다.
도도도 달려나가는 윤슬의 뒷모습을 보며 지우가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서 뼈가 맞춰지는 것처럼 살벌한 소리가 났다.
"윽···."
오래 누워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류지우는 헌터 디바이스를 활성화해 디바이스가 자동으로 기록한 생체 정보를 확인했다.
'위험했군.'
운이 좋지 않았다.
정신계 스킬의 경우 워낙 그 종류가 적기 때문에 헌터 협회에서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각성자에게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신계 스킬 보유 헌터는 주기적으로 협회에 안전성 검사를 받으러 와야 했다.
그러니 류지우도 예측하지 못한 스킬이라면 악의적으로 협회에 등록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누군지 확인해봐야··· 아, 붙잡지는 못했으려나.'
더 센터 건물 3층에 편하게 누워 있게 된 것으로 보아 유안이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은 확실했다.
죽음 근처까지 갔던 상황이니 이유안에게는 목숨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신을 잃기 전까지도 적들은 멀쩡했고, 그 수많은 지하 헌터를 모두 성공적으로 붙잡았을 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다른 지원군을 데려갔다고 해도.'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이유안이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직접 나서지는 않았겠지. 이유안 사장은 E급이고.'
자신을 구하겠다고 무모하게 부산 지하철에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헌터 디바이스로 긴급 신호가 가기는 했으니 그걸 확인하고 다른 헌터들을 보내거나 했겠지.
류지우는 어느새 주먹을 꽉 쥔 채 침실 문을 매섭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유안 사장은 다치지 않았을 거야.'
자신에게 세뇌하듯 반복적으로 생각했다.
윤슬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니 유안에게 무슨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똑똑.
영겁 같은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유안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류지우는 푹 잠긴 목소리를 끌어내 곧장 대답했다.
"생각보다 일찍 깨어나셨습니다. 일주일은 족히 걸릴 줄 알았는데."
유안은 한 손에 쟁반을 들고 있었다.
쟁반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그릇이 보였다.
이유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스캔한 지우는 멀쩡한 것이 확인되자 손에서 힘을 풀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만. 파트장님은 왜 거기까지 가 계셨던 겁니까?"
"지하 헌터들의 흔적을 쫒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유안은 일단 침대 옆 협탁에 죽 쟁반을 놓았다.
"일단 먹고 합시다. 혹시 먹여드려야 합니까?"
"···됐습니다."
류지우가 멀쩡히 움직이는 팔로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환자식으로 준비한 미음이지만 감칠맛 돌게 간을 해서 반찬 없이도 잘 넘어갔다.
"다 먹고 이것도 마시세요."
유안은 제 인벤토리에서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꺼냈다.
윤슬을 재워버릴 때 자주 쓰는 우유로, 꿀을 타서 달달한 맛이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멀쩡한 음료를 받은 류지우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건강 주스를 주실 줄 알았는데요."
유안표 특제 주스가 맛은 몰라도 효과는 뛰어나다.
삐걱거리는 몸을 훨씬 가뿐하게 만들어줄 테니 당연히 그걸 기대하고 있었다.
여분으로 들고 다니던 것은 흔적을 쫓던 중에 다 마셔버려서 지우의 인벤토리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유안은 참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누가 환자한테 그런 걸 마시게 합니까. 죽 먹고 얼른 낫기나 하세요."
"······."
"먹는 모습 계속 지켜보면 부담스러우실 테니 저는 내려가 있겠습니다. 다 먹고, 푹 자고 일어나서 다시 대화합시다."
"···알겠습니다."
애초에 류지우에게 죽만 전달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유안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문앞에 윤슬이 당당한 포즈로 서 있었다.
"윤슬, 여기서 뭐해. 환자는 안정이 필요하니까 3층 말고 뒷마당에서 놀라고 했잖아."
"내가 치료해줬어!"
"···뭐?"
"다치는 스킬 말고 아픈 거 낫게 해주는 스킬 썼어. 이거 봐!"
윤슬은 아예 방 안으로 들어와서 류지우의 이마에 터업- 손을 얹었다.
사아아···.
처음 썼을 때보다 숙련도가 쌓여 더 밝아진 빛무리가 류지우의 얼굴이며 몸 전체를 감싸고 느릿느릿 회전했다.
따뜻한 감각이 퍼지는 느낌은 지우 자신이 본인에게 힐을 걸 때와 비슷했다.
"봤지?"
윤슬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거두려고 했지만, 류지우가 그 작은 손을 거칠지 않게 붙잡아 꼼꼼히 살폈다.
"으응···?"
"어디 아픈 곳은 없니?"
"난 멀쩡한데!"
윤슬이 괜찮다고 했는데도 지우는 자신이 가진 회복계 스킬을 모조리 아이에게 쏟아부었다.
윤슬이 주는 힐을 받고 몸이 거의 멀쩡해졌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저씨, 나 잘했지!"
"잘하긴 했는데··· 이리 와 봐."
유안은 윤슬을 들어 안고 류지우가 했던 것처럼 아이의 몸을 확인했다.
마나를 과하게 써서 무리한 흔적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윤슬은 스킬을 쓰기 전보다 팔팔해진 모습으로 다리를 동동거렸다.
칭찬을 바라는 아이의 머리를 유안이 살살 쓰다듬었다.
유안과 윤슬의 모습을 지켜보던 류지우가 아까와는 다른 방향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목소리를 냈다.
"이유안 사장님."
"예, 파트장님."
"설명이 필요한 일이 많은 것 같군요."
류지우는 윤슬이 당연히 유안의 숨겨둔 자식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유안이 아니라고 하긴 했어도 두 사람의 얼굴이 워낙 닮아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숨겨둔 자식이 각성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던 아이였는데 이러면 말이 달라진다.
미성년자가 각성한 사례는 국내에서 처음 보는 것이기에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윤슬, 너는 1층 가서 중앙이랑 놀고 있어. 선생님도 불렀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응!"
선생님은 강해민이었다.
윤슬이 해민을 잘 따르는 편이라서 믿고 맡길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재잘거리던 아이를 내보내고 나니 침실에는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서로 들킬 걸 다 들킨 마당에 더 숨길 것도 없이 솔직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
"그래도 혹시 모르니 등급 측정은 해보는 게 좋습니다. 헌터 디바이스 발급도 정상적인 루트로 받기는 어렵겠지만··· 하나 가져다 드릴게요."
침실에 소파를 깔고 앉아서 기나긴 대화를 나누었다.
류지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어쨌든 정말 사장님 아이는 아니라는 거죠?"
"아닙니다."
"지하에 다른 아이가 더 있지는 않았고요?"
"윤슬이한테도 물어봤지만 살아남은 어린애는 자기 하나뿐이라고 합니다."
다른 아이들이 없었던 아니지만 다 죽었다고 했다.
또래 친구들의 죽음을 담담하게 말하던 아이는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서 풀이 죽은 표정으로 유안의 품을 파고들었다.
윤슬에게 좋은 기억은 아닐 테니 더 깊게 캐묻지는 않았다.
"각성할 때의 마나 폭주를 견디지 못해서 죽었거나, 던전 게이트에서 새어나온 몬스터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이겠군요."
"그것 말고 다른 이유도 많을 겁니다."
지하는 아이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다.
어른들도 삶을 유지하기 힘든데,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의 경우는 오죽할까.
윤슬 또한 어릴 때 각성하지 않았으면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등급 측정기는 내일 출근하는 대로 협회 창고에서 가져오겠습니다."
"내일 출근하십니까?"
"···휴가가 남았기는 한데 정리할 일이 많아서요."
"며칠 더 쉬었다 가시죠. 윤슬이 등급 측정이야 급한 건은 아니고, 파트장님 몸도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서 휴식이 더 필요하지 않습니까."
유안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마음이 혹했다.
류지우의 몸은 평소보다 낫게 느껴질 정도로 피로감도 없이 쾌적한 상태였지만, 그 사실을 굳이 알리지는 않았다.
지우는 머그잔에 남은 우유 몇 모금을 들이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출근은 안 하더라도 처리할 일이 산더미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