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37)

목적지가 부산이니 수창 길드장이 준비해준 전용기에 우르르 올라탔다.

"사장님은 무조건 뒤로 빠져 계셔야 해요! 사실 저희끼리만 가도 충분할 텐데~."

"전투 경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 짐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권재윤의 말대로 후미에 빠져 있기는 할 것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류지우가 당했다는 것이 불길해서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S급 헌터에게만 강력하게 적용되는 스킬에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우리 쪽 파티는 대부분 S급이야. 낮아봐야 A급이고.'

만약을 대비해 하급 헌터 한 명은 있어야 안전했다.

유안은 오랜만에 회귀 전의 지식까지 총동원해 상급 헌터에게 더 잘 듣는 정신계 스킬의 종류를 추려냈다.

가짓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가 E급이니까 물리 공격만 잘 피하면 돼.'

유안은 초조한 마음으로 전투복 옷깃을 좀 더 여몄다.

류지우의 생체 정보가 마지막으로 끊어진 곳은 광안리역 근처였다.

"지하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사장님은 여기 계세요! 저희가 확인하고 올게요."

"흩어지면 더 위험할 겁니다. 같이 갑시다."

이곳은 중앙 던전 근처와 다르게 지리적으로 불리한 요소가 많았다.

부산 지하철 노선을 잘 몰라서 일일이 확인하며 다녀야 하고, 평소에 이 주변이 어떤 분위기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 무리에서 떨어지는 순간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던전 게이트는 저 멀리인데 신호는 이 근처에서 끊겼네요. 아무래도 사람한테 당한 게 맞겠죠?"

"곳곳에 생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지하 헌터들이 있을 겁니다."

원래부터 부산을 거점으로 지내던 지하 헌터들인지, 위에서부터 내려온 자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안은 S급 헌터들에게 완벽하게 둘러싸인 채 걸어가며 인벤토리 가득 챙겨온 보라색 가루를 뿌렸다.

"여러분 몸에 묻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마나를 흡수하는 능력을 가진 핵 가루를 뿌려두면 강력한 공격 스킬을 사용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지 마세요.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시야가 뿌옇다.

다행히 핵 가루가 닿는 순간 안개는 스르르 사라졌지만, 이런 스킬을 사용한 범인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하암~. 좀 졸린 거 같은데···."

"잠들면 버리고 간다."

선두에서 걷던 권재윤에게서 스킬에 걸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서혁이 권재윤의 뒷덜미를 꽉 붙잡아 잠을 깨웠다.

"악! 아파!"

"정신 똑바로 차려. 너무 앞서 걷지 말고."

"알았으니까, 놔! 놔 줘!"

"싫은데."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그래도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온 덕에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던 무리는 어느 순간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안개가 더 짙어졌습니다."

습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희뿌연 안개가 그들에게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중앙이가 준 선물을 꺼내 꽉 말아쥐었다.

팅!

화살이 지하철 바닥에 빗맞는 소리가 났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이유안을 중심에 둔 진형을 유지한 채, 수창과 새로의 길드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화살이 날아온 쪽을 경계했다.

이윽고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독을 묻힌 화살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어딜!"

새로 길드의 S급 헌터가 튼튼한 실드를 생성했다.

대부분의 화살은 실드에 부딪혀 튕겨나가고, 용케 틈새로 들어온 것들은 다른 헌터들이 근거리 무기로 살벌하게 쳐냈다.

덕분에 유안은 전쟁의 한복판에 있음에도 안전했다.

'그래도 안개를 빨리 걷어내지 않으면 우리 쪽이 불리해질 거야.'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안 된다.

E급 헌터인 유안에게는 별 영향을 주지 못하는 스킬이었으나 함께 온 상급 헌터들의 몸은 점차 무거워질 것이다.

'저쪽에서 계속 안개가 생성되고 있어.'

유안은 철길 너머의 어둑한 공간을 응시하며 팔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중앙 카페의 마스코트가 준 선물을 있는 힘껏 던졌다.

따악-!

경쾌한 소리가 들리더니.

"악!"

걸걸한 비명과 함께, 켜켜이 쌓여 있던 안개가 한여름의 눈처럼 스르르 녹아내렸다.

짙은 연무에 숨어 있던 상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잠자는 게이트 앞의

안개가 걷히자 그 뒤는 속전속결이었다.

지하철의 지형지물에 잠복해 있던 지하 헌터들을 모조리 끌어내니 그 수가 열댓 명을 족히 넘어섰다.

철길 뒤쪽에서 수면, 환각, 마비 효과가 있는 안개를 생성하고 있던 헌터는 무려 S급이었다.

'그래도 전투 계열 스킬이 없어서 다행이야.'

강력한 정신계 스킬을 가진 만큼 전투 쪽으로는 발달하지 못했다.

S급이니 타고난 신체 조건이 우월하기는 했으나 수창 길드의 권재윤과 조서혁이 한꺼번에 달려드니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파트장님만 찾으면 되네요!"

권재윤이 헌터용 특수 수갑을 S급 헌터에게 채우며 외쳤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요."

유안이 나서자 조서혁이 그 뒤를 따랐다.

남은 일행은 주변에 매복한 적이 더 없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협회의 개는 이미 죽었어!"

뒤에서 악에 받친 외침이 들렸지만 유안은 가볍게 무시했다.

'안 죽었어.'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유안의 헌터 디바이스 화면의 깜빡임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헌터 KHA-DMD-D1의 생체 정보를 로드 중입니다. 이 작업에는 몇 분 가량이 소요되며 디바이스가 자동으로 재부팅될 수 있습니다.]

안개가 사라진 후에 바로 떠오른 메시지였다.

S급 헌터에게만 유독 강력한 효과를 보이는 안개에 류지우도 큰 영향을 받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해.'

효과가 강한 정신계 스킬일수록 스킬 발동에 제약이 많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방금 이유안이 던진 핵을 맞자마자 안개가 사르르 흩어진 것처럼, 정신계 스킬을 유지하려면 시전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게다가 스킬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스킬에 잘 맞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야 했다.

'스킬이 강력하게 발동되기 위한 조건이 뭐였을까.'

S급 지하 헌터는 그 조건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잠시만요. 좀 이상합니다."

철길을 따라 걷던 조서혁이 유안의 앞을 막아섰다.

"물이 있습니다. 바닷물 같은데···."

철길의 고도가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하면서 바닥에 찰랑거릴 정도로 물이 고였다.

노후한 지하철 벽에서 새는 것이라고 치기에는 물이 맑았다.

심해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듯 투명한 푸른색.

이상함을 느끼던 차, 유안의 시야에 파란색에 가까운 해초 하나가 들어왔다.

유안은 해초를 뽑아 이리저리 살피고 나서 확신했다.

"던전에서만 자라는 해초입니다."

바다 근처 던전이거나, 아예 수중 던전인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해초였다.

'홍소라처럼 던전화 스킬을 가진 사람이 또 있나?'

던전 내부가 아닌 곳에서 던전산 해초가 잘 자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었다.

지하철 역과 역을 잇는 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해초를 비롯해 각종 던전산 해양 식물들이 무성해졌다.

"안 되겠습니다. 이유안 씨는 여기 계세요."

어느새 바닷물도 무릎 위까지 차오르려 했다.

조서혁은 유안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혼자 안쪽에 들어가기를 자처했다.

[헌터 KHA-DMD-D1의 생체 정보 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때마침 류지우의 정확한 위치가 유안의 헌터 디바이스에 표시되기 시작했다.

"파트장님은 이 근처에 있을 겁니다."

눈에 보이기 시작해야 하는 거리인데 해조류가 너무 빼곡해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유안은 일단 조서혁의 말대로 뒤로 빠져서 다른 S급 헌터들을 불러오기로 했다.

"서혁 씨도 더 들어가지 말고 여기 계십시오."

"그냥 같이 나가요. 불안하니까."

E급 헌터를 혼자 내보내기에는 영 찝찝했다.

조서혁은 유안을 보호하듯 옆에 바짝 붙어 선 채로 왔던 길을 함께 되돌아왔다.

권재윤이 벌써 다녀왔냐며 반겨주려다가 류지우가 없다는 걸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우리 딱딱한 공무원님은? 못 찾았어?"

"권재윤, 그리고 수중 던전 경험 있는 분들 앞으로 나오십시오."

조서혁은 새로 길드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수창 길드의 던전 공략 팀 매니저답게 공략 파티를 짜는 것이 능숙해 보였다.

여섯 명의 파티원이 모이자 서혁은 짧게 철길 안쪽 상황을 브리핑하고 그들을 이끌었다.

선두는 방어력과 공격력이 모두 높은 권재윤이 맡기로 했다.

"공무원님 데리고 올게요!"

재윤이 발랄하게 외치고 손을 팔랑거렸다.

유안도 마주 인사해주었다.

*

다행히 공무원 구출 파티는 성공적으로 공략을 마치고 돌아왔다.

조서혁의 어깨에 대롱대롱 들쳐메진 류지우는 눈을 감은 채였다.

"물 속에 완전 파묻혀 있었어요!"

"정신을 잃어가는 중에도 물 저항력을 높여주는 실드와 버프 스킬을 여러 겹 중첩해 걸어두었나 봅니다. 안 그랬으면 산소 부족으로 벌써 죽었어요."

조서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유안에게 지우를 넘겼다.

'무거운데··· 그냥 끝까지 들고 있지.'

그래도 살아있는 건 다행이었다.

류지우의 숨결을 확인한 유안은 일단 그 몸을 바닥에 곱게 눕혔다.

기절한 채로도 찌푸려진 미간은 주먹에 힘을 실어 꾹꾹 눌러버렸다.

"근처 해변에 던전 하나 있는 거 아시죠. 거기서 나오는 바다거북 몬스터가 지하철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던전산 해초가 자라난 것도 그 몬스터의 영향인 것 같아요."

"해변 던전이 터졌다는 소식은 들은 적 없으니··· 이 자들이 일부러 몬스터를 게이트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이겠군요."

정신계 스킬을 사용하기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특정 던전 내부에서만 강력한 효과를 보이는 정신계 스킬일 겁니다."

"스킬 쓰겠다고 별 짓을 다 하네요."

조서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지하 헌터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사이 기지개를 켠 권재윤이 찡찡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이제 다 끝난 거죠? 돌아가면 돼요? 중앙 카페 가서 쿠키 먹고 싶은데!"

"가만히 좀 있어. 이 헌터들 어떻게 할지 먼저 정하고."

지하 헌터들은 몇 시간 후에 깨어날 것이다.

헌터용 수갑을 채워놓기는 했으나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람들, 헌터 디바이스를 갖고 있었습니다."

"헌터면 당연히 갖고 있는 거 아녜요? 그게 왜요~?"

"지하에 숨어 사는 헌터들은 협회에 등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디바이스도 없습니다."

지상에서 평범하게 생활하면서 지하를 아지트로 이용하고 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덕분에 골치가 아파졌다.

'협회에 보고하면 원래부터 지하 헌터였던 것처럼 포장해서 위험성을 강조할 거야.'

마침 협회의 파트장을 공격하기까지 했으니 세간에 공포를 심어주기는 더 좋았다.

'그리고 협회에 알리지는 않더라도 서울까지 데려가는 것 자체가 문제야. 수갑을 채웠다고는 하지만 깨어나면 무슨 난동을 부릴지 모르고.'

적을 붙잡기는 했으나 그 처치가 곤란해졌다.

유안이 골몰하자 조서혁이 그 마음을 알고 수창 길드 지하실을 소개해줬다.

"길드원들이 크게 잘못하면 잠깐 들어가는 곳인데 사람 가둬두기에는 딱입니다. 길드장님이 직접 감시하시니까 도망칠 수도 없을 거고요."

"좋은 방법이기는 한데··· 그래도 이 근처가 나을 것 같습니다."

서울 쪽에서 붙잡은 게 아니니 멀리 가지 않는 편이 뒷수습에도 좋을 것 같았다.

'류지우가 깨어날 때까지만 가둬두면 되니까.'

이런 복잡한 일은 류지우가 직접 처리하는 게 깔끔할 것이다.

그러니 유안은 지우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맡겨둘 곳을 물색했다.

다행히 며칠 정도라면 부탁할 만한 곳이 있었다.

유안은 헌터 디바이스를 꺼내 비조 길드 직원에게 연락을 넣었다.

*

"좀 젖으셨네요, 사장님. 바다라도 들어갔다 오셨어요?"

중앙 카페에 도착하자 서정원이 커다란 비치 타월을 건네며 물었다.

"완전히 담근 건 아닙니다."

안개 때문에 몸 전체가 눅눅해지기는 했지만 푹 젖은 건 무릎 아래쪽 뿐이었다.

유안은 낑낑대며 업고 온 류지우를 서정원에게 넘겼다.

'지하에 열차 안 다녔으면 오다가 버렸을 거야.'

들고 오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협회 사람을 수창이나 새로 길드에 맡길 수도 없으니 기절한 류지우는 유안이 책임지는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 눕혀둘까요?"

"일단 3층의 빈 방에 두십시오."

"네, 사장님."

생체 정보가 잠깐 끊어질 정도로 위기에 몰렸으니 금방 정신을 차리지는 못할 것이다.

대체 왜 부산까지 갔는지부터 시작해서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단은 환자니까 깨어날 때까지 성실하게 간호해줄 의향은 있었다.

'죽을 좀 끓여볼까.'

카페 주방으로 들어가 도정된 던전산 쌀을 꺼냈다.

'최선진 씨가 아팠을 때 이후로 죽은 처음 끓이는 건가.'

유안은 죽에 필요한 재료들을 도마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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