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이가 다가와서 킁킁 냄새를 맡았다.
"제안서는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근처에 건물을 세우는 건 헌터 협회에 보고해야 하는 사안이라 제게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협회에서는 벌써 허가 내려줬어요! 이것저것 필요한 서류가 많기는 했지만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거더라고요."
"······"
유안은 자신이 제주도까지 가서 그 고생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니티움에는 그것보다 훨씬 쉬운 서류를 요구했나 보다.
"그럼 중앙 카페와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연락 주신 겁니까?"
"저희 이니티움이 파밍 길드거든요. 중앙 카페와 정기 납품 계약을 맺고 싶어서 연락 드렸어요. 길드 건물 이 근처에 세우면 오며가며 의뢰하기도 딱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이니티움 길드장은 중앙 카페의 수요는 물론이고 앞으로 입점할 지하 상가들의 수요까지 충족할 자신이 있다고 떵떵거렸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던전 공략에 앞장서지는 않으니까 길드 랭킹은 낮지만 자본으로 치면 삼대 길드에 맞먹을 걸요? 길드 창고에 있는 것까지 포함해서요."
생각보다 더 괜찮은 제안이었다.
*
공사는 해강특수건설에서 맡아주기로 했다.
이니티움 길드에서는 다른 특수건설 업체를 알아보려 했지만 유안이 반대했다.
"해강이 제일 믿을만 합니다."
그 말에 강해민은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일거리를 잔뜩 쌓아줘도 칭찬 한 마디면 사르르 녹는 해민은 정말이지 다루기 쉬웠다.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인력이나 재료는 이니티움에서 전부 조달할 수 있어요! 길드 건물만 없었다뿐이지 규모가 생각보다 크거든요."
이니티움은 단기 계약직 형태로도 길드원을 많이 고용하는 편이었다.
던전 하나를 파밍할 때 용병을 구하는 일도 잦아 여기저기 발이 넓었다.
초대형 길드만큼 등급이 높은 헌터들이 모인 건 아니었지만 A급 던전까지도 무난하게 파밍이 가능하다고 했다.
일단 길드장은 A급 헌터였다.
"파, 파밍이 그렇게 재밌나요···?"
"네! 당연하죠. 헌터로 각성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매일 하는 걸요!"
마나 저항력 부족으로 던전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내는 홍소라로서는 별세계 이야기였다.
유안은 이니티움 길드장에게서 회귀 전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파밍에 미쳐 살아서 같이 던전 들어가던 동료들에게는 '파친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던전 안 들어갈 거지만.'
카페 재료 수급이 끊이지 않도록 도와줄 협력 길드도 생겼으니 던전에 들어갈 이유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유안은 안온하고 평화로운 제 미래를 그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굴러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공사 들어가기 전에 몸보신 한 번 하는 건 어떤가요? 이번에 닭이 좀 많이 들어왔어요."
장다온이 말했다.
레스토랑 브레이크 타임과 중앙 카페 브레이크 타임을 일부러 같게 설정해서 장다온은 종종 휴식을 취하러 중앙 카페에 올라오고는 했다.
중앙 카페 근처에 길드 건물이 한 채 지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장다온 셰프는 만찬회부터 떠올렸다.
"큰일을 하기 전에는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하니까요."
"예, 다온 씨 말이 맞습니다."
"당장 오늘 저녁 어때요? 사람들 부르는 건 유안 사장님이 맡아주시고요."
속전속결로 세워지는 만찬회 일정에 유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능한 셰프가 몇 명이나 생겼으니 저녁을 성대하게 차리는 것에도 부담이 없었다.
이유안은 곧장 헌터 디바이스로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일을 하게 될 사람들뿐 아니라 그간 중앙 카페에 도움을 많이 줬던 사람들까지 부르니 뒷마당이 금세 북적거렸다.
'미리 넓혀둬서 다행이다.'
유안은 전용 소파에 앉아서 뒷마당 전체를 둘러보았다.
중앙 카페 직원들과 지하 레스토랑 셰프들은 장사 마감을 하느라 가게 내부에 들어가 있었다.
'장다온이 재료 손질은 다 해뒀다고 그랬으니까 요리는 빨리 완성되겠지.'
닭 요리를 한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정확히 어떤 요리를 내놓을 것인지는 듣지 못했다.
유안은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치킨을 떠올리며 설렘을 느꼈다.
장다온 셰프의 손에서 튀겨지는 거라면 신발을 튀겨도 맛있을 지경인데 육질 좋은 던전산 닭을 재료로 쓰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유안이 맛있는 상상으로 행복해하고 있는데 뒷마당의 S급 헌터 몇 명이 어딘가로부터 연락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재윤 씨, 어디 가십니까?"
유안은 가까이 있던 권재윤에게 물었다.
재윤은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으로 땅 쪽을 가리켰다.
"셰프님이 잠깐 내려와서 재료 옮기는 것 좀 도와달래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아~!"
신나게 외친 권재윤은 높은 담을 훌쩍 넘어서 지하로 내려가버렸다.
그리고 다시 나타날 때는···
"으, 으아··· 저게 뭐야······."
홍소라가 뒷걸음질 칠 정도로 커다란 던전산 생닭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에이, 그렇게 징그러워하면 섭섭해요! 이거 제가 힘들게 잡은 괴물 닭인데!"
권재윤은 일반 닭 크기의 백 배는 될 것 같은 식재료를 트로피처럼 쭉 내밀며 자랑스러워했다.
'저걸로 치킨 만들면 대체 몇 인분이야.'
유안은 군침을 꼴깍 삼키며 야들야들한 닭살을 응시했다.
치킨 파티의 불참자
'류지우가 연락을 안 받아.'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를 남겼지만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는 없었기에 유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 원래 가끔 그래요."
유안의 연락을 받자마자 곧장 달려온 류민희는 지우가 가끔 그럴 때가 있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별일은 없겠지.'
회복계이긴 해도 S급 헌터다.
기본적으로 몸이 튼튼할 테니 어디 아프거나 다쳤을 리도 없다.
유안은 걱정을 내려놓고 더 부를 사람이 있는지만 확인했다.
'수창 길드장은 안 불렀는데 왔네.'
수창과 새로 길드장은 여전히 사이가 별로인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래도 싸움이 벌어지거나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수창 길드장 진 선은 길드원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노는 중이었고, 새로 길드장 차건오는 중앙이의 훌륭한 장난감으로 활약 중이었다.
뒷마당을 둘러보던 유안에게 류민희가 가까이 다가왔다.
"열차 운전할 만한 사람 구했어요. 비각성자이긴 한데 믿을 만한 사람으로."
"류민희 씨와 친분이 있는 분입니까?"
"전에 같이 일하던 직장 동료인데 열차 디자인 보고 반했나 보더라고요. 방송 나간 날 먼저 연락이 와서."
류민희는 유안에게 운전사의 프로필을 전달하며 덧붙였다.
"안전 운전 하나는 자신 있는 사람이니까 사장님이랑도 잘 맞을 거예요."
"한 사람이 계속 운전하기는 힘들 테니까 두 분 정도 더 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케이~. 맡겨만 주세요!"
민희는 전 직장 동료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 곧바로 구인 글을 올렸다.
빠르게 들어오는 연락에 류민희가 뒷마당 구석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장님! 주현이한테 맡겨둔 거 있는데 받아가세요!"
잠깐 뒤를 돌아보며 외치는 소리에 유안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뭘 맡겨뒀다는 거지?'
따로 부탁한 게 없었기에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김주현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민희랑 제가 엄청난 합작품을 만들었거든요."
"···뭡니까?"
"짠!"
주현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은 중앙 열차의 미니어처 버전이었다.
동력원은 없지만 바퀴가 달려 있어서 움직이기 수월한 어린이용 장난감 열차.
윤슬이 자기 거라는 걸 알고 곧장 뛰어왔다.
"내 집!"
윤슬 정도의 몸집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기는 했다.
열차에 곧장 올라탄 이윤슬이 고개를 들어 유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알았어."
"히이."
유안은 윤슬이 탄 열차를 천천히 밀어주기 시작했다.
뒷마당 가장자리를 크게 돌며 움직이니 여기저기서 열차가 멋지다는 말이 들려왔다.
어른들의 칭찬에 신이 난 어린이는 더 빨리 밀어달라고 재촉했다.
"아저씨 너무 느려!"
"······."
팔이 저릿저릿할 때까지 열차를 밀어주고 나자 저녁 메뉴들이 속속 완성되어 뒷마당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를 맡은 윤슬은 던전 부산물로 만든 장난감 열차에서 뛰쳐나왔다.
드디어 해방된 유안은 열차를 뒷마당 구석에 주차하고 소파 자리에 널부러졌다.
"오늘 완전 치킨 파티네요! 맛있겠다아······."
치킨 샐러드, 수프, 샌드위치 등의 가벼운 요리부터 등장했다.
정태영은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수프부터 격파하기 시작했다.
먹는 속도가 남다른 태영이 메뉴를 하나씩 다 맛보기도 전에 새로운 요리들이 테이블을 채웠다.
"와아! 삼계탕!"
닭으로 할 수 있는 요리는 정말 다 선보일 생각인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요리가 끝없이 이어져 나왔다.
'몸보신에 삼계탕이 좋긴 하지.'
유안은 야들야들한 살결을 찢어 국물과 함께 입안에 넣었다.
열차를 끌어주느라 쌓였던 피로가 훌훌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삼계탕을 어느 정도 먹었을 때에는 오늘의 메인 메뉴가 등장했다.
"···칠면조입니까?"
노릇노릇하게 통으로 구워진 닭은 던전산인 걸 감안하더라도 크기가 엄청났다.
아까 권재윤이 자랑하던 괴물 닭보다도 컸다.
"보스 몬스터래요, 사장님."
서정원이 친절하게 요리 재료에 대해 설명해줬다.
닭 형태의 몬스터가 주로 나오는 던전의 보스 몬스터로 나오는 황금 닭이라고 한다.
'황금빛이 살짝 돌기는 하네.'
중앙 카페에 모인 사람들 전부를 배불리 먹이고도 남을 크기의 로스트 치킨이 테이블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하자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며, 명절 같기도 하네요···."
홍소라는 닭튀김 접시를 테이블 곳곳에 놓으며 말했다.
평소 한꺼번에 모이기 힘들던 사람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명절과 닮아 있었다.
"명절이면 용돈이 빠질 수 없지! 윤슬, 이리 와!"
"용돈이 뭔데?"
명절 용돈을 겪어본 적 없는 아이는 손에 닭다리 하나를 들고 류민희에게 향했다.
민희가 지갑에서 지폐를 잔뜩 꺼내 건네자 윤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윤슬이 까까 사먹으라고 주는 거야."
"으응···?"
"자, 얼른 한 바퀴 싹 돌자!"
"알았어."
윤슬은 뭔지 모르겠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뒷마당만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녔을 뿐인데 어느새 윤슬의 장난감 열차에 돈다발이 가득 쌓였다.
처음에는 주머니와 옷 안쪽에 넣어보려고 했는데 그걸로는 턱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 집······."
돈의 가치를 잘 모르는 윤슬은 자신의 열차가 지폐에 잠식당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던 유안이 슬그머니 윤슬의 뒤로 다가갔다.
"윤슬."
"응?"
"이거 여기에 계속 둘 수 없으니까 아저씨가 맡아 놓을게. 괜찮지?"
"웅, 좋아!"
윤슬은 해맑게 웃으며 받은 용돈을 모조리 유안에게 넘겼다.
"사, 사장님···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요···?"
"많이 당해보셔서 잘하는 거 아닐까요?"
중앙 카페 직원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 귀로 흘려버렸다.
윤슬 덕에 유안의 지갑만 풍성해졌다.
*
이니티움 길드 건물은 금방 세워졌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길드원들이 찾아와 공사 인력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길드장의 말대로 길드원들이 다들 파밍에 한 가락씩 하는 사람들이라서 재료가 부족할 일도 없었다.
"던전 부산물 화수분이 있는 줄 알았다."
건설 현장을 지휘한 강해민은 이니티움 길드를 그렇게 표현했다.
"해강이랑도 장기 납품 계약 맺었다며."
"어. 건축에 쓰이는 부산물들은 카페랑 레스토랑에 필요 없으니까 남아돌 거라고 해서."
중앙 카페와 장다온의 레스토랑이 필요로 하는 던전산 식재료는 이미 납품 계약을 했다.
이니티움 길드장은 중앙 카페 근처에 길드 자리를 내어주어서 고맙다며 먼저 독점 납품 이야기를 꺼냈다.
'수요가 점점 늘어날 테니까 물건을 독점으로 받으면 좋긴 하지.'
지하의 건물에도 하나둘 주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유안은 이니티움 길드가 제공하는 던전 부산물을 지하 상가에도 충분히 제공할 생각이었다.
"옷가게도 들어온다며."
"아··· 응."
그리고 헌터 전투복을 전문으로 만드는 휴멜과도 결국 임대 계약을 맺었다.
휴멜이 너무 많은 건물을 차지하면 다양성 유지에 좋지 않았으니 지하 상가 절반을 빌려주는 건 거절했다.
대신 레스토랑 다음으로 제일 큰 건물을 내어주기는 했다.
"저 꽃도 거기 대표 디자이너가 보낸 거냐?"
"······."
해민이 중앙 카페 1층 홀의 거대한 화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맞았다.
휴멜의 대표 디자이너는 아무런 기념일도 아닌데 자꾸 꽃다발을 보내왔다.
카페 직원들은 꽃 덕분에 카페 분위기도 좋아졌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유안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자꾸 만나달라고 하는 것도 귀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