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37)

제자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겠다고 느낀 장다온은 결국 한숨을 쉬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을 포기했다.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제자들을 애써 무시한 채 다온도 본격적으로 내부 주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조리기구 사이즈가 큰 편이네요."

"저번에도 보셨겠지만 던전산 식재료들은 기본적으로 크기 큰 것이 많습니다. 그 크기를 감당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겁니다."

"많은 양을 한꺼번에 만들기에는 좋겠네요."

"지금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유안은 제 몸통 만한 팬을 장다온에게 건네며 물었다.

다온은 요리하는 사람답게 뛰어난 근력으로 어렵지 않게 팬을 들었다.

"무게 괜찮습니까?"

"묵직하긴 한데 못 다룰 정도는 아니에요."

"지금은 일단 그걸 쓰시고, 금방 더 가벼운 걸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요즘 김주현이 열차 제작에 참여하느라 바빠서 의뢰를 못 넣고 있었다.

모셀 광산에서 가장 비싸고 가벼운 철을 사용하면 지금보다 훨씬 편하게 쓸 수 있는 조리기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팔에 장착하는 A급 방어구를 꺼냈다.

방어구를 받은 다온은 헤매지 않고 그것을 오른팔에 장착했다.

"던전산 식재료들은 날카롭거나 억센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방어구가 A급까지는 막아줄 겁니다. 만약 S급 재료가 들어오면 제가 따로 S급 헌터에게 부탁해 손질해서 드리겠습니다."

"신경을 정말 많이 써주시네요. 고마워요."

"함께 일하게 될 사이이니 당연히 해드려야 하는 일입니다."

유안은 그렇게 말하고 여분의 방어구를 제자들에게도 나눠주었다.

혹시 몰라 인벤토리에 여러 개 넣어둔 보람이 있었다.

"스승님! 저희도 돕겠습니다!"

"스승님, 오늘은 뭘 만드실 건가요?"

"흐헝··· 전 스승님과 함께 요리할 수만 있으면 뭐든 다 좋아요."

여태 울던 제자도 눈물을 닦고 요리할 준비를 마쳤다.

아직 훌쩍거리기는 했으나 아까보다는 상태가 훨씬 나아졌다.

제자들이 각자 조리기구 하나씩을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장다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다온은 단호하고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함께 요리할 생각 말고 여러분이 자유롭게 해 보세요."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건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들의 취미는 짱다TV의 영상을 보며 따라서 요리하는 것이었고, 가장 하고 싶은 건 스승님을 도와 함께 요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승님과 한 주방에 있는데도 다른 요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자 세상이 무너지고 말았다.

"스승님!"

"스승님?"

"스승님······."

제자들이 충격을 받든 말든 다온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장다온은 벌써 주방 냉장고의 재료를 체크하며 무슨 요리를 할 것인지 구상하기 시작했다.

허망한 표정으로 냉정한 스승님을 바라보던 제자들도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스승님께서 주신 이 시련! 이겨내 보겠습니다!"

"이건 어쩌면 스승님이 기회를 주신 걸지도 모르죠!"

"제일 훌륭한 요리를 만든 사람을 진짜 제자로 받아주시는 건가요···?"

이번 요리를 스승님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경연 무대라고 생각한 제자들은 열의를 불태우며 재료를 선정했다.

불꽃 튀는 경쟁 심리에 주방 안이 후끈해졌다.

'심사위원 셋은 있어야겠지? 또 누굴 부르지.'

유안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주방 바깥의 홀에 앉아서 요리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

이유안은 요리가 만들어지는 동안 잠시 자리를 비웠다.

헌터가 아닌 비각성자 심사위원을 모집하려다 보니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지나치게 한정적이었다.

결국 유안은 오랜만에 누나들에게 연락했다.

운이 좋게도 큰누나와 작은누나 둘 다 쉬는 날이었다.

게이트 제한 구역 앞에서 누나들을 맞이한 유안은 잔소리부터 한 바가지 들었다.

"막내야, 일주일에 한 번은 연락하라고 하지 않았었니?"

"일이 바빠서······."

"유안아, 언니랑 나는 한가해서 여기 왔을까?"

"······앞으로 연락 진짜 자주 할게요."

새끼손가락 걸고 꼭꼭 약속까지 한 후에 누나들의 화가 누그러졌다.

유안은 큰누나와 작은누나를 이끌고 지하철 계단 쪽으로 향했다.

누나들은 잠깐 걸음을 멈추며 당황했다.

"여기 들어가면 안 되는 곳 아니니?"

"맞아. 던전 터지면서 지하철 거의 다 폐쇄했잖아."

"이번에 보수 공사 했어. 전보다 더 튼튼하고 안전하게."

이유안은 유경과 유월을 안심시키고 계단을 앞서 내려갔다.

"지하도는 정말 오랜만이네."

"유안이 학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하 상가 갔었는데."

"나도 누나들이랑 지하 상가 구경했던 거 기억 나."

"막내는 맨날 다리 아프다고 징징댔지."

"그치, 그래서 언니가 계속 업어줬잖아."

"내가 언제···!"

유안이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대해 소심하게 반박했지만 누나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냥 입 다물고 길이나 안내하는 쪽을 택했다.

한참 유안의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던 유경과 유월은 보드라운 분위기의 지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지하 같지 않고 귀엽게 잘 꾸몄네. 막내 취향이지?"

"유안이가 이런 거 딱 좋아하잖아. 놀이동산 분위기, 파스텔 톤, 몽글몽글한 느낌."

"내가 디자인한 거 아니에요."

지하도 내부 디자인도 전적으로 해강에서 맡았다.

물론 디자인 시안을 고를 때 김주현과 홍소라의 입김이 좀 들어갔는지 전체적으로 깜찍한 결과물이 나오기는 했다.

이것도 나쁘지 않았기에 유안은 별다른 클레임을 걸지 않았다.

중앙 카페 근처 역까지 걸어오자 레스토랑 건물이 보이며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누나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레스토랑의 외관부터 꼼꼼히 살폈다.

"튼튼해 보이는구나."

"깔끔하게 잘 지었네."

"들어가요, 누나들. 같이 맛있는 거 먹자고 부른 거야."

레스토랑 내부로 들어가자 가장 긴 테이블에 화려하게 차려진 요리들이 보였다.

그리고 오늘의 셰프들은 자신이 만든 요리 앞에 서 있었다.

긴장하지 않은 건 가장 끝에 선 장다온 뿐이었다.

"스승님과 경쟁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스승님의 요리가 항상 최고이긴 하지만, 오늘 제가 만든 요리도 만만하지는 않을 거예요!"

"최선을 다하긴 했는데··· 스승님을 어떻게 이겨요, 흐윽······."

다온은 참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어느새 자연스럽게 셰프 네 명이 함께하는 요리 경연 대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생방송

장다온의 제자들이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으니 유안도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누나들 앞이라 티는 내지 못하고 모든 것이 제 계획 아래의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유안은 먼저 근처 테이블 자리를 점찍고 음식을 덜어 먹을 접시와 수저 등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뷔페 형식으로 모든 음식을 조금씩 맛보고 평가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재미있는 걸 하는구나, 막내야. 네가 고용한 요리사들이니?"

"음··· 네······."

아직 완전히 고용한 건 아니지만 대충 비슷했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유안아, 이거 촬영도 하는 거야?"

둘째 누나 유월은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상황을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유월의 말대로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법한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기는 했다.

'오해 할만도 하지.'

그러나 일단 촬영 계획은 없었다.

우승자를 뽑는다쳐도 상금이나 상품 같은 것도 생각해두지 않았다.

급조된 파일럿 편성도 이것보다는 체계적일 것이다.

그때 레스토랑 바깥에서 우당탕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

문이 거칠게 열리고 등장한 건 정태영이었다.

"안녕하세요, 싸장님!"

태영은 밝게 인사한 후에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음식 냄새를 맡았다.

"역시 와 보길 잘했어! 짱다가 맛있는 거 만들었을 줄 알았지!"

방금 중앙 카페에 방문했던 태영은 유안을 비롯한 사람들이 지하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참이었다.

"후후··· 이번 사건에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 했죠!"

본능적으로 음식이 이끄는 곳까지 온 태영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은 태영이 마음껏 식사할 상황이 아니었다.

"태영아, 네 건 나중에 따로 만들어줄게."

장다온이 태영을 부드럽게 타일렀다.

"저기 손님들도 계시잖아."

그제야 태영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유안의 누나들이 있는 걸 확인했다.

지난번에 한 번 본 적이 있어서 정태영은 금세 유경과 유월을 알아보았다.

"오랜만이에요!"

반가운 티를 팍팍 내며 자주 좀 놀러오라고 하는 태영에게 누나들도 웃어주고 말았다.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정태영이었다.

"그럼 음식은 못 먹더라도! 뭔가 재밌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으니까 제가 생방 좀 켜도 되나요, 싸장님? 다른 분들 얼굴은 안 나오게 할게요!"

"휴튜브 방송 말입니까?"

"네에!"

유안은 정태영이 요즘도 쭉쭉 성장 중인 휴튜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구독자 수가 나날이 증가했고,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알려지기 시작해 전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태양TV에 돈을 주고서라도 자기 가게를 촬영해 달라고 부탁하는 가게가 많은 상황에, 아무런 대가 없이 촬영해주겠다니.

'지하도 홍보에 엄청 도움 되겠는데.'

어차피 류지우에게 말해서 헌터 협회로부터 재개통 프로젝트의 홍보 권한을 가져왔으니 정태영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 있었다.

휴튜브 홍보는 태영에게 맡기고, 헌터그램은 소라의 화려한 인터넷 언변에 기대면 완벽하다.

"누나들 얼굴만 안 나오게 조심해주시면 촬영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태영 씨, 여기가 지하도라는 것만 생방송 초반에 알리고 시작해주세요."

"아, 그거야 당연하죠! 중간중간 자연스럽게 계속 말할게요!"

태영은 유안의 의도를 바로 눈치채고 눈을 찡긋거렸다.

"그럼 시작합시다."

장다온도 얼굴이 알려진 휴튜버였고, 다온의 제자들 역시 얼굴이 알려지는 데 부담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스승님과 한 화면에 들어갈 수 있어서 좋아했다.

"안녕, 여러분! 갑자기 생방 알림 가서 놀랐죠? 오늘은 아주아주 특별한 방송을 진행할 건데요!"

자신의 헌터 디바이스로 방송을 시작한 태영이 매끄럽게 대사를 쳤다.

평소 절친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다온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송 컨셉이 요리 경연이라고 알려지자 시청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좋은데?'

유안은 태영이 사회를 봐주는 대로 이동했다.

잘 차려진 요리 앞에서 가장 먹어보고 싶은 것을 먼저 고르는 순서였다.

다온의 제자들이 만든 것은 스테이크, 파스타, 피자로 전형적인 이탈리안 레스토랑 메뉴였다.

모두 던전산 식재료를 써서 만들었기 때문에 일반 음식과 조금씩 모양새가 다르다는 것만 빼면 크게 눈길을 끌지는 않았다.

'평범과 특별을 적당히 섞었다는 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어.'

던전 부산물에 익숙한 헌터들과 다르게 비각성자들은 그것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다.

너무 튀는 음식을 만들어 팔면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런데 저건 뭐지?'

장다온 앞의 접시에는 동그랗고 노릇노릇한 구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볼링공처럼 생겨서 툭 치면 데굴데굴 굴러갈 것 같았다.

'진짜 뭐지···?'

유안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볼링공 요리에 가장 먼저 다가갔다.

그 순간 정태영이 센스 좋게 다가와 방송을 진행했다.

"중앙 카페의 싸장님께서는 우리 짱다TV의 장다온 요리연구가께서 만든 음식을 선택하셨습니다! 가장 먹어보고 싶은 음식으로 고른 이유 좀 설명해주시겠어요?"

"···신기하게 생겨서 선택했습니다."

유안이 사실대로 말하자 채팅창이 웃음으로 도배되었다.

명색이 요리 경연이니 좀 더 고차원적인 이유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색달랐다.

그리고 유경은 스테이크, 유월은 파스타를 택했다.

피자를 만든 제자는 혼자만 선택받지 못하자 다시 울상을 지었다.

"제가 심사위원이었으면 무조건 피자부터 골랐을 테니까 실망하지 마세요! 아직 맛은 보지도 않았으니까요!"

피자 먹방만 수십 번을 찍었던 정태영이 울보 제자를 능숙하게 위로했다.

"자, 그럼 오른쪽 끝에 있는 음식부터 차례로 시식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태영은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일부러 장다온의 음식을 맨 마지막으로 두었다.

*

"시, 시청자 수 대박이네요······."

때마침 브레이크 타임을 맞은 중앙 카페에서도 태양TV를 큰 화면에 띄워놓고 함께 시청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홍보 효과도 확실하겠어요. 사장님 안목은 역시 탁월하네요."

"······장다온 씨가 만든 건 무슨 요리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방재이가 화면 속의 동글동글한 구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서정원이 웃으며 자신이 예측한 것을 공유해주었다.

"장다온 씨는 각성자와 비각성자 가리지 않고 반응이 좋을 음식을 만들었을 거예요. 요리에 대한 감이 워낙 뛰어난 분이시니까요."

정원도 요새 다온에게 간단한 요리 몇 가지를 배우고 있었다.

덕분에 중앙 카페의 점심, 저녁 식탁이 나날이 다채롭고 풍성해졌다.

"그, 그런데 사장님 얼굴 나와도 되는 거예요···? 시, 시청자들 반응이 좋긴 하지만······."

"사장님 가족분들 얼굴은 안 나오게 찍고 있는 걸 보니까 방송 시작 전에 태영 씨가 사장님께 허락 구했을 거예요."

"······채팅에 사장님 칭찬이 많습니다."

재이의 말대로 카메라에 유안의 얼굴이 비춰질 때마다 채팅창에서 난리가 났다.

-중앙 카페 왜 유명한가 했는데 사장 때문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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