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37)

'기다리지, 뭐.'

류지우는 카페 근처에 자신도 털썩 주저앉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한편, 새벽에 깬 윤슬에게 꿀 탄 우유를 먹여서 다시 재우는데 성공한 유안은 3층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아이는 어떻게든 재웠는데 정작 잠이 다 달아난 건 자신이었다.

복도에 난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면 중앙 카페 근처의 땅이 한눈에 보인다.

'나중에 건물을 더 세우면 이 시간에도 깨어있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거리겠지.'

유안은 중앙 카페를 중심으로 하여 지금보다 더 발전할 미래를 그리며 잔잔하게 미소했다.

상상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먼 곳을 바라보던 유안의 시선이 차츰 카페 건물로 가까워진다.

'응?'

아직 오픈하려면 한참 남은 카페 앞에 사람이 셋이나 보였다.

'저건 류지우인 것 같은데··· 나머지 둘은 뭐야? 시체······?'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눈까지 곱게 감은 채였다.

미동도 없는 모습을 보니 산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유안은 침착하게 헌터 디바이스를 꺼냈다.

그런데 그때, 시체인 줄만 알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살짝 뒤척였다.

112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유안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헌터들

해가 뜨기 전이라 아직 쌀쌀한 새벽 날씨에 유안은 1층에 있던 담요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서정원이 오늘도 일찍 오겠다고 말했었지만, 유안이 부득불 말렸기 때문에 건물 전체가 조용했다.

평소보다 유독 크게 울리는 풍경 소리에 류지우도 단번에 고개를 돌렸다.

유안은 느린 걸음으로 지우 쪽에 다가가 몇 미터 거리를 둔 채 멈추었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파트장님."

"쉬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뭡니까?"

"충분히 짐작하셨을 텐데요."

지우는 설명 대신 그렇게만 말했다.

'지하의 헌터들인가 보구나. 이렇게 빨리 발견할 줄은 몰랐는데.'

협회에 알리지 않은 건이니 혼자 힘으로 지하를 조사하고 다녔을 텐데, 충분한 인력 없이 시작한 일치곤 진행 속도가 빨랐다.

유안은 새삼 S급 헌터의 추진력에 감탄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래도 하루를 통으로 샜는데 피로감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유안은 인벤토리에 넣어둔 건강 주스를 꺼내 지우에게 건넸다.

우주의 색을 닮은 그것은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맛을 자랑했다.

"···감사합니다."

지우의 인벤토리에도 지난번 마시고 남은 주스가 몇 병 있었지만, 일단은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나중에··· 정말 더 지쳤을 때 마시기 위해 인벤토리에 쟁여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안이 지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안 드십니까? 피곤해 보이시는데."

아침 해를 닮은 미소도 곁들이며 당장 마시기를 종용하자, 류지우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하는 수 없이 주스 뚜껑을 열었다.

유안은 파트장이 맛없는 주스를 들이키는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뒤쪽에 있는 두 명의 지하 헌터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가까이 가진 마세요."

병을 반쯤 비우던 지우가 다급하게 말했다.

"수면 아이템을 써두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한 명이 꽤 번거로운 공격계 스킬을 갖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것은 아니었다.

S급 헌터를 감전시키기에는 미약한 전류를 뿜어내는 스킬이었으나, E급 헌터인 유안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유안은 지우의 말을 들어 지하 헌터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멈추었다.

거리를 둔 채 보아도 느껴지는 남루한 행색이 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유안이 지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남은 주스를 마저 마시던 류지우는 아까보다 피로가 풀린 상태로 대답했다.

"고민 중이었습니다. 협회에 알릴 수는 없으니··· 제 선에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죠."

일단 협회에서 헌터용 마나 구속구 몇 개를 가져와 저들에게 채울 생각이기는 했다.

지상의 헌터들은 협회에 등록되어 던전 밖에서는 함부로 스킬을 쓰지 않겠다는 계약에 서명했으나, 지하의 헌터들은 그런 규율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비각성자나 하급 헌터들의 안전을 보호해야 하니 류지우는 던전 관리 파트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보려고 했다.

"구속구를 채운다고 하셨습니까?"

그런데 계획을 듣던 유안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불쾌하단 듯 말했다.

기분 나쁜 티가 팍팍 나는 태도에 류지우는 잠시 멈칫했다.

"만일에 대비해서 말입니다.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풀어줘도 되겠지만 안전함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이니까요."

일단 중앙 카페의 음식을 대접하며 살살 회유해볼 생각이기는 했다.

지하를 버리고, 완전히 지상으로 올라와 정식 헌터로 활동할 생각은 없냐고.

그때 말이 통하지 않으면 차선책으로 구속구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중앙 카페의 사장이 그 얘기를 듣자마자 정색한다.

"죄도 안 지은 사람들한테 왜 마나 구속구를 채웁니까?"

"······."

류지우는 약간 억울해졌다.

따지고 보면 저들에게 완전히 죄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지하에서 저를 만나자마자 대뜸 스킬을 써댔고, 자신이 S급 헌터였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등급이 낮았으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안이 이 일을 보는 관점은 달랐다.

"지하 헌터들의 영역을 먼저 침범한 건 지상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주거침입인데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죠."

"지하철은 이 사람들 소유가 아닙니다만."

"헌터를 보호해야 할 헌터 협회에서 지하 헌터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덮었지 않습니까. 마땅한 권리는 지켜주지 않았으면서 지상 헌터들에게 적용되는 것과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요구하는 건 어불성설 아닙니까?"

이유안은 3층 침실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을 윤슬을 떠올렸다.

단 며칠만 늦었어도 류지우가 윤슬을 먼저 발견해 아이의 작은 몸에 마나 구속구를 채울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눈앞이 새빨개졌다.

"······."

류지우는 대답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유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유안이 이렇게 언성 높여서 말하는 것이 처음이라 낯선 기분이 들었다.

지우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유안은 그 손에 들려 있던 건강 주스 병을 빼앗았다.

병 안에 조금 남은 액체는 보란 듯이 바닥에 부어버렸다.

"저 사람들 제가 데려갈 겁니다. 그리고 류지우 파트장님은 이 일에서 손 떼십시오. 제가 알아서 합니다."

유안은 잠든 사람 둘을 질질 끌고 더 센터 건물로 데려갔다.

S급인 류지우처럼 들쳐메고 갈 수는 없었으나 옮길 수만 있으면 됐다.

다행스럽게도 지하 헌터들은 거친 길바닥에 몸이 쓸려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영업 시작 안 했습니다. 따라 들어오지 마세요."

여전히 화난 표정의 이유안이 제 뒤를 바짝 쫓아오는 류지우에게 경고했다.

그 말에 지우가 걸음을 멈추었다.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여태 조용하던 파트장은 겨우 한 문장을 말했다.

유안은 그 말을 비웃듯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

"자꾸 잊으시는 것 같은데, 저도 각성한 헌터입니다. 그리고 제 직원 중에 A급 헌터도 있고, 단골 손님 중에는 S급 헌터도 많습니다. 치료계 헌터 혼자 맡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할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대놓고 류지우의 스킬을 무시하는 대사였으나 욕을 먹은 당사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

"사, 사장님··· 왜 자꾸 사람을 주워오세요······."

홍소라가 전기가 통하지 않는 고무장갑을 낀 채 말했다.

지하 헌터 중 하나가 전격계 스킬을 가졌다는 말을 듣고 나름대로 대비한 것이었다.

유안은 자세한 내막을 설명해주지는 못하고 머쓱하게 둘러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일단 다들 물러서 있으세요. 사장님도요."

뒷마당 구석의 소파에 눕혀둔 지하 헌터들을 보면서 서정원이 말했다.

유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헌터 디바이스로 연락처를 확인했다.

'태영 씨랑 새로 길드장··· 수창 길드장은 번호 없으니까 넘기고. 재윤 씨나 서혁 씨한테 연락해 볼까?'

가깝게 지내는 상급 헌터들에게 오늘 중앙 카페를 방문하면 신메뉴를 무료로 드리겠다는 문자를 남기자, 금세 답장들이 도착했다.

[정태영: 헐 신메뉴 뭐예요?!?!?!??!?!]

[새로 길드장 차건오: 점심쯤 갈게요.]

[수창 길드 권재윤: 넹~ 좋아요! 바로 출발할게요! 서혁이두 제가 데려가욤~!]

단골 손님들에게 하나하나 답장을 해주고 있는데 오랜만에 최선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장님···.

최선진은 어쩐지 우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유안을 불렀다.

"예, 선진 씨. 오랜만입니다. 회사 다니는 건 좀 어떠십니까?"

-직원들이 자꾸 놀려서 힘들어요. 그래서 오늘 월차 냈어요! 카페 놀러가도 되죠?

다니는 회사에서 왕따라도 당하고 있나?

유안은 선진의 직장생활을 살짝 걱정하며 대답했다.

"선진 씨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신메뉴도 나왔으니까 먹으러 오세요."

-네! 바로 출발할게요!

유안은 전화를 끊고 곁에 있던 직원들에게 최선진이 온다고 전달했다.

그랬더니 홍소라가 갑자기 사레에 들려 켈록대기 시작했다.

서정원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소라에게 물을 건넸다.

"선진 씨도 오는 거면 한시름 놓겠네요."

그리고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유안은 정원에게 최선진의 등급을 되새겨주었다.

"정원 씨, 최선진 씨는 F급입니다."

"네, 사장님. 도착하면 안전하게 뒤로 빠져 있으라고 전할게요. 사장님도 얼른 윤슬이한테 가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애가 깰 시간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유안은 3층 침실로 올라가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잠기운이 덜 달아난 눈을 한 채 곰인형을 끌어안고 있던 윤슬이 유안을 보고 자연스럽게 팔을 뻗었다.

"배고파?"

"우으으응···."

유안은 살짝 칭얼거리는 아이를 일으켰다.

그리고 인벤토리에 넣어둔 어린이용 소고기 덮밥을 꺼냈다.

눈앞에 밥이 보이자 잠이 완전히 달아난 윤슬은 스스로 숟가락을 쥐고 식사를 시작했다.

"천천히."

"나도 알아!"

빨리 먹지 않아도 누가 뺏어먹지 않는다는 걸 학습한 윤슬은 요새 천천히 먹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아무리 느리게 먹어도 음식은 계속 있고, 더 달라고 하면 더 주는 어른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심지어 밥알을 흘리고 먹어도 혼내지 않는다.

유안은 윤슬이 침대 위에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이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맨날 씻는 거 싫어! 귀찮아! 지하철에 살 때는 비 오는 날에만 씻었는데."

"귀찮으면 그냥 얌전히 있기만 해."

이유안은 그래도 육아 스킬이 많이 늘었다.

이전에는 40분씩 걸리던 것을 이제 20분이면 해결할 수 있었다.

아이를 씻기고 머리까지 바짝 말려준 뒤에는 천천히 1층으로 내려왔다.

윤슬은 유안에게 꼭 잡힌 손을 흔들며 놓아달라고 했지만, 이유안은 절대 계단에서 아이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1층 홀의 손님들이 유안과 함께 지나가는 윤슬을 사랑스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나 쳐다봐···."

"네가 인형 들고 있어서 그래."

"···내 인형이야. 쳐다봐도 안 줄 거야."

윤슬의 귀여운 오해를 정정해주지 않고, 유안이 뒷마당 문을 열었다.

그곳은 어느새 유안이 부른 사람들로 복작거리고 있었다.

*

최선진과 새로 길드장 차건오가 선두에 서 있었다.

소파에 누워 있다가 막 깨어난 지하 헌터들은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눈앞의 사람들을 보았다.

류지우의 예상과 달리 지하 헌터들은 과격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테이블에 이것저것 차려주는 서정원에게 감사를 표하기까지 했다.

"어유, 이렇게 귀한 걸 거저 먹어도 되나···."

"제대로 된 음식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지하 헌터들은 허겁지겁 음식을 삼켰다.

윤슬을 처음 거뒀을 때와 비슷한 상태였다.

윤슬을 데리고 막 뒷마당에 진입한 유안은 선두의 최선진을 보고 조금 놀랐다.

'F급이면서 저렇게 가까이 있어도 되나?'

지하 헌터들이 문제를 일으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하급 헌터들이 모두 뒤쪽으로 빠져 있는 중에 최선진만 저렇게 앞에 나서는 것이 이상했다.

'서정원 씨는 막아준다고 하더니 뭐하는 거야.'

유안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원을 보았으나, 중앙 카페 매니저는 잔잔한 미소를 짓기만 했다.

"사장님!"

다행히 최선진 쪽에서 유안을 발견한 즉시 달려오기는 했다.

"안녕하세요, 선진 씨. 요즘 많이 바쁘셨나 봅니다."

"아···! 네, 뭐··· 회사 일이 다 그렇죠···?"

"그래도 가끔 시간 나면 놀러오십시오. 직원들도 선진 씨 많이 보고 싶어 했습니다."

서빙 일을 잘하는 것과 별개로, 최선진은 특유의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다른 직원들과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 알바생이었다.

그리고 칼을 잘 다루기까지 하니 주방 일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맞아요! 저도 엄~청 많이 보고 싶었어요!"

옆에서 권재윤이 끼어들어 최선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더 센터 건물을 세울 때 몇 번 만났던 것뿐인데 많이 친해진 모양이다.

유안은 어느새 권재윤과 조서혁에게 둘러싸인 최선진을 보며 흐뭇해했다.

반가운 사람들과 활발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지하 헌터들은 식사를 마쳤다.

"고마워요···. 지하에서 나왔으니 꼼짝없이 죽는 줄만 알았는데."

"나는 그 수면 아이템 맞는데 이대로 황천길 가겠구나 싶었다니까?"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헌터들이 구수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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