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류지우 파트장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유안은 당혹스러움과 불쾌함이 적절히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오픈 전입니다."
어제는 마감 시간에 오더니 오늘은 오픈하기도 전에 찾아왔다.
혹여 또 이상한 트집을 잡는 건 아닐까 싶어 유안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류지우는 평소와 다르게 저자세로 나왔다.
"이유안 사장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여기서 말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 옮기죠."
"그럼 잠시 기다리셔야 합니다."
유안은 테이블 위의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우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류지우가 상식적으로 나올수록 마음이 찝찝해지기만 한다.
그래도 유안은 예의상 류지우에게도 식사를 함께할 것인지 물었다.
던전 관리 파트장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침은 원래 안 먹어서 괜찮습니다."
"그럼 간단히 마실 수 있는 주스라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네."
유안은 최고로 신선한 재료들만 듬뿍 넣어 최악의 맛을 내는 건강 주스를 만들어 왔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어떤 걸 넣어야 더 맛없어지는지 연구했다.
푸르딩딩한 주스를 1리터 잔에 담아 류지우에게 건네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참담한 표정으로 건강 주스를 바라보는 지우를 뒤로 하고, 유안은 뒷마당의 아이와 서정원을 불러 맛있는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꼬맹이가 음식을 너무 빨리 먹는다는 걸 빼면 나무랄 데 없는 식사였다.
서정원에게 다시 아이를 맡긴 유안은 지우를 데리고 3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하실 말씀이 뭡니까?"
유안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용건부터 물었다.
눈앞의 류지우를 빨리 건물에서 내보내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이었다.
류지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날카롭게 긴장한 유안에게 말했다.
"일단··· 협회 일로 찾아온 건 아닙니다."
그 말에 유안이 의문을 느끼는 사이, 종이가 테이블 위로 넓게 펼쳐졌다.
연필로 세밀하게 그린 지하철 노선도 곳곳에 붉은색 마킹이 되어 있었다.
지하와 지상의 새벽
중앙 카페 아래쪽을 지나는 지하도 근처에도 마킹 몇 개가 있었다.
'꼬맹이가 살던 열차도 포함된 것 같은데.'
익숙한 위치에 새겨진 빨간 엑스 자에 유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류지우가 아이를 두 번이나 보고도 별말 없었던 걸 보면 눈치 챈 것 같지는 않지만···
'아슬아슬하게 안 걸렸나 보네.'
하루이틀만 늦었어도 헌터 협회가 먼저 아이를 발견했을지 모른다.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유안이 속으로만 가슴을 쓸어내렸다.
류지우는 살짝 굳은 유안의 표정을 보고 지도의 의미를 설명했다.
"위험하다는 의미의 표시는 아닙니다. 마킹된 부근에 사람이 몸을 숨길 수 있다는 표시예요."
"이렇게 많이 말입니까?"
지하철 곳곳에 숨겨진 장소가 있는 것까지는 이해가 갔다.
그런데 빨간 마크는 못 해도 수십 개는 되어 보였다.
그런데 지우가 이건 약과라는 듯 덧붙였다.
"더 생겼을 겁니다."
"생기다뇨?"
"······지하에, 사람이 사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사람들이 계속 이동하며 지하 터전을 넓혀갔다면, 류민희가 기억하고 있는 장소보다 그 수가 더 늘어났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새로 생긴 비밀 공간까지 전부 찾아내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협회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유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헌터 협회에서 귀찮은 일을 떠맡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재개통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김에 마킹된 장소를 일일이 확인하라고 시킬 것 같았다.
'류지우가 그 업무를 전달하러 온 것 같은데.'
그렇게 확신한 유안은 은근히 지우를 노려봤다.
저번부터 자꾸 강제로 일거리를 물어다주는 게 아주 못마땅했다.
그런데 류지우가 제 머리칼을 한 번 쓸어올리며 한숨처럼 말했다.
"헌터 협회에서는 덮으려고 하는 일입니다. 제 개인적인 이유로 이유안 헌터에게 부탁드리는 거고요."
"개인적인 이유가 뭔지 자세히 알아야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 고민이라도 해볼 것 같습니다만."
유안은 3층에 올라올 때 가지고 온 버터 핫 초콜릿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오늘은 위에 크림도 잔뜩 올려서 평소보다 더 단맛이 났지만, 눈앞의 협회 사람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류지우는 살짝 뜸을 들이다가 제 입술을 잘근, 씹고는 대답했다.
"협회에서 먼저 지하 사람들을 발견하면 모두 죽일 겁니다."
그 말에 유안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굳었다.
"그걸 막으려는 겁니다."
"헌협에서 멀쩡한 시민들을 왜 죽입니까?"
"지하에서 살아간다는 건 게이트 마나에 노출되어도 괜찮다는 의미이고, 그럼 그들은 대부분 각성한 헌터일 겁니다. 헌터 협회는 협회에 등록하지 않은 헌터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 류지우는 자신의 말을 조금 정정했다.
"아니, 보호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적으로 간주하고 없애는 것에 가깝겠네요."
"류지우 파트장님도 같은 협회와 같은 생각 아닙니까?"
"저는··· 아닙니다. 제 뜻과 맞지 않는 부분이에요."
유안은 지우의 표정이 조금 피곤해 보인다고 느꼈다.
헌터 협회에서도 가장 큰 부서 중 하나인 던전 관리 파트장.
바깥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협회에 가장 충실할 것 같은 사람이 협회와 자신은 뜻이 맞지 않는다 말하고 있었다.
쉬이 믿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거짓으로 치부하기에는 류지우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어쨌든 협회는 지하 시민들을 위험 분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몇 명인지 정확한 수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몇 명이 되었든 사살하려고 할 거예요."
"······헌협은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질서요. 협회가 세운 완벽한 질서.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겁니다."
"류지우 파트장님, 혹시 근시일 내로 퇴사할 생각 있으십니까?"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 분위기를 깨고 유안이 질문했다.
류지우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유안은 꼭 답을 듣고 싶었다.
궁금증 어린 시선이 계속되자 지우가 마지못해 답했다.
"당장 퇴사할 계획은 없습니다만."
"협회가 추구하는 방향을 굉장히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물어봤습니다."
파트장씩이나 하고 있는 사람이니 당연히 직업 만족도가 높을 줄 알았는데 그 부분은 의외였다.
유안은 다시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며 지우에게 말했다.
"어차피 지하도를 정리하려면 마킹된 부분을 전부 조사하긴 해야 합니다. 파트장님이 직접 나서신다고 약속하면 이런 부탁쯤이야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유안은 일부러 '직접'에 강세를 넣어 말했다.
'지하에서 열심히 굴러 봐라.'
얄미운 파트장을 이렇게나마 괴롭혀야 마음이 편해졌다.
겸사겸사 힘내라는 의미의 건강 주스도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당연히 제가 나서려고 했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 마세요."
"예, 그럼 저는 이 건에 크게 신경 안 쓰겠습니다. 카페 일로도 바빠서 말입니다."
지하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계속 보고는 받겠지만, 유안이 주도적으로 몸을 쓸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강해민에게나 연락을 넣어 놔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유안은 머그잔에 남은 음료를 전부 비웠다.
아래쪽에 초콜릿이 가라앉아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달게 느껴진다.
"······흔쾌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지우가 머뭇머뭇 감사를 표했다.
유안은 음료의 맛이 오랫동안 혀끝에 걸린다고 생각하며 지우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럼 협회의 뜻 말고 파트장님의 개인적인 신념대로라면, 지하에서 헌터를 발견했을 때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은 살려야죠. 제 힘이 닿는 데까지는 어떻게든 보호할 겁니다."
류지우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
협회가 아니라 곧장 지하로 향한 류지우에게서는 오전 장사가 끝나기도 전에 연락이 왔다.
중앙 카페 근처의 지하철 정류장 세 군데에서는 특별히 사람이 발견되지는 않았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빠르네.'
유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카페 정문에 '휴식 시간' 팻말을 걸었다.
직원들과 다함께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입이 하나 늘었기에 메뉴가 전보다 훨씬 다양해졌다.
꼬맹이가 좋아할 만한 문어 모양 소시지가 오목한 그릇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서정원이 굽고 홍소라가 눈을 달았다.
"천천히 먹어야지."
아이 옆에 앉아서 식사를 도와주던 서정원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꼬맹이는 여전히 허겁지겁 먹는 버릇을 못 버렸다.
맨 처음에는 수저를 쓰지 않고 손으로 먹으려 했는데 지금은 그나마 포크와 숟가락을 역수로 잡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 사장님··· 그런데 애, 애 이름은 지었어요···?"
양면을 노릇하게 구운 새알 프라이를 반으로 가르던 홍소라가 유안에게 물었다.
이유안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잡고 있던 포크를 삐끗했다.
"이름이요······?"
아이에게 이름을 물어본 적이 없기는 했다.
그런데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홍소라가 몰랐냐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어 말했다.
"이, 이름 물어보니까 그, 그런 거 없다고 하던데요."
"이름이 없다고요?"
소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유안은 결국 서정원에게 수저를 빼앗기고 먹여주는 대로 받아먹어야 하는 형에 처해진 아이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먹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고여덟 살 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그 시간 동안 이름 없이 살았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
"이름을 말해주기 싫어서 말하지 않은 것 아닐까요?"
"그건 아닐 거예요, 이 사장님. 맨 처음에 물어봤을 때 사람한테도 이름이 있냐고 그랬거든요. 지하철 정류장들에만 이름이 있는 줄 알았대요."
김주현이 아이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자세한 내막을 설명해주었다.
알면 알수록 더 참혹하게 느껴지는 아이의 성장 환경에 유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짧은 고민을 끝낸 후 곧바로 아이에게 말했다.
"꼬맹아, 넌 지금부터 윤슬이야. 이윤슬."
서정원이 떠준 밥을 아기새처럼 받아 먹던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뭔데?"
"네 이름."
"윤슬?"
"그래."
아이는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닌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이름 생겼으니까 누구나 널 이름으로 불러줄 거야."
"아저씨도 나 꼬맹이라고 안 할 거야?"
"그래. 윤슬이라고 부를 거야."
그리고 말썽을 피우면 성까지 붙여서 부르게 되겠지.
윤슬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눈만 도록도록 굴렸다.
그러자 서정원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윤슬아, 밥 마저 먹어야지. 아, 해."
그 말에 아이는 착실하게 입을 벌리고 음식을 받아 오물오물 먹었다.
시선은 계속 자신의 이름을 지어준 유안에게 고정한 채였다.
*
해가 떠오르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각이었다.
류지우가 기절해서 축 늘어진 사람 두 명을 양어깨에 각각 들쳐메고 지상으로 나왔다.
기절한 자들이 입은 낡은 옷에는 핏자국이 가득했으나 지금도 몸에 상처가 남아있는 건 아니었다.
'새벽에 다시 확인하길 잘했지.'
중앙 카페 근처의 정류장은 아침에 전부 조사하여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지만, 일부러 시간차를 두고 새벽에 다시 찾아왔다.
같은 곳을 두 번이나 방문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두 사람이 류지우의 레이더망에 걸렸다.
지하도 곳곳을 돌며 쓸 만한 아이템이 없나 찾던 자들이었다.
재개통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지하도를 돌아다니는 것이 이전보다 위험해지기는 했으나, 인부들이 많이 오가는 만큼 물자도 다양해졌다.
작업이 진행되지 않는 새벽 시간대를 노려 작업 현장을 털어보려던 사람들은 지우를 보고 대뜸 스킬부터 날렸다.
그러나 류지우는 S급 헌터였다.
지하 헌터들의 스킬을 가볍게 피하고 맨몸을 날렸다.
순수 무력만으로 두 사람을 간단히 제압한 류지우는 수면 효과가 있는 아이템을 사용했다.
스르르 잠든 사람들에게 힐까지 걸어주니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몸의 긴장이 풀리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제 어디로 데려가지.'
그런데 막상 지상으로 끌고 나오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제 집에 데려다 놓자니 불안한 점이 많았다.
잘 설득해서 사회에 정상적으로 편입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겠으나,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때, 지우의 눈에 중앙 카페가 들어왔다.
'떠넘기려는 건 아니야.'
지하 헌터들이 지상에 올라와 눌러 살도록 설득하기에 좋은 방법이 떠올랐을 뿐이다.
류지우는 중앙 카페 근처에 헌터들을 잘 눕혀놓고 카페 정문으로 다가갔다.
Closed 팻말이 문고리에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