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창 길드장은 운전석에 올랐고, 길을 아는 서정원이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나머지 사람들까지 뒷좌석에 타자 던전 부산물로 만든 차량이 급출발했다.
"악."
홍소라가 앞좌석에 이마를 박았다.
유안은 가까스로 문 위쪽에 난 손잡이를 잡아서 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출발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 뒤로도 급정거, 커브길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등의 난폭 운전이 계속되었다.
"하하하··· 제가 사실 운전은 잘 안 하고 다녀서요."
수창 길드장이 또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며 말했다.
조수석에 앉은 서정원이 울렁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애써 미소했다.
'범퍼가 튼튼한 이유가 있었네.'
유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잡이를 좀 더 꽉 붙잡았다.
목적지까지의 험난한 길이 예상되었다.
소풍만 즐기려고 했는데
원래 중앙 카페 직원들이 가고자 한 목적지는 좀 더 먼 곳이었으나, 수창 길드장의 멋진 운전 솜씨 덕분에 방향을 틀어야 했다.
“그냥, 그냥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공원으로··· 우욱.”
홍소라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말했다.
다른 직원들도 모두 동의하며 제발 이 차를 멈춰주길 바랐다.
“하하하, 그런데 제가 아는 공원이 하나밖에 없거든요~.”
진 선은 머쓱한 건지 신난 건지 모를 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 핸들을 돌렸다.
화악!
차체가 왼쪽으로 강하게 기울어 모두의 몸이 흔들렸다.
스릴을 즐기는 건 진 선 뿐이었다.
“···안전 운전 좀 합시다.”
여태 가만히 있던 유안도 참지 못하고 한 소리 했다.
그러자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진 선이 오른발에 힘을 풀었다.
고삐 풀고 달리던 중형 세단이 순식간에 온순해졌다.
“어느 공원으로 가시는 건가요?”
“아~ 거기요! 강남 센트럴 파크.”
몇 년 전에 생긴 강남의 초대형 공원 이름이었다.
도심에 녹지를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공원이었으나 몇 주 전에 그 수명을 다했다.
“저, 저번에 푸드 트럭 세웠던 공원이네요···?”
홍소라가 창밖 풍경을 보더니 금세 눈치챘다.
운 나쁘게도 강남 던전의 제한 구역 범위에 센트럴 파크가 쏙 들어가 있었다.
당연히 공원은 폐쇄되었고, 평소 북적이던 그곳이 지금은 사람 하나 없이 썰렁했다.
“여기에 세울게요~.”
진 선은 난폭운전 하던 모습을 버리고 꽤 부드럽게 공원 앞에 정차했다.
유안은 울렁거리는 속을 느끼며 곧장 차에서 내렸다.
조금이라도 더 타고 있었으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후아···!”
밴에서 나온 정태영이 팔을 넓게 버리고 심호흡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행동을 하며 멀미 기운을 가라앉혔다.
와중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진 선만 멀쩡한 것이 무척이나 얄미웠다.
‘수창 길드원들 정말 고생이 많아. 저런 사람이 길드장이라니.’
유안은 몇 번째인지 모르게 그 생각을 하며 소풍 장소로 적당한 위치를 물색했다.
방재이에게 시원한 탄산수 한 잔을 받아 마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정태영이 커다란 나무 아래를 가리켰다.
“싸장님, 우리 저기로 가요!”
“예, 알겠습니다.”
장소가 정해지자 유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번에 푸드 트럭을 세웠던 곳은 센트럴 파크의 반대쪽 입구였다.
그쪽이 강남 던전 게이트와 더 가까웠고, 지금 여기는 좀 거리가 있어 게이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마나 영역에 걸쳐진 것인지, 공원 외곽 일부는 멀쩡했고 안쪽은 마나로 인한 부식이 진행되어 폐허가 된 모습이었다.
마나에 노출된 영역만 세월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은 모습은 몇 번을 봐도 기이했다.
중앙 카페 일행은 아름드리 나무 아래의 짙은 그늘에 소풍 터를 잡았다.
이불을 몇 개나 연결한 것처럼 넓은 돗자리는 도톰하고 푹신푹신했다.
“와! 침대 같아요!”
정태영이 누구보다 빠르게 돗자리 위로 다이빙해 뒹굴뒹굴 굴렀다.
그러다가 또 얼른 일어나서 음식을 세팅하기 시작한다.
차리는 도중 반은 먹어치웠으나 정태영을 생각해서 일부러 많이 싸 왔으니 괜찮았다.
서정원은 더 센터 건물이 생기기 전에 매일 하던 것처럼 인벤토리에서 카페 테이블과 의자를 꺼냈다.
돗자리 근처에 원목 가구를 몇 개 놓으니 피크닉 분위기가 물씬 났다.
“사장님, 소파도 하나 가져왔어요. 여기 앉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뒷마당에 있던 유안 전용 소파가 나무 근처에 놓였다.
유안은 그늘 아래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했다.
유안을 제외한 사람들은 농구를 시작했다.
근처에 마침 농구대가 있었고, 공은 김주현이 즉석에서 뚝딱뚝딱 만들었다.
팀을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중앙 카페 팀, 외부인 팀으로 나누게 되었다.
인원이 4:2로 심각하게 불균형했으나 외부인 팀에는 S급 헌터 진 선이 있었으니 할 만한 게임이었다.
통, 통, 통···.
농구공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유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
잠깐 눈만 붙인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나 보니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저녁 해에 달궈진 하늘에 울긋불긋 노을이 피어서 멋들어진 경치를 자랑했다.
세상에 게이트가 생겨나고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늦은 오후에 하늘이 빨갛게 변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장님, 일어나셨어요?”
“···예, 제가 생각보다 많이 잤네요.”
“피곤하셨나 봐요. 더 주무셔도 됐는데.”
서정원의 말에 유안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툭.
이유안의 몸을 덮고 있던 담요가 떨어졌다.
“덮고 계세요. 방금 일어나서 좀 쌀쌀하실 거예요.”
“정원 씨 겁니까?”
“아뇨, 저 말고 수창 길드장이요. 의외로 인벤토리에 담요를 챙겨 다니더라고요.”
정말 의외기는 했다.
유안은 부스럭거리는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시간 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더니 몸에서 우드득거리며 뼈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잠시 주변 산책 좀 하고 오겠습니다.”
중앙 카페 팀의 승리로 끝난 농구 경기가 치열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돗자리에 누워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유안은 그들이 일어나길 기다릴 겸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을 맞으니 남아 있던 졸음이 슬금슬금 달아난다.
‘여기서 이렇게 오래 머무른 건 처음이네.’
회귀 전에도 강남 센트럴 파크에 놀러 온 적은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장소 중 하나였고, 던전 파밍에 눈이 돌아가 있을 때는 공원을 지나쳐 무조건 게이트로 향했다.
이렇게 도시락을 싸 들고 소풍을 나온 게 무척 오랜만이라 그런지, 확실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가끔 이렇게 바람 쐬러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항상 열심히 일해주는 직원들을 쉬게 할 겸 여기저기 다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이미 마나에 잠식된 땅이더라도 방문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으니.
유안은 센트럴 파크의 제한 구역 경계를 발로 디뎠다.
이쪽은 이승, 저쪽은 저승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타박타박.
황폐해진 땅으로 완전히 진입한 유안은 심장이 쿵쾅거림을 느꼈다.
‘[늑대 숲의 미로] 던전···.’
게이트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였지만, 회귀 전의 기억 때문인지 평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두근두근, 위험한 신호를 보내듯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덜 하네.'
떠올리는 것조차 싫었던 회귀 초반과는 확실히 달랐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직원들 덕분인지 유안은 [늑대 숲의 미로] 던전 근처에서도 멀쩡히 숨을 쉴 수 있었다.
비명 한 번 지르면 바로 달려와 줄 사람들이 있기에 안심이었다.
'게이트 근처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더 다가가 볼까.'
유안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흐리게 보이던 게이트가 점차 뚜렷해지면서 유안의 머릿속에 자꾸 죽음의 장면이 스치었다.
"하아···."
호흡이 너무 가빠진 탓에 유안은 이만 멈추기로 했다.
다음에 왔을 때는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만큼 온 걸로 만족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았다.
다시 안락한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때, 마나 파장으로 폐허가 된 허허벌판에서 인기척이 났다.
무척 재빠른 움직임이라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유안 근처에 분명 사람이 있었다.
'누구지?'
유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차하면 카페 사람들을 부를 생각이었다.
쉭! 쉬익!
그런데 바람 소리만 내며 움직이는 인영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작은 인영 하나가 큰 인영에게 쫓기는 모양새.
유안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일단은 인벤토리에서 게딱지 방패를 꺼냈다.
몸을 가리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마침내 커다란 사람이 작은 사람을 붙잡았는지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유안은 이제 사람들의 정체를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차건오 씨?"
새로 길드장이 그곳에 있었다.
손으로는··· 꼬질꼬질한 차림의 어린애 뒷덜미를 붙잡은 채.
검은색 누더기를 입은 아이가 차건오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바동댔다.
"으아아아! 이거 놔!"
"중앙 카페 사장님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차건오는 아이의 울부짖음을 가볍게 무시하고 유안에게 물었다.
"직원들과 소풍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린애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킹크랩 집게발을 들고 있었다.
아이가 집게발로 차건오의 팔을 푹푹 찔렀으나 S급 헌터의 몸에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애초에 집게발이 처음보다 많이 무뎌져 있어서 검의 역할을 못 하는 것도 있었다.
아이가 가진 집게발에서 몬스터의 피가 뚝뚝 떨어진다.
"···집게발 도둑."
유안은 담벼락을 타고 넘어오던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를 용케 들은 차건오가 되물었다.
"이유안 사장님, 이 애가 도둑질도 했나요?"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담을 타고 넘어와서 아이템을 가져가긴 가져갔는데··· 멀쩡한 음식이나 무기를 훔친 것도 아니고 음식물 쓰레기인 집게발을 도둑질한 것이었다.
답을 망설이던 유안이 그냥 말을 돌렸다.
"차건오 씨는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오늘은 던전 공략하는 날도 아닌 걸로 압니다만."
수창 길드와 새로 길드 공략대는 토요일마다 번갈아 강남 던전 공략을 들어간다.
오늘은 목요일이니 모든 공략대가 쉬고 있어야 할 때였다.
"게이트를 지키던 헌터 협회 직원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오늘 하루만 제가 순찰을 돌기로 했거든요."
"혼자서 말입니까?"
"B급 게이트이니 저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차건오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헌협에서는 수창 길드장과 제가 함께 나서주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요."
수창 길드장과 함께할 바에는 혼자 고생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차건오였다.
새로 길드장과 유안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도둑은 제 풀에 지쳤는지 집게발 휘두르는 것을 멈추었다.
"이거 놓으라구우······."
힘없이 외치며 팔다리를 간헐적으로 흔들기만 한다.
앳된 얼굴에 짙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여덟 살이나 됐을까.'
집게발 도둑은 초등학교는 들어갔을지 의심이 되는 체구에 비쩍 마른 모습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려서 유안은 살짝 당황했다.
"게이트 근처에서 돌아다니는 걸 잡았습니다. 마나 그래프가 이상했던 것도 이 녀석 때문인 것 같아요."
"···이 꼬맹이가 혼자 게이트에 들어가서 던전을 공략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 꼬맹이 아니거든! 비실비실하게 생긴 아저씨 주제에!"
아이의 발악을 무시하고 어른들끼리 대화가 이어졌다.
"어린애가 각성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해외에서는 종종 발견된 사례가 있어요."
"각성 직후 마나 폭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들었습니다만."
"네, 그렇긴 한데··· 그 폭주를 견디면 이 녀석처럼 되나 봅니다."
"···등급은 어느 정도인 것 같습니까?"
"글쎄요. 정확한 건 측정을 해 봐야 알겠지만."
차건오가 아이의 꼬질꼬질한 볼을 꾹 눌러보았다.
"최소 A급은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이것도 어린애일 때의 등급이니 자라면서 더 성장할 수도 있어요."
"얼른 더 강해져서 다 죽여버릴 거야!"
아이가 건전하지 못한 발언을 했다.
유안은 얼른 인벤토리에서 던전산 생 초콜릿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