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곳에 취업했다고 하니까 잘된 일이긴 한데···.'
최선진은 처음부터 오래 일하지 못할 거라고 말한 알바생이긴 했다.
그래서 뽑을까 말까 고민도 많았으나 당장 일손이 부족했으니 고용한 것이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서빙 일을 잘 해주어서 중앙 카페가 정식 오픈한 뒤 아무리 바빠도 서빙이 밀리는 일은 없었다.
'최선진 씨 만한 직원을 또 구할 수 있을까.'
유안은 큰 아쉬움을 느끼며 킹크랩을 바라보았다.
최선진은 중앙 카페 일을 관두고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러니 유안은 이번 킹크랩 파티에 선진도 꼭 부르기로 마음 먹었다.
헌터 디바이스 연락처에 들어가 최선진을 클릭하려는 순간이었다.
"우와우와, 그거 뭐예요? 짱 크다!"
언제나 발랄하고 유쾌한 권재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중앙 카페 입구에는 재윤을 비롯한 수창 길드원들이 우르르 모여 있었다.
킹크랩 찜을 해치우기 충분한 인원이었다.
'응···? 수창 길드장도 왔네.'
수창의 부길드장과 간부급 길드원들은 종종 카페를 방문했으나 길드장이 직접 행차한 건 처음이었다.
유안은 살짝 경계하는 눈빛으로 수창 길드장 진 선을 바라보았다.
"하··· 하하, 안녕하세요, 사장님."
진 선이 어색하게 웃으며 유안에게 손을 흔들었다.
처음 보는 사이에 친근하게 인사하는 게 좀 이상해서 유안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말았다.
킹크랩 찜
"모셀 광산 철광석으로 만든 철냄비인데 흠집 나는 것 좀 봐요!"
김주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수창 길드장의 도움을 받아 킹크랩을 냄비에 넣자, 녀석들이 버둥거리며 냄비 안쪽을 긁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공들여 만든 냄비가 상처를 입으니 속상함을 느낄 만도 한데, 김주현은 오히려 기쁜 표정이었다.
"내 냄비에 스크래치 남긴 건 너희가 처음이야."
킹크랩에게 그런 말을 속삭이기도 했다.
주현과 킹크랩을 바라보던 유안이 말했다.
"껍데기는 주현 씨 가지셔도 됩니다."
"이 사장님, 이제 제가 먼저 부탁 안 드려도 척하면 척이네요!"
김주현은 손가락을 튕기며 유안에게 윙크했다.
주현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단단한 집게발이나 등딱지로 무언가 만들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중이었다.
다리가 워낙 길고 곧게 뻗었으니 이대로 날만 세워서 무기로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뭘 만들어 볼까."
김주현이 경매장 목록을 뒤지며 킹크랩 가공에 어울릴 만한 부재료를 찾기 시작했다.
"사장님, [잿빛 소금] 더 없나요? 항상 두던 위치에 없네요."
서정원이 다가와 말했다.
유안은 자연스럽게 인벤토리를 확인했다가 지난번에 조미료는 전부 빼 놓았다는 걸 떠올렸다.
자주 쓰는 식재료는 유안이 매번 인벤토리에서 꺼내주기 번거로우니 주방에 아예 가져다 둔 것이다.
'그걸 다 썼을 리는 없는데···.'
[잿빛 소금]은 던전산 커피콩과 더불어 유안이 가장 많이 갖고 있던 아이템 중 하나였다.
그러니 주방 어딘가에 고이 모셔 두어서 찾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주방에는 서정원 씨랑 홍소라 씨가 제일 자주 들어가는데.'
유안은 최근 주방에서 일한 직원이 또 누가 있었는지 떠올렸다.
방재이는 커피 머신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이 바빴고, 남은 사람은 최선진 뿐이었다.
새로 길드장이 중앙이와 놀아줄 때 최선진이 주방에 콕 박혀있던 것이 생각났다.
"최선진 씨가 다른 곳으로 옮겨둔 것 같습니다.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유안이 헌터 디바이스를 꺼냈을 때였다.
"자, 자, 잠시만···! 잠시만요!"
수창 길드장이 다급하게 유안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긴 다리로 성큼 다가온 진 선이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그··· 주방 냉장고 옆 공간 자루를 찾아보는 건 어떨, 까요···? 하, 하하···. 보통 소금이나 곡물류는 그렇게들 많이 보관하니까요. 그, 사실 수창 길드의 주방에서도 소금은 항상 냉장고 옆에 두거든요? 혹시 모르니까 확인해보셨으면··· 좋겠다 싶어서······."
수창 길드장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매사에 당당한 성격은 아닌 듯했다.
유안은 진 선이 묘하게 말끝을 떠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서정원에게 눈짓했다.
미션을 받은 정원이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장님, 소금 찾았어요. 수창 길드장님 말대로 냉장고 옆에 작은 공간이 있더라고요. 주방에 자주 들어가는 저도 몰랐는데 길드장님이 알고 계신다는 게 신기하네요."
서정원이 눈웃음을 치며 수창 길드장을 보았다.
진 선은 얌전히 눈을 깔았다.
'S급 헌터 맞아?'
유안은 서정원 앞에서 맥을 못 추리는 진 선을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제 수창 길드장은 서정원뿐 아니라 유안 자신과도 눈을 못 마주쳤다.
그 광경을 본 권재윤이 대놓고 키득댔다.
"길드장님~, 이런 거 보고 업보 빔 맞았다고 한대요!"
"···조용히 해, 재윤아."
"그래도 저는 초라한 길드장님 모습도 좋아요! 재밌어요!"
"······."
수창 길드원들만 이해할 수 있는 대화인 것 같았다.
유안은 그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킹크랩에 소금이나 살살 뿌렸다.
일반 킹크랩과 다르게 던전산 킹크랩은 껍데기가 반투명했다.
그래서 속살이 희미하게 비쳤는데, 집중해서 보고 있으면 군침이 돌았다.
"같이 온 엽서에 적힌 설명 보니까 익으면 더 투명해지나 봐요."
"오, 그럼 게딱지 가공해서 그릇으로 만들어도 예쁘겠어요!"
"일식 접시 같은 건 어때요, 주현 씨?"
"딱인데요!"
서정원과 김주현은 킹크랩 넣은 냄비를 불 위에 안치며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키웅.
냄비가 불 위에 오르자마자 뒷마당에 퍼지는 게살 냄새를 맡고 중앙이가 다가왔다.
자다 깨서 앞발로 눈을 비비던 중앙이는···
자연스럽게 수창 길드장의 몸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어···, 하, 하하······."
"중앙이가 등급 높은 헌터를 좋아합니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달라붙는 이중앙의 행태를 유안이 대신 변명했다.
진 선은 꽤 익숙한 폼으로 포식자를 안고 부둥부둥 달래기 시작했다.
중앙이의 노란 눈이 다시금 스르르 감긴다.
'수창 길드장도 애 잘 보네. 대형 길드 길드장들 기본 소양인가?'
S급 헌터들은 거의 모든 일에 평균 이상의 소질이 있다고 한다.
유안은 진 선이 중앙이를 잘 돌보는 것도 그 연장선일 거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킹크랩을 찌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그 손질이 힘들었다.
다행히 힘 좋은 수창의 헌터들이 나서주어 처음에만 좀 헤매다가 나중에는 속도가 붙었다.
커다란 집게 다리의 옆구리에 칼을 푹 박아 넣고.
드드드득-.
길게 칼집을 내니 무슨 드릴 소리가 났다.
그래도 깔끔하게 집게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며 발라진 살은 유안의 접시 위에 단정하게 올라갔다.
"이 킹크랩 보기보다 등급이 높아요, 사장님. 못해도 C급 정도는 될 것 같으니까 절단면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서정원은 날카로운 집게발을 번쩍 들어 보였다.
무슨 다리 하나가 정원의 얼굴 만했다.
유안은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잘려나갈 것 같은 킹크랩을 바라보며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서정원이 발라주는 살만 얌전히 받아 먹을 생각이었다.
커다란 크기 덕분에 나오는 살점의 양도 상당했다.
한 마리를 전부 손질하자 접시 하나에 게살이 탑처럼 쌓였다.
수창 길드장도 서정원의 곁에서 킹크랩을 손질했다.
서정원이 다리를 맡았고, 진 선은 게딱지의 내장을 발라냈다.
"이걸로 볶음밥 하면 되겠다, 정원 씨."
"주방에 밥 해둔 거 있으니까 가져와 주실래요?"
"네, 잠시만요~."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손발이 척척 잘 맞았다.
유안은 음식을 먼저 먹지 않고 홍소라, 김주현, 방재이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기다렸다.
홍소라가 제 앞에 놓인 접시의 킹크랩 살점을 포크로 콕콕 건드리며 말했다.
"게, 게살 버거 같은 건 어떨까요···?"
"샌드위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 이거 어차피 양 많으니까 한 마리 분량 정도는 게살 패티로 만들어 볼게요!"
"식사 대용으로 좋겠네요."
던전 게이트 근처 배고픈 헌터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햄버거와 샌드위치라면 먹을 때 간편하기도 해서 여기저기 들고 다니기도 좋고.
유안은 홍소라가 만들 게살 버거와 샌드위치를 기대하며 침을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창 길드장이 게딱지에 내장 볶음밥을 가득 쌓아 가지고 왔다.
양손에 트레이를 몇 개씩 여유롭게 드는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유안은 곧장 헌터 디바이스를 꺼냈다.
"아, 최선진 씨도 부르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진 선이 다리를 살짝 휘청거렸다.
다행스럽게도 금세 자세를 바로잡았기에 음식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수창 길드장이 홀로 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라가 입을 열었다.
"어, 아, 사장님··· 아까 제가 연락해 봤는데 못 오신대요. 오, 오늘 회식 있다던데요···."
"···그렇습니까?"
"네, 네···. 지, 지금은 회식 중이라 연락해도 안 받을 거예요······."
"아쉽네요."
그래도 회사 일 때문이니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는 꼭 불러야지.'
유안은 그렇게 다짐하며 어느새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킹크랩 음식들을 보았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살이 다 발린 킹크랩 껍데기들이 전리품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스틱 브레드, 알코올 음료, 게살 파스타와 내장 볶음밥이 둘러쌌다.
"파스타 면은 뒷마당에 조금 자란 밀을 수확해서 만들어 봤어요. 지금은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없어서 저희끼리 회식할 때만 쓸 수 있겠지만요."
"먹어보고 괜찮으면 밀 씨앗을 구해서 좀 더 심어봅시다."
"네, 사장님."
모두 자리에 앉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유안은 당연히 집게발 모양 그대로 발린 게살부터 집었다.
얼굴 크기의 그것을 한 입에 털어넣으니 야들야들한 살결이 혀를 즐겁게 했다.
'간이 잘 됐어. 너무 짜지 않고 적당하게.'
그리고 게살의 끝맛이 은근히 달콤하기도 했다.
유안은 던전산 킹크랩 맛에 아주 만족하며 제 접시에 쌓인 살점을 금세 해치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서정원이 게딱지에 담은 볶음밥 하나를 건네주었다.
"먹고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주방에 더 있어요, 사장님."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유안이 숟가락을 꼭 쥐었다.
푸욱.
고슬고슬한 쌀알이 킹크랩의 고소한 내장과 잘 비벼져 있었다.
채소도 함께 볶아내서 영양까지 가득한 그것을 한 술 크게 푸니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볶음밥을 한 입 맛본 유안은 감탄하는 것도 잊은 채 열심히 숟가락질만 했다.
적당한 수분기를 머금어 질척한 식감의 볶음밥에서는 여러 맛이 다양하게 났다.
해산물 특유의 짭짤함, 고소함이 비린 맛을 억누르는 킹크랩 내장, 함께 볶은 통통한 게 다릿살, 불에 볶아졌어도 아삭한 식감을 유지하는 던전산 채소들.
다채로운 맛을 느끼다 보니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유안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모두들 먹는 데 열중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크웅.
게살 몇 점을 얻어먹은 중앙이만 테이블 근처를 빙글빙글 돌며 혼자서도 잘 노는 중이었다.
스틱 브레드를 킹크랩 내장에 찍어 먹던 권재윤은 달콤한 에이드로 입가심했다.
"캬아! 근처에 수중 던전만 있으면 킹크랩 당장 멸종시키러 갈 텐데! 비조 길드 애들 부러워요. 맨날 이런 거 먹고 살겠네?"
"권재윤, 비조에도 친한 헌터 있어?"
"실제로 만난 적은 없고~ 그냥 게임 친구들 몇 명 있지!"
"길드장님, 얘 아무래도 위험 분자 같습니다."
조서혁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진 선이 웃으며 두 사람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사이 좋네.'
수창 길드원들끼리 친한 것이야 종종 봤으니 알고 있었지만, 길드장 진 선도 길드원들과 이렇게 허물 없이 지내는 줄은 몰랐다.
'그래봤자 상급 헌터들한테만 잘해주는 거겠지만.'
유안은 최선진이 수창에서 겪었다는 일을 떠올릴 때마다 미약한 분노가 일곤 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수창 길드장의 태도가 하급 길드원들 앞에서는 어떻게 변할지···.
*
식사를 마친 수창 길드원들은 거액의 식사비를 유안의 헌터 디바이스로 보냈다.
대형 길드 사람들 통이 큰 것은 익숙했으니 유안도 부담 없이 돈을 받았다.
저녁 식사 후 자연스럽게 이어진 디저트 타임에 중앙 카페 사람들과 수창 길드원들은 티 테이블에 둘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킹크랩 테이블은 일단 뒷마당 구석으로 밀어둔 채였다.
디저트 타임이 끝나고 다같이 치우기로 했다.
"중앙 카페 음식 덕에 부상자 없이 공략 성공했다니까요~."
"다행이에요. 음료 부족하진 않았어요?"
"아뇨, 전혀요? 짱 많이 챙겨주셔서 남은 건 제가 집 가서 다 마셨는데요!"
"하하, 언제든 마시고 싶은 거 생기면 놀러 오세요."
"그게 사실~ 요즘 중앙 카페 가려고 하면 길드장님이 자꾸 따라오려고 해서요! 제가 길드장님을 좋아하긴 하지만 가끔은 저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구요!"
권재윤과 서정원은 강남 게이트 이야기를 시작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