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 많다는 걸 느끼며 발로 땅을 툭툭 찼다.
'2호선이지···.'
서울의 교통을 크게 책임지는 노선 중 하나라서 헌터 협회도 골머리 깨나 썩겠다.
그리고 유안은 [저주받은 세계수 던전] 아래에도 지하철이 다니던 때가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워낙 초기에 발생한 던전이라 지하철이 폐쇄된지 오래라서 완전히 잊고 있었네.'
유안은 중앙 던전 아래쪽을 지나는 지하철 노선도 2호선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러다가···
반짝!
이유안의 눈이 빛났다.
"해민아."
이 생각을 왜 이제야 했지.
유안은 조금 두근대는 마음으로 강해민을 불렀다.
"당장 바빠지는 거 아니면 내 의뢰 하나만 들어줄래?"
재개통 프로젝트
유안은 제 옆에 앉은 해민의 옷자락이라도 꼭 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중앙 카페 3층 사무실의 네 사람은 평소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조합이었다.
해강특수건설의 강해민 사장, 헌터 협회 던전 관리 파트장 류지우, 중앙 카페 사장 이유안.
그리고.
'헌터 협회장 나효숙.'
20년 전 초기 각성자 중 하나이며, 중앙 던전 대참사를 단신으로 막아내어 수천 명의 시민을 살린 인물.
그 존재는 전설처럼 전국민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중앙 던전 대참사 이후에도 나효숙의 공로는 이어졌다.
수백, 수천 명을 보호하는 나효숙만의 스킬은 해외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던전 출몰의 여파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헌터 협회가 생겨났고, 자연스레 그 수장을 나효숙이 맡게 되었다.
대체할 인물이 없다는 것이 국가 기관들의 판단이자 세간의 평가이기도 했다.
지하철을 몰던 사람이 고위직 일을 잘 해낼 수 있겠냐는 일부 비판도 있었으나, 나효숙은 그 비판들을 타고난 리더십으로 무참히 짓밟았다.
나효숙은 헌터 협회장을 맡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 자리를 15년 넘게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중앙 카페의 비매품 잎차를 마시며 유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효숙의 눈에 흥미가 가득했다.
'기왕 뚫려 있는 지하 좀 이용해보고 싶다고 한 것뿐인데··· 왜 협회장까지 데리고 온 거야!'
유안은 은근슬쩍 협회장 옆에 앉은 류지우를 노려봤다.
류지우가 원망스럽지 않은 순간은 거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유독 더 얄밉고 재수 없었다.
의견 하나 냈다고 자기 편 대장을 홀랑 불러오다니.
"그래서, 서울 지하철 2호선을 재개통하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조효숙은 고급스러운 찻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고저 없이 물었다.
괜히 숙제 검사 받는 초등학생처럼 쫄아든 유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정확하게는 지하로 이어진 구간 일부를 이용하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게이트가 내뿜는 마나 파장을 제거할 방법도 확실하다,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예, 그건 류지우 파트장님께서 직접 증명해주셨습니다."
유안은 지우에게 관심이 쏠리도록 말을 넘겨버렸다.
직장 상사의 질문 공세에 당해보라는 마음에서 배턴을 던진 것인데, 류지우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협회장 말에 답했다.
"협회에서 가장 정확한 마나 측정기를 가지고 이 건물의 마나량을 측정해 봤을 때, 건물 어디에서든 수치 제로가 나왔습니다. 건물 근처도 마찬가지였고, [저주받은 세계수 던전] 게이트 근처의 제한 구역 전체에서 고르게 마나량이 줄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마나 파장이 약해졌다는 건가."
"네, 맞습니다. 협회장님."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여쭈어도 되나요?"
턴이 자연스럽게 유안 쪽으로 다시 넘어왔다.
'어떡하지.'
류지우가 뱀처럼 씨익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으려고 일부러 협회장까지 부른 것이 확실했다!
유안이 대답을 망설이자 협회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내게는 다 말해도 괜찮아요. 헌터 협회는 헌터들을 위한 기관이니, 이유안 헌터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랍니다."
"···예."
나효숙의 눈동자에 언뜻 푸른 안광이 스쳤다.
스킬이었다.
"E급 헌터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요?"
"······예, 맞습니다."
시선을 피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그럴 수가 없었다.
푸른 빛에 잠식당하는 것 같았다.
나효숙의 스킬, [불편한 진실]은 스킬 사용자 등급 이하의 헌터에게만 통했다.
헌터 협회장이 C급, 이유안이 E급이니 두 단계나 차이가 났다.
유안에게는 무척 잘 통하는 스킬이란 뜻이었다.
"달콤한 거짓을 말해 입을 찝찝하게 만들 필요는 없어요. 때로는 씁쓸하고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발언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요."
"······예."
"자, 이유안 헌터. 무슨 수로 이 건물을 마나 프리 존으로 만드셨지요?"
"그건······."
유안의 이성과 본능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이걸 순순히 밝히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입이 멋대로 움직이려 했다.
그때였다.
터업.
옆자리의 해민이 커다란 손으로 유안의 시야를 가려버렸다.
"해민아?"
"눈 감고 입 다물고 있어라. 너 지금 아무래도 좀 이상하니까."
강해민이 낮고 빠른 어조로 유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해민은 비각성자였으나 분위기를 보고 나효숙이 스킬을 썼다는 걸 느꼈다.
[불편한 진실]은 독특하게도 비각성자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정신계 스킬이었다.
강해민은 유안의 눈을 가린 채로 헌터 협회장에게 대신 답을 주었다.
"마나 프리 존을 만드는 방법에 관해서는, 해강특수건설의 영업 비밀입니다. 해강 그룹 전체에서 기밀로 처리되고 있는 사안이기도 하죠. 외부로 유포되는 순간, 아무리 고위급이더라도 비밀 유지 조항을 어긴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그러니 사장인 강해민 본인도 깊은 설명을 해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나효숙은 더 따져들지 않고 입꼬리를 미세하게 떨며 웃었다.
"그러시군요. 아쉽네요."
"방법은 알려드릴 수 없지만, 더 센터 빌딩을 세운 해강에서는 앞으로도 마나 프리 존을 계속해 만들 수 있습니다. 헌협에서 허가만 내준다면 지하에서도 충분히 가능하겠죠. 아니, 지상보다 오히려 쉬울 수 있습니다. 폐쇄된 공간이니."
"그러신가요."
"헌협의 마나 측정기를 전부 들고 와서 24시간 확인하셔도 됩니다. 저희는 자신 있습니다."
강해민이 단호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기업들 간에 조율할 사항이 필요할 때 기싸움을 하게 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이 겪었다.
상대가 헌터 협회로 달라지기만 했을 뿐, 해민에게는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아 미약한 긴장감조차 들지 않았다.
게다가 헌터 협회는 해강특수건설과 여러 분야에서 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손을 놓아서 아쉬울 건 오히려 헌협 쪽일 것이다.
"해강에서 그렇게까지 말하시니 믿어 보아야겠지요."
나효숙이 스킬을 해제하며 순순히 물러섰다.
푸른 안광이 사라졌지만 해민은 여전히 유안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
폐쇄된지 20년이 지난 지하철 입구 앞에 네 사람이 모였다.
원래는 류지우, 이유안, 강해민 셋이서 진입하려 했으나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싸장님! 이거 진짜 제가 다 먹어도 돼요?"
"예, 전부 태영 씨 겁니다."
정태영은 유안이 바리바리 싸온 고기 도시락을 트로피처럼 들고 있었다.
B급 헌터 태영을 부른 이유는 정태영이 가진 스킬 때문이었다.
질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지는 정태영은 드물게 멀티 플레이가 가능한 헌터였다.
방어 계열과 공격 계열 스킬을 모두 가진 것이다.
처음에는 서정원을 데리고 올까 생각했으나 정원에게는 방어계 스킬이 하나도 없었다.
류지우는 타고난 힐러이고, 유안은 E급 헌터라 전투에 쓸 만한 스킬이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강해민은 비각성자이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E급 헌터인 나랑 비각성자 강해민만 데리고 그냥 진입하려고 했었지. 본인이 S급 힐러라고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냐?'
류지우는 지하에서 다치게 되면 곧장 힐을 쓸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유안의 관점은 조금 달랐다.
'다치면 아프잖아. 아프고 나서 치료할 바에는 처음부터 안 다치는 게 낫지.'
그 당연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류지우가 매정하게만 느껴졌다.
헌터 협회에서 독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가 다 있었다.
"여기 파트장님 것도 있습니다."
"···또 그겁니까?"
"이번엔 다른 겁니다. 저번 건강 주스는 마나 회복과 피로 회복에 중점을 뒀는데 이번 건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부디 이걸 마시고 오늘은 히스테릭 좀 덜 부리길 바라며, 유안은 진녹색 건강 주스를 류지우에게 건넸다.
지우는 이번에도 독이나 저주가 걸리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주스를 받아 마셨다.
류지우의 미간이 구겨지는 모습을 보고 유안의 속이 뻥 뚫렸다.
"생각보다 괜찮지 않습니까?"
"···들어갑시다."
흠, 건강 주스의 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
원래라면 무슨 헛소리냐며 짜증 낼 타이밍이었는데 그냥 넘어간 걸 보면.
유안은 인벤토리에 남은 건강 주스 세 잔을 확인하며 류지우가 재수 없을 때마다 하나씩 건네기로 다짐했다.
지하로 내려오자 공기가 확 무거워졌다.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지하도라서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가 네 사람을 맞이했다.
"[실드]."
그러나 정태영 덕분에 호흡기에 타격을 입는 일은 없었다.
태영이 쓴 기본 실드가 먼지 덩어리들을 깔끔하게 막아주었다.
정태영은 지하에 들어온 이후 계속 입에 고기를 넣고 우물거리는 중이었다.
먹은 것이 곧장 스킬 효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쉴 새 없이 먹어야 했지만, 정태영은 계속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맛있워···."
고기 도시락 하나를 끝장낸 태영이 곧장 다음 것을 열며 뭉개지는 발음으로 감탄했다.
'행복해 보이니 됐지.'
유안은 류지우와 정태영의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 센터 건물과 조금 떨어진 곳의 지하도라서 곳곳에 마나가 분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핵으로 만든 반지를 낀 강해민 덕분에 네 사람 주변에는 마나가 차단되었다.
"조심하시죠."
"우움, 눼엥."
류지우가 무너진 바닥을 피해 돌아갔고, 정태영은 그곳을 가볍게 점프해 넘어갔다.
"해민아, 우린 이쪽으로 가자."
유안은 비각성자인 해민을 이끌고 스크린 도어 쪽으로 다가갔다.
살짝 열린 그것을 강제 개방하자 비교적 멀쩡한 철로가 드러났다.
류지우와 정태영도 철로의 상태가 궁금했는지 따라 내려왔다.
"스크린 도어가 벽에서 떨어지는 돌을 많이 막아주었나 봅니다. 여긴 피해가 적군요."
지우가 철로의 상태를 체크하며 말했다.
보고서에 쓸 사진도 몇 장 찍는다.
유안은 아직 튼튼한 철로를 발로 디디며 해민에게 물었다.
"해민아, 너희 회사에서 철길 깔아본 적은 없어?"
"···뭐?"
"아니, 그냥 궁금해서. 던전 부산물로 철길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만들 수야 있긴 한데, 그걸로 뭘 하려고?"
뭐긴.
지하철이 더 이상 다니지 않는 철로를 재활용할 방법이 불현듯 떠올랐을 뿐이다.
"또 이상한 생각 하는 것 같은데."
"아냐, 해민아."
"···제발 혼자 생각하고 결론만 띡 말하지 말고, 사고 과정도 말해라."
"응, 알았어."
유안은 해민에게 대충 답하고 휘적휘적 앞서 걸어갔다.
철로가 튼튼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바로 위쪽에 던전 게이트가 생기고 그 난리가 났는데 이리도 멀쩡하다니.
유안은 지하도를 만든 기술자인 것처럼 뿌듯해졌다.
지하 탐사대는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를 꼼꼼히 조사하며 걸은 뒤 지상으로 나왔다.
정면에 더 센터 건물이 보이는 위치의 출구였다.
*
서울 지하철 2호선 일부 구간을 보수하는 프로젝트는 헌터 협회와 해강특수건설이 전적으로 맡아 주었다.
유안은 정태영이 파밍해 온 핵의 일부를 강해민에게 전해주고 프로젝트 진행 상황만 간간이 전해 들었다.
자잘한 일처리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유안은 한동안 중앙 카페의 업무만 처리하며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으, 으악. 얘는 살아있는 거 같은데요···?"
헌터 택배로 빠르게 배송된 스티로폼 상자를 열자, 흉악한 집게발을 움직이는 던전산 킹크랩이 나타났다.
홍소라가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경악했다.
"신선하네요."
서정원은 싱긋 웃으며 해산물을 평가했고.
[이번 택배도 잘 받았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유안은 헌터 디바이스로 비조 길드의 직원에게 감사 인사부터 전했다.
[킹크랩은 꼭 통째로 쪄 드세요. 그렇게 먹는 게 제일 맛있거든요 ㅎㅎ]
리셉션 직원이 곧장 답장을 보냈다.
유안은 알았다고 답한 뒤 킹크랩 넣을 냄비를 찾아냈다.
던전산 식재료는 대부분 큼직하고 억세기 때문에 크고 단단한 조리기구가 필수였다.
김주현이 공방을 더 센터 3층으로 옮기고부터는 주방용품이 더 다양해져서 냄비야 크기별로 있었다.
"여, 열 마리는 되는 것 같은데··· 이, 이거 우리끼리 다 못 먹겠어요, 사장님."
유안의 몸통보다 큰 킹크랩이 열 마리니까 중앙 카페 직원들의 입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제는 최선진 알바생도 일을 그만두었으니 음식을 먹어치울 사람이 한 명 줄어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