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37)

자연스럽게···.

"새로 길드장님. 오늘 느끼셨겠지만 제가 사장이라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라, 중앙 카페 정말 괜찮은 곳입니다. 방문하는 헌터들의 만족도도 높아요."

"네, 이제 중앙이도 생겼고요."

"예. 그런데 헌터 협회에서 중앙 카페를 탐탁치 않아 하고 있습니다."

유안은 헌터 협회에서 중앙 카페에 요구한 서류들을 나열하며 새로 길드의 동의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어필했다.

차건오는 유안의 말을 잠자코 듣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동의서를 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중앙 카페 사장님께서 약속 하나만 해 주신다면요."

"무슨 약속 말입니까?"

"중앙 카페 메뉴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새로 길드를 최우선 거래처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당장은 말고 나중에요."

"···새로 길드장님과 제가 계약서를 쓰면 되는 겁니까?"

"아뇨.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요.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만 해주시면 믿겠습니다."

차건오는 중앙이가 입가에 흘린 침을 닦아주며 말했다.

'구두계약이라···.'

유안은 고민했다.

새로 길드와의 거래 시기를 명확하게 정한 것도 아니니 괜찮으려나?

수창, 새로, 비조 중 하나와 연을 맺는다면 새로가 가장 적합하기는 했다.

수창은 하급 헌터라는 이유로 직원을 멋대로 해고할 정도로 질 나쁜 대형 길드니까 패스하고, 비조는 너무 멀어서 탈락이었다.

거래에 차질이 생길 때마다 제주도를 오가는 건 물리적으로 힘든 일이다.

유안이 바로 답하지 못하자 차건오는 덧붙여 말했다.

"부담을 드리려는 건 아니에요. 저희 길드원들이 중앙 카페를 워낙 좋아해서 생각한 방법입니다. 대량 생산이 힘들면 어쩔 수 없고요."

"그럼··· 대량 납품은 힘들더라도 새로 길드에서 단체 예약은 가능하게 하겠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만요."

그 이상은 너무 잦다.

유안이 고심 끝에 내린 타협점에 차건오는 순순히 동의했다.

"네, 그렇게 합시다. 동의서는 길드 도착하면 바로 보내드릴게요."

-끄우.

중앙이도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작게 울었다.

잘 만큼 잤는지 눈을 뜬 포식자는 부하1의 품에서 벗어나 땅으로 내려갔다.

아르네스 던전의 흙이 소복이 쌓인 곳으로 달려간 중앙이가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뭐, 뭘 하려는 걸까요···?"

찰칵, 찰칵.

홍소라는 중앙이의 모든 행동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착실하게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이중앙은 땅을 파서 생긴 구덩이 속으로 작은 머리를 집어 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대 포식자]가 작은 보랏빛 돌 하나를 입에 물고 달려왔다.

[고대 포식자]는 부하를 칭찬하는 마음에서 선물을 주려고 합니다!

-부하야, 네 품은 넓고 따뜻해서 좋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이건 오다 주웠다.-

새로운 던전

차건오는 중앙 카페의 마스코트가 물어다 준 돌을 곧장 유안에게 넘겼다.

카페 뒷마당에서 발견된 것이니 자신이 가질 수 없다는 양심적인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유안은 오랜만에 김주현의 만물 공방에 방문해 돌을 내밀었다.

"핵 맞아요. 품질은 오히려 더 좋은 것 같은데요?"

그런데 보랏빛 돌을 살펴보던 주현이 뜻밖의 말을 한 것이다.

"이거 크기는 작지만 세공하면 성능은 훨씬 좋을 것 같아요. 태영 씨가 아르네스에서 파밍해 온 것보다요."

"어느 정도로 좋습니까?"

"세공해봐야 알 것 같기는 한데요. 그래도 중앙 던전 게이트 제한구역 절반은 커버할 수 있을 거예요."

"······."

"이 사장님, 어디서 이런 대박 아이템을 구한 거예요?"

주현은 핵을 어떤 모양으로 세공할지 좀 더 살펴보며 물었다.

유안의 인벤토리에서는 언제나 신기한 물건이 튀어나오고는 했으니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았지만, 이번 건은 스케일이 달랐다.

[고대 포식자의 핵]을 다른 사람이 채가기 전에 파밍하기 위해 유안이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김주현은 잘 알았다.

다른 일에는 서두르는 기색 없던 이유안이 정태영에게 부탁해서 아르네스를 파밍하게 했다.

던전은 위험하다며 직원들은 절대 못 들어가게 하는 카페 사장이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유안이 찾던 것의 최상위 호환이라고 볼 수 있는 아이템이 생겨버렸다.

[고대 포식자의 선물]

배 부르고 등 따뜻한 고대 포식자가 준 선물.

아이템 설명은 이랬다.

김주현은 자신이 가진 스킬 중 하나인 [도감 수집]을 써 봤고, 반짝반짝 빛나는 돌은 눈에 띠는 글자를 띄우며 주현의 도감에 새롭게 수집되었다.

new!

처음 감정한 아이템에만 뜨는 그 표시가 뜬 것이다.

확실히 [고대 포식자의 핵]과는 달랐다.

그리고 많은 아이템을 다뤄온 주현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거··· 절대 평범한 재료는 아니야.'

세공하는 것도 상당한 노고가 들 것 같았다.

일단 주현이 원래 쓰던 세공용 칼은 먹혀 들어가지도 않았다.

크기는 작지만 어찌나 단단한지, 웬만한 칼날은 돌에 닿는 순간 종잇장처럼 우그러졌다.

칼이 네 개째 망가지자 주현의 도전 욕구가 화르륵 불탔다.

"김주현 씨,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앞으로 꾸준히 생길 것 같으니."

"네? 이런 걸 또 가져오신다고요?"

"예, 아마도 생길 것 같습니다."

주현도 이미 헌터그램을 통해 중앙이의 존재를 보았기에 설명은 어렵지 않았다.

유안이 전해주는 중앙 카페 뒷마당 상황을 경청한 주현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이 사장님, 저 결정했어요. 더 센터 건물 3층에 남는 방 있죠? 거기 월세 얼만가요?"

카페에 필요한 아이템을 만들 때는 중앙 카페 뒷마당으로 가서 작업하곤 했다.

그러나 중앙 카페가 아니라 다른 손님들에게 판매할 물건을 만들 때는 여전히 공방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쪽에 있는 짐이 많아서 단번에 뚝딱 옮길 수 있는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사장님이 아무리 좋은 분이라고 해도··· 중앙 카페에서 쓸 것도 아닌 물건들을 뒷마당에 바리바리 쟁여두는 건 좀 그러니까. 거기가 내 전용 창고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김주현은 아예 3층의 방 하나를 정식으로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더 센터 건물에서 공방을 운영하면 여러 모로 이점이 많았기에 유안만 허락해주면 월세가 비싸더라도 들어가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김주현 씨, 건물 세울 때 주현 씨가 공방도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아···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건물이 생긴다기에 농담처럼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었는데.

유안이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미 마련해 뒀습니다. 김주현 씨 공방 자리."

이유안은 3층의 가장 큰 방을 만물 공방 자리로 찍어두었다.

김주현이 천천히 짐을 옮길 거라 생각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당장 들어오셔도 됩니다."

유안은 담담하게 입주를 허락했다.

*

헌터 협회에서 요구한 서류는 우편으로 보내도 괜찮았지만, 유안은 마음 편하게 직접 찾아가 제출하기로 했다.

던전 관리 파트장이 또 어떤 수를 써서 방해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확실하게 움직이는 쪽이 나았다.

헌터 신분을 인증하고 들어간 협회는 오늘따라 정신없이 바쁜 느낌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호출을 받고 불려온 상급 헌터들도 많았고, 협회 직원들은 두꺼운 서류철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월요일이라 그런가···?'

유안은 중앙 카페를 직원들에게 맡기고 아침부터 협회로 온 참이었다.

카페는 쉬는 날 없이 매일 영업하니, 협회 건물에 도착하고 나서야 공무원들의 평일 첫날이 비로소 실감났다.

던전 관리 파트는 협회 건물의 14층을 통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만원 엘리베이터에 오른 유안은 14층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우르르 내렸다.

'여기는 사람이 더 많네.'

1층 로비보다 복작거렸다.

대체 무슨 일인지 이리저리 고함이 오가기도 했다.

B급 이상의 헌터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우르르 몰려 커다란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개중에 중앙 카페의 손님으로 왔던 헌터들도 있어 묘하게 낯이 익었다.

그래도 수창, 새로, 비조 길드의 헌터들은 없었다.

대형 길드를 제외하고 중소형 길드에서 헌터들을 차출한 것 같았다.

상급 헌터가 한 곳에 모이는 일을 극도로 꺼리는 헌터 협회에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떤 문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안은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서류 내야지.'

상급 헌터들과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며 던전 관리 파트 직원 한 명에게 다가갔다.

직원은 무척 바빠 보였으나 유안이 말을 걸자 하던 일을 멈추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중앙 카페의 서류를 제출하러 왔습니다."

"아, 파트장님이 심술 부린 그···! 잠시만 기다리세요!"

"예, 알겠습니다."

유안은 서류를 품에 안고 직원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중앙 카페 얘기가 나오자 일에 집중하던 직원 몇몇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들고 유안 쪽을 바라보았다.

대체로 측은지심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여기 직원들도 힘들겠네.'

그런 성격의 인간을 상사로 두었으니 매일 퇴사하고 싶을 것이다.

유안은 문득 중앙 카페 직원들이 생각나서 헌터그램을 확인했다.

30분 전에 중앙이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카페는 오늘도 평화로운 듯했다.

중앙이를 안은 팔을 보아하니 새로 길드장이 또 방문했나 보다.

"생각보다 빨리 구해오셨군요."

헌터 디바이스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날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안은 디바이스를 집어넣고 오늘따라 짜증 가득한 표정의 류지우를 바라보았다.

"예. 여기 있습니다."

서류를 내밀자, 류지우는 그것을 받아 꼼꼼하게 확인했다.

문서 읽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허···, 새로와 비조에서 동의서를 순순히 내줄 줄은 몰랐는데요."

"받아오라고 한 건 헌터 협회이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이런 서류를 시키신 겁니까?"

"···뭐, 좋습니다. 중앙 카페가 앞으로 영업하는 데 차질이 생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헌터 협회에서 인정한 영업장이면 협회의 보호를 받으니,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더라도 협회는 중앙 카페 측의 손을 들어줄 거고요. 웬만한 건이면 말입니다."

힘들게 서류를 구한 보람은 있었다.

류지우는 그래도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공무원은 아니라서 중앙 카페를 정식으로 인정해주었다.

헌터 협회를 등에 업은 중앙 카페는 좀 더 안전한 장소가 될 것이다.

"아, 먼저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저도 이유안 헌터와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일이 바쁘네요."

류지우는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 대회의장의 인파를 확인했다.

유안은 그 순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어디 던전이라도 터졌습니까?"

"······."

류지우가 곤란하다는 듯 유안의 시선을 피한 건 그때였다.

까칠한 성격이기는 하나 거짓말에는 영 재주가 없는 지우가 답변을 회피하고 싶을 때 보이는 습관이었다.

"아직, 터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곧 터집니까?"

"오전 중으로 특보가 하나 나갈 겁니다. 그걸 확인하시면 되겠군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전한 류지우가 대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곧 회의장 문이 닫혔고, 유안은 다급하게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실시간 검색어도, 뉴스 탭도 아직은 잠잠했다.

'회귀 전을 떠올려 보자.'

던전은 불규칙적으로 생겨난다.

그래서 회귀 전의 던전 생성 순서와 회귀 후의 그것은 무척 달랐다.

유안은 틈틈이 회귀 전의 정보를 정리하며 어떤 던전이 어디에 나타날지 추측하고 있었으나, 모든 것은 들어맞지 않았다.

회귀 이후에는 던전이 새로 출몰하는 일을 겪은 적 없다.

'원래라면 못해도 세 개 정도는 더 터졌어야 하는데. 제주도에 하나, 강원도에 하나, 그리고··· 서울에도 하나.'

헌터 협회 본부는 서울에 있으나 각 지역마다 헌협 지부가 있었다.

그러니 다른 지역에서 던전 발생이 예측된 것이라면 그 지역의 지부로 헌터들이 소집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의 협회 본부에 상급 헌터들이 몰려들고 있다.

다른 지역도 아니고, 서울에 던전이 터진다는 소리다.

'설마··· 그 던전이 벌써 나온다고?'

회귀 후의 던전 생성이 얼마나 불규칙적으로 변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유안은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앞으로 3년, 서울에 새롭게 생기는 던전은 거기 하나뿐이다.

유안이 회귀하기 직전에 등장한 던전이자, 이유안이 가장 싫어하는 던전이기도 했다.

*

서류를 제출하고 중앙 카페로 돌아온 유안은 헌터 디바이스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뒷마당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더니 중앙이가 자꾸 다가와서 유안의 손을 건드렸다.

"이건 장난감 아니야."

디바이스를 몇 번 빼앗으려다 실패한 이중앙은 음료를 가지고 온 서정원의 다리에 매달렸다.

새로 길드장이 급한 일로 길드에 돌아가자, 작은 포식자는 중앙 카페에서 가장 등급 높은 서정원에게 찰싹 들러붙었다.

엄청난 등급차별자 너구리였다.

"사장님,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으세요?"

"연락을 기다리는 건 아닙니다. 그냥···."

오전 중으로 특보가 뜬다고 했는데, 아직은 고요하기만 했다.

던전 예보가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니 헌터 협회가 잘못 예측한 것일 수도 있다.

유안은 최악의 수를 상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서정원에게 말했다.

"최선진 씨는 오늘 결근이라고 하셨죠?"

"네, 사장님. 어제 무리해서 몸살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음, 내일은 죽이라도 끓여야겠습니다."

"오늘 시험삼아 만들어 볼게요."

서정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안이 카페 뒷마당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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