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37)

어린 고양이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동상이 작은 입으로 차건오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아."

아프진 않았지만 갑자기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동상에 놀라서 목소리가 나왔다.

[고대 포식자]는 이제 구릿빛 동상이 아니라 짙은 회색과 갈색의 줄무늬가 새겨진 털 동물이 되어 있었다.

S급 헌터의 손길에 눈을 뜬 [고대 포식자]는 제가 깨문 인간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차건오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고대 포식자]는 눈을 뜨고 처음 만난 당신을 부하로 생각합니다!

[고대 포식자]가 당신에게 말합니다.

-야, 너 내 이름 지어라!-

중앙 마스코트

차건오는 눈앞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름을 지어줄 때까지 창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크응.

그리고 깨어난 [고대 포식자]도 다시 잠들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름을 맡겨둔 것처럼 구는 포식자가 건오의 손가락을 또 깨물었다.

"이름···."

건오는 작은 포식자의 입질을 받아주며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포식자는 차건오의 손을 앙앙 깨물다가 내심 걱정이 됐는지 이제는 볼을 부비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자신이 물어서 인간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로하는 행위었다.

차건오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어린 포식자는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종내에는 건오의 팔을 타고 열심히 등반해 정상까지 올랐다.

S급 헌터의 어깨 위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포식자가 짜리몽땅한 앞발을 차건오의 정수리에 터억- 올렸다.

"중앙 카페니까······."

오랜 고민 끝에 차건오는 시스템 창에 두 글자를 입력했다.

[중앙].

다소 직관적인 이름을 짓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제 이름이 생긴 것을 느낀 포식자가 차건오의 어깨 위에서 꼬리를 팡팡거렸다.

더 멋져 보이는 이름을 지어줄 수도 있었지만, 중앙 카페 뒷마당에 있던 동상에 너무 뜬금없는 이름을 붙이기는 좀 그랬다.

자신의 손길에 깨어났다고는 해도 동상은 원래 중앙 카페 사장의 소유물이었을 것이다.

"마음에 들어?"

차건오가 퍽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캬웅.

중앙이가 된 [고대 포식자]의 등을 살살 쓰다듬자, 시스템 창이 동물의 말을 전해주었다.

[고대 포식자]는 부하가 지어준 이름을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 합니다!

-흥, 나쁘지는 않아.-

그러면서 꼬리를 팡팡 내리친다.

차건오는 중앙이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가 원래 자리에 내려두었다.

"여기서 놀고 있어 봐. 네 진짜 부하 데리고 올게."

뒷마당에 나왔다가 갑작스레 간택을 받기는 했으나, 중앙이의 진짜 보호자는 따로 있었다.

차건오는 카페 건물로 다시 들어갔다.

다행히 중앙이는 건물 내부까지 따라 들어오지 않고 아르네스의 흙이 깔린 곳에서 팍팍거리며 땅을 파고 놀았다.

"중앙 카페 사장님."

"···예?"

간만에 체력을 쓴 대가로 너덜너덜하게 바 테이블에 기대어 서 있던 유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뒷마당에 잠시 바람 쐬러 갔던 차건오는 어째서인지 흰 셔츠에 갈색 털을 덕지덕지 묻히고 있었다.

'뒷마당에서 뭘 하고 온 거야···?'

더 센터 건물 1층의 삼면은 전면창이지만 후면은 불투명한 벽으로 막아두었기 때문에 그 바깥을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중앙이의 탄생도 보지 못한 유안으로서는 새로 길드장이 갑자기 자신을 부른 것부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설마 주문을 더 하려고···?'

좋으면서도 힘든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차건오는 다른 말을 꺼냈다.

"바깥에 좀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뒷마당 쪽이요."

"뒷마당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문제는 아니지만··· 일단 같이 가 보시죠."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뒷마당으로 따라 와!'인가.

E급 유안은 몸을 바짝 긴장시키고 S급 차건오의 뒤를 따랐다.

차건오가 먼저 아르네스의 흙이 깔린 곳으로 걸어 들어가자, 혼자 잘 놀고 있던 중앙이가 도도도 달려와 건오의 다리에 찰싹 붙었다.

유안은 자신의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눈을 비볐다.

'새로 길드장이 너구리를 키우나?'

반려너구리라니, 독특한 취향이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갈색을 띠는 너구리는 보면 볼수록 묘하게 낯이 익었다.

살짝 접힌 귀와 뽕 튀어나온 주둥이가 아주 익숙했다.

어디서 봤던 걸까 고민하던 유안은 뒷마당에 있던 동상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새로 길드장이 인벤토리에 슬쩍 했을 리는 없고···.

"그 너구리··· 설마 여기에 있던 동상입니까?"

"네. 제가 살짝 만졌더니 깨어났습니다."

유안은 차건오의 발치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너구리를 보고 입을 작게 벌렸다.

[고대 포식자]가 진짜로 깨어났다.

"본의 아니게 제가 깨워서 이름 짓는 시스템 창도 제게 떴습니다. 중앙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중앙···."

그럼 이중앙인가.

자연스럽게 제 성을 붙인 유안은 굳어 있던 몸을 움직여 아르네스 흙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포식자의 땅에 발을 들이자 중앙이가 꼬리를 바짝 치켜들었다.

그리고 유안에게 우다다 달려와서 짧은 다리로 이유안의 신발을 톡톡 두드렸다.

-크우.

그리고 동시에 차건오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떴다.

[고대 포식자]는 막내 부하를 안타까워합니다!

-막내 부하야, 너는 정말 힘이 하나도 없구나. 힘을 내라.-

*

새로 길드원들은 정오가 지나자 칼같이 길드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다같이 반차를 내고 카페에 놀러 온 모양이다.

그러나 정작 길드장인 차건오는 길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손님을 참 잘 따르네요, 중앙이가."

"제가 깨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동물 키워본 적 있습니까? 잘 놀아주시네요."

"키워본 적은 없고, 좋아하기는 해요."

차건오는 헌터로 각성하기 전까지 길고양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다.

각성 후에는 아무리 기척을 죽여도 느껴지는 S급 헌터의 기백 때문인지 동물들이 슬슬 피하곤 했지만.

-키잉!

건오는 제 오른손을 희생해 중앙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유안은 차건오가 편히 앉을 수 있게 뒷마당에 소파 하나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옆에 앉아 중앙이의 모습을 구경했다.

"아, 중앙이가 배고프다고 하는데요."

"예···? 너구리 말도 알아들으십니까?"

"시스템 창으로 뜹니다. 제가 이름을 짓는 바람에 저한테만 뜨는 것 같군요."

"그렇군요."

새로 길드장이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괜히 이상한 사람의 손길을 받고 깨어났다면 결과가 좋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작은 포식자는 자신이 간택한 인간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유안도 안심했다.

차건오라면 앞으로도 중앙이를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앙이가 먹을 만한 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중앙이는 포식자의 영역, 그러니까 아르네스 던전 흙이 있는 곳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안이 직접 카페 주방에 찾아가 고기를 꺼냈다.

새로 길드원들이 떠난 뒤 한시름 놓고 있던 홍소라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사, 사장님, 고기는 어디에 쓰시게요?"

"아, 뒷마당의 동상이 깨어났습니다. [고대 포식자]요. 그래서 먹이로 줄 만한 걸-"

"지, 진짜, 진짜요?!"

"예. 지금 뒷마당에서 새로 길드장이 돌봐주고 있습니다."

홍소라는 유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주방을 뛰쳐나갔다.

혼자 남은 유안은 쓸쓸하게 사슴고기를 오븐에 구웠다.

고기의 반만 굽고 반은 날것으로 준비하는데 유안의 헌터 디바이스가 시끄럽게 울었다.

확인해보니 헌터그램 알람 소리였다.

홍소라가 중앙 카페 공식 계정에 중앙이 사진을 10장씩 올리며 #중앙_마스코트 태그를 달아두었다.

사진 중에는 홍소라가 버둥거리는 중앙이를 안고 찍은 것도 있었다.

차건오가 찍어준 것 같았다.

'재밌게 놀고 있으니 됐지.'

유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중앙이 밥을 챙겨 주방을 나왔다.

그런데 뒷마당으로 향하는 길에 1층 손님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야, 헌터그램. 헌터그램 봐 봐."

"왜? 뭐 올라왔··· 헐? 헐, 얘 뭐야? 진짜 건물 뒷마당에 있나?"

"뒷마당 들어가 봐도 되려나?"

"막혀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홍소라가 헌터그램에 중앙이 사진을 올리자마자 카페의 손님들이 그것을 보았고, 중앙이는 정말 순식간에 알려지고 말았다.

'음···.'

손님들의 말대로, 뒷마당을 막아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손님들이 편하게 구경할 수 있도록 뒷문을 개방해두기도 했다.

카페 마스코트의 밥을 들고 있던 유안은 짧은 고민을 끝내고 손님들을 불렀다.

"중앙이한테 밥 주러 갈 건데, 같이 가서 구경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열댓 명 정도 되는 손님들이 우렁차게 긍정을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안은 고양이 카페 사장이 된 기분으로 손님들을 뒤에 줄줄이 매달고 뒷마당으로 향했다.

-키우으으응!

"얼른 밥 달래요."

이제 완벽하게 중앙이 전용 통역기가 된 차건오가 자연스럽게 중앙이의 말을 해석했다.

유안이 익힌 고기와 날고기 둘 다 내밀자, 중앙이는 앙칼지게 날고기 쪽을 물어갔다.

'생고기를 더 좋아하네.'

유안은 중앙이의 취향을 파악해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익힌 고기를 아예 안 먹는 건 아니었다.

날고기를 금세 해치운 중앙이는 오도도 달려와서 익힌 고기까지 마저 삼켰다.

작은 몸집에 비해 먹어치우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과연 [고대 포식자]다웠다.

"너무 귀엽다···."

"아, 이 카페에 올 이유가 하나 더 생겼어."

손님들은 중앙이가 야무지게 고기를 해치우는 모습에 앓는 소리를 냈다.

이중앙은 탄생 하루 만에 중앙 카페의 마스코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

새로 길드장 차건오를 종일 괴롭힌 중앙이는 신나게 놀고먹다 잠들었다.

배 부분만 흰색 털이라 숨을 내쉴 때마다 오르라내리락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차건오는 부하1이 된 대가로 잠든 중앙이를 계속 쓰다듬는 형벌을 받았다.

그래도 S급 헌터라서 피곤하거나 지치지는 않았다.

유안은 카페 건물과 뒷마당을 틈틈이 오가며 뒷마당 테이블에 차건오를 위한 먹을거리를 가져다 주었다.

중앙 카페의 메뉴 전체를 하나씩 맛볼 때가 되자 영업 종료 시간이 가까워졌다.

어린 포식자는 여전히 입을 작게 벌린 채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카페 마감을 직원들에게 맡기고 뒷마당에 나온 유안은 슬금슬금 새로 길드장 쪽으로 다가갔다.

영업 시간도 끝났으니 차건오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새로 길드장님."

"네, 중앙 카페 사장님."

차건오는 오늘 처음 유안의 입에서 길드장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계속 손님, 손님 하기에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길드로 언제 돌아가실 겁니까?"

유안은 동의서를 받기 위해 새로 길드에 방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길드장이 여기서 이렇게 통역기 겸 집사로 활약 중이라 새로 길드에 방문해도 의미가 없었다.

동의서는 길드장에게만 받을 수 있으니.

"아, 슬슬 돌아가보긴 해야죠. 영업 시간도 지났는데 제가 너무 오래 있었군요."

차건오는 시간을 확인하고 품에 안은 중앙이를 살살 내려놓으려 했다.

중앙이가 '끄우으'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유안은 건오에게 다소 다급하게 말했다.

"중앙이가 새로 길드장님을 잘 따르니까 더 계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직원들과 저녁 해 먹고 들어갈 생각인데··· 괜찮으시면 새로 길드장님도 함께 식사하고 가십시오."

유안은 중앙이를 보살펴준 건오에게 소소한 감사 표시로 중앙 카페표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꿍꿍이가 있기도 했다.

'맛있는 음식으로 새로 길드장을 살살 녹여서 동의서 받아내야지.'

다행히 차건오는 제안을 수락했다.

유안은 최선진을 뺀 직원들과 함께 식사 준비를 했다.

선진은 무슨 일이 생겼다고 외치며 줄행랑을 쳐버렸다.

뒷마당에 있는 중앙이를 흘깃 본 것 같기는 했는데··· 와서 한 번 쓰다듬지도 않고 가버린 정신력이 대단했다.

생선찜과 고기찜이 함께하는 저녁은 완벽했다.

차건오는 중앙이를 품에 안은 채 한 팔로도 능숙하게 식사했다.

새로 길드장이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모습을 보며 유안은 동의서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갔다.

식사가 얼추 끝나자 유안은 큼큼거리며 차건오의 시선을 끌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검토한 말을 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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