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37)

유안은 오픈 첫날 장사를 마치자마자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헌터 협회에서 요구한 서류 이야기를 하니 모두가 적잖이 놀랐다.

"많이 바쁘면 제가 또 수창 길드원들 부를게요, 사장님~."

그래도 믿음직한 직원들이라 다행이었다.

유안은 최선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비행기 시간을 확인했다.

비조 길드에 찾아간다고 해서 동의서가 뚝딱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쪽 길드장이 동의해주지 않으려 하면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출발하는 게 중요했다.

해서 당장 제주도행 밤비행기를 예매한 유안은 길 떠날 채비를 했다.

던전 부산물로 만든 생활용품을 이것저것 챙겨준 주현 덕에 양손이 가벼웠다.

웬만한 물건은 전부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네, 사장님. 제주도까지 가는 김에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오세요."

"마, 맞아요! 제주도에 괜찮은 마카롱집 있는데··· 제, 제가 위치 링크 보내드릴게요."

"수창 길드 동의서는 저한테 맡겨요~! 새로 길드도··· 시도는 해 볼게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니 그래도 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금쪽 같은 첫 건물을 뒤로 하고, 유안은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순항하여 자정 무렵 유안을 제주국제공항에 내려주었다.

늦여름의 끝물이라 아침저녁으로 조금 쌀쌀해지 시작한 서울과 달리, 제주도는 여전히 여름이었다.

밤에도 따뜻한 공기를 마시며 유안은 택시를 잡았다.

"비조 빌딩 앞으로 가주세요."

비조 길드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 거점을 둔 길드였다.

그런데 길드장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갑자기 제주도의 월정리 해변 근처로 거점을 이동했다.

수도권에서는 수창과 새로가 틈을 내어주지 않고 있으니 아예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비조의 선택은 옳았다.

제주도와 그 주변의 던전을 꾸준히 공략하며 국내 3위 길드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으니까.

밤의 도로는 한산하여 1시간도 걸리지 않아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린 유안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폐부 가득 바닷바람의 짠내음이 들어온다.

비조 길드는 해변가에 요새처럼 건물을 지어두었다.

월정리 해변 대부분을 매입하고 바다까지도 길드 사유지로 쓰는 탓에 이전과 달리 관광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일반인의 출입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유안은 곧장 요새의 입구로 향했다.

건물 여러 채가 모여있는 곳에서도 정중앙, 가장 높은 빌딩으로 들어가자 호텔 로비 같은 내부가 펼쳐진다.

아니, 호텔이 맞았다.

비조 길드원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호텔.

섬에 길드 거점을 세웠으니 주요 길드원들의 거처는 마련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비조 길드장이 어떻게 생겼더라.'

건물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 생각이 났다.

유안은 재빨리 헌터 디바이스에 검색을 돌렸다.

수창이나 새로 길드장 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조 길드장도 종종 매체에 얼굴을 보이기는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되게··· 평범하게 생긴 얼굴이네. 이러니 기억이 안 났지."

헌터 디바이스가 띄워준 비조 길드장의 사진은 인상이 무척이나 흐릿하게 느껴졌다.

길을 걷다 열 명 중에 한 명 꼴로 마주칠 법한 얼굴이었다.

S급 헌터가 이렇게 생기기도 쉽지 않은데, 신기한 일이었다.

유안은 비조 길드장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리셉션 데스크에 다가갔다.

캄캄한 밤이지만 담당자가 있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손님?"

유안이 외부인이라는 걸 눈치 챈 직원이 물었다.

이유안은 긴장하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대답했다.

"비조 길드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중앙 카페 사장이라고 전하시면 될 겁니다."

부재중

리셉션 직원은 곧장 비조 길드장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그러나 신호음이 몇 번 가다가 뚝 끊기기를 반복했다.

"안 받으시네요. 길드장님은 워낙 자유롭게 돌아다니셔서 가끔 며칠씩 자리를 비우기도 하시거든요."

"던전 공략이라도 들어간 겁니까?"

"아뇨, 던전 공략은 아닐 거예요. 그건 대외적으로 알리고 들어가야 하는 규칙이 있어서요."

하긴, 수창 길드장이나 새로 길드장도 던전 공략에 들어가기 직전 그 정보가 전국에 넓게 퍼진다.

워낙 유명한 대형 길드의 길드장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리고 헌터 협회는 한국 전체의 안전을 위해 대형 길드장 세 사람이 한꺼번에 던전에 들어갈 수는 없도록 규칙을 세웠다.

혹여 길드장들이 모두 부재했을 때 생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수창 길드장이 해외 던전 답사를 떠났으니 새로와 비조 길드장은 얌전히 던전 바깥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 비조 길드장도 길드 거점인 제주도 어딘가에는 있을 텐데.

"길드장님이 돌아오시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연락 가능한 번호 하나 남겨주고 가시겠어요?"

리셉션 직원의 말에 유안은 제 헌터 디바이스를 들었다.

간편하게 헌터 디바이스 고유번호를 넘기자, 직원은 번호를 저장하고 친절하게 말했다.

"밤이 늦었는데 하루 묵고 가세요. 길드장님의 손님이라면 최상층을 내어드릴 수도 있답니다."

외부인을 경계하지 않는 태도에 유안은 조금 놀랐다.

'그만큼 두려울 게 없다는 건가···.'

대형 길드의 거점에 들어온 느낌보다는 그냥 휴양지 호텔을 방문한 것 같았다.

"길드장님 안목이 까다로워서, 시설 하나만큼은 5성급 호텔못지 않을 거라 자부할 수 있거든요."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어차피 비조 길드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근처를 떠날 수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좋은 숙소를 내어준다는 제안을, 유안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직원은 유안을 직접 최상층까지 안내했다.

가장 전망 좋은 곳을 소개해준다는 것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루프탑을 아름답게 수놓은 노란 조명들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바다가 바로 앞에 보이는 루프탑에는 커다란 풀이 있었으나 어디에서도 인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곳곳에 설치된 선베드도 텅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몇백 명을 데리고 와서 파티를 벌여도 좋을 것 같은 경치인데 싸늘하기만 했다.

"아무도 없네요."

"아, 지금은 비어있어야 하는 시기라서요."

"···그렇군요."

비어있어야 하는 시기?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유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하루 묵을 곳이니 깊게 알 필요는 없다.

비조 길드장에게 동의서만 받고 나면 이곳에 올 일도 없을 거고.

"최상층 전체를 혼자 사용하시면 돼요."

"예?"

직원이 자연스럽게 말하자 유안이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방이 이렇게 많은데···?'

너무 후하게 내어주니 도리어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직원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유안을 최상층에 홀로 버려둔 직원은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버렸다.

"진짜 이 넓은 층을 나 혼자 다 쓰라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정도 규모의 호텔에 방문한 적도 없기에 최상층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언제 또 이런 곳에 와 보겠어.'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까지 오느라 피곤했던 것은 싹 잊은 채, 유안은 방 구경을 시작했다.

*

늦게 잠든 탓에 여유롭게 깬 유안은 전면창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수평선 근처가 벌써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푹 잤네."

푹신푹신한 침대가 기분 좋았다.

수면의 질을 높여주는 스킬이라도 걸린 것처럼 꿈 하나 꾸지 않고 잤다.

새삼 비조 길드의 복지가 탐난 유안은 머릿속으로 계획 하나를 추가했다.

'우리 카페 바로 앞에도 호텔 하나 세워야지. 직원들 피곤하면 언제든 쉴 수 있게.'

가까운 미래에 꼭 달성할 목표였다.

유안은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을 손끝에 새기며 이 감각을 오랫동안 기억하기로 했다.

헌터 디바이스에 도착한 연락은 아직 없었다.

비조 길드장은 여전히 부재중인 모양이다.

'로비에 내려가서 다시 확인해보긴 할 거지만··· 일단 그 전에.'

비조 길드장 말고도 또 연락해야 하는 곳이 있다.

유안은 연락처 목록을 쭉쭉 내리다가 원하는 이름을 발견하고 손을 멈추었다.

[정태영].

바베큐 파티에 초대받았던 정태영은, 유안의 손을 꼬옥 붙잡고 이렇게 말했었다.

"사장님, 싸장님이 부탁하시는 일이라면 뭐든! 이 한 몸 다해서! 들어드리겠습니다!"

아이스티 칵테일을 여러 잔 마시고 취기가 올라서 꼬부라진 발음이 압권이었다.

유안은 그 말을 잊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다.

도움을 준다고 하는 B급 헌터의 약속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마침 딱 정태영이 해줄 만한 일이 있다.

던전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 카페 직원들에게는 시키지 못할 일.

'그래도 정태영 정도면 쉽게 하겠지.'

B급 헌터니까 안전할 것이다.

던전 전체를 공략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입구 근처에서 약간의 파밍만 해주길 부탁하려는 거니까.

짧은 신호음이 가고, 정태영이 전화를 받았다.

-싸장니임! 무슨 일이세요? 아, 혹시 오늘 카페 신메뉴 있나요? 저 이따가 가긴 갈 건데요. 너무 궁금해서 오픈 시간까지 기다리기 힘들거든요! 저한테만 살짝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일단 진정부터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정태영은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상대가 대답하지 않아도 끝없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듯했다.

"정태영 씨, 저 오늘 가게 안 나갑니다. 그래서 메뉴는 잘 모르겠습니다."

-헉, 왜요? 몸이라도 안 좋으세요? 그럼 안 되는데! 유안 싸장님이 중앙 카페의 알파이자 오메가인데!

"···몸은 멀쩡합니다. 외부에 일이 있어서 잠시 나왔습니다. 그보다 정태영 씨, 부탁 들어주기로 했던 거 잊지 않으셨죠?"

-엥? 제가 그랬었나요? 아, 혹시 술 마시고 한 말인가요? 그럼 잘 기억 안 나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싸장님 부탁이면 뭐든 들어 드려야죠! 뭔데요?

녹음이라도 해뒀어야 했나.

그래도 정태영이 맨정신일 때나 취했을 때나 한결같은 인간이라 다행이었다.

유안은 작게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정태영 씨, 고대 유적 던전 아르네스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르네스.

[고대 포식자의 핵]을 구할 수 있는 던전.

회귀 전에는 유안이 그 던전의 핵을 모조리 캐서 멸종시켰지만, 회귀하고 나서는 아직 캐지 않았으니 그대로 묻혀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아이템의 파밍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핵을 덕지덕지 바른 건물을 지어뒀으니 눈치 빠른 헌터가 핵의 능력을 알아볼 수도 있다.

다른 누군가에게 소중한 자원을 빼앗기기 전에, 유안은 한 발 먼저 그것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아르네스요? 거기 몹들 단단해서 스킬 수련하러는 종종 갔었는데, 이번에 아르티카 게이트 열리고 나서는 안 가죠. 아르티카 효율이 훨씬 좋거든요. 신규 던전이라 몹 드랍템도 비싸게 팔리고.

잊혀진 유적 던전 아르티카.

비교적 최근에 열린 게이트였다.

서울과 맞붙은 인천 바다 쪽에 생겨서 게이트 제한구역 문제로 한바탕 난리가 나기는 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돼 중급 헌터들이 많이 찾는 던전이 되었다.

덕분에 아르네스가 버려지다시피 해 [고대 포식자의 핵] 아이템이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을 수 있던 것이기도 하다.

"아르네스에서 정태영 씨가 파밍해주셨으면 하는 아이템이 있습니다."

-몬스터 잡아서 얻는 템인가요?

"아뇨. 삽질 좀 하셔야 합니다."

-엥, 네?

"삽 하나 튼튼하게 만들어 달라고 김주현 씨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다짜고짜 삽질 업무를 부여받은 태영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일단 알겠다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를 먹게 해준 은인인데 삽질 정도야 거뜬히 할 수 있었다.

유안은 곧장 주현에게 연락해 커다란 삽 하나를 부탁했다.

놀랍게도 김주현은 이미 만들어둔 게 있다며 사람 키 만한 삽을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이런 삽을 대체 왜 만들어둔 거지···?'

그래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 좋았다.

김주현과 정태영을 하나의 그룹 채팅에 초대한 유안은 두 사람에게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재료 확보 역에 정태영, 재료 가공 역에 김주현을 배치하니 완벽했다.

*

비조 길드 빌딩에서는 매 끼니 시간마다 길드원들을 위한 식사가 제공된다.

그리고 유안도 거기에 초대받았다.

"중앙 카페 사장님 수준에는 안 맞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근방에서는 저희 길드 음식이 제일 맛있거든요."

오늘도 유안을 안내하는 사람은 어제의 그 리셉션 직원이었다.

어제는 새벽 시간대라 더워 보인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지금 보니 직원의 옷차림이 날씨에 어울리지 않다는 걸 느꼈다.

'더위를 안 타나···?'

도톰한 모직의 정장을 단추까지 꼭꼭 채워 입은 모습이 정갈하게 보이기는 했으나 따뜻한 제주에서 저러고 다니는 건 일종의 챌린지처럼 보였다.

리셉션 직원들의 복장이 정장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유안을 안내하는 직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유분방한 차림새였다.

'하와이안 셔츠에 슬리퍼 신고 서빙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 다했지.'

이유안은 이 공간에서 가장 단정한 사람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가벽이 둘러진 테이블 자리에 들어오자, 직원은 자연스레 유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제처럼 자신을 혼자 두고 휙 떠나버릴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비조 길드장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나 봅니다."

"네. 길드장님이 워낙 자주 이러셔서 저희는 그냥 포기하고 있어요. 어디 한 군데 날려먹고 오지만 않으면 다행이죠."

직원의 목소리에서 체념이 묻어났다.

다른 대형 길드장에 비해 비조 길드장의 개인 정보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았는데, 이제 보니 '밝혀지지 않았다'기 보다는 '밝힐 수 없었다'가 맞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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