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민이 싫다고 하면 다른 특수건설업체를 알아봐야 하는데, 그러면 시간이 너무 촉박해진다.
해강특수건설에서 일을 맡아주는 것이 가장 깔끔하고 좋았다.
유안의 간절한 바람이 닿았는지, 잠시 후 강해민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해민: 점심에 잠깐 만나든가.]
됐다!
유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해민을 만나서 살살 구슬리기만 하면 된다.
*
강해민은 해강 그룹에서 소유하고 있는 호텔의 런치 홀을 통째로 빌렸다.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홀에 도착한 유안은 이야기 나누기 좋은 분위기라고 생각하며 해민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이네."
해민이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유안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포장된 디저트 세트를 꺼냈다.
"일단 이거 받아."
"···뭔데?"
"우리 카페에서 파는 거야. 잘 나가는 것만 넣었으니까 너 혼자 다 먹어. 아, 또 먹고 싶으면 말해. 더 가져다 줄게."
"······빵만 먹고 살찔 일 있나."
강해민은 툴툴거리면서도 싫단 소리를 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
유안은 익숙하게 해민의 까칠함을 받아내며 곧장 본론을 꺼냈다.
예비 건물주
"게이트 바로 앞에 카페 건물을 짓고 싶어서."
"뜬금없이 무슨···. 나한테 부탁하라고 거기 사장이 시켰어?"
유안을 바라보는 해민의 시선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아무래도 강해민이 이상한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내가 사장인데?"
"······뭐?"
뾰족한 눈매가 파르르 떨린다.
'음! 내가 사장이라는 말을 안 했구나!'
유안은 제 불찰을 깨닫고 제대로 설명했다.
"내가 중앙 카페 사장이야. 오픈하고 한 달 정도 됐어. 우리 카페 영상 봤다고 해서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일하는 직원인 줄만 알았지."
복장 때문인가?
중앙 카페는 자유롭게 깔끔하고 편한 옷만 입으면 되기 때문에 유안도 쫙 빼입고 카페에 나가지는 않았다.
지금도 평범한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기껏 각성도 했으면서 던전은 왜 안 들어가? E급이라며. 카페 장사하는 것보다 파밍이 훨씬 돈 될 텐데."
"아무리 그래도 던전은 위험하잖아. 안 들어갈 거야."
"······."
회귀한 것까지 설명할 수 없으니 그렇게 둘러대고 말았다.
해민은 끝까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으나, 던전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유안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해민의 미간이 살짝 풀어진 것도 같았다.
"그, 큼, 흠. 카페 말고 회사는 관심 없냐?"
헛기침을 잔뜩 하면서 묻는 말에 유안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안전하게 돈 벌 궁리 끝에 시작한 카페였지만, 이제는 책임져야 할 식구가 늘었다.
직원을 여럿 고용해 놓고 관두는 건 여러모로 예의가 아니었다.
매일 새로운 메뉴를 시도하고, 맛있는 것이 생기면 가장 먼저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직원들과 정도 들었다.
그리고 카페 경영이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손님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더 좋았다.
던전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 이상 중앙 카페는 계속될 것이다.
유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일 이야기를 꺼냈다.
"건설에 필요한 자재는 내가 전부 제공할 수 있어."
회귀 전 파밍한 재료 중 돌이나 나무도 많았다.
몇몇 재료는 김주현에게 넘겼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많았다.
아직 풍족한 인벤토리를 들여다보며 유안은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만에 하나 재료가 부족하더라도 경매장에서 구매하면 된다.
이제 이유안은 돈도 많았다.
건축을 위한 밑바탕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강해민은 영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재료만 있으면 건물이 뚝딱 생기는 줄 아냐. 카페 위치가 던전 게이트 바로 앞이라며. 거기서 건설을 어떻게 해. 인부는 어떻게 구할 건데?"
"···게이트 근처긴 하지만 안전한데."
"마나 넘쳐나는 곳이 뭐가 안전해. 비각성자는 근처에 가기만 해도 여기저기 골병 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주현이 세공하고 있는 핵들이 떠올랐다.
"게이트 제한구역에서 비각성자도 안전하게 지낼 방법이 있어."
[고대 포식자의 핵]에 대해서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단 안전하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그렇게 말했는데, 강해민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네 말대로 게이트 근처가 비각성자에게도 정말 안전하다 쳐. 그런데 그걸 누가 믿어주냐고."
"······."
"물, 론···! 나는 네 말 믿어. 네가 허튼 소리 하는 건 본 적 없으니까. 나는 널 믿지만, 널 잘 모르는 사람들은 못 믿을 거란 소리였어. 그러니까 공사 인력 구하는 것도 힘들 거고."
"응···."
강해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마나 수치를 측정하는 기계부터 구해봐야 하는 걸까.
헌터 협회가 가진 기계가 가장 정확하다고는 하던데, 그걸 사적으로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 달 안에 게이트 근처에 건물을 올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비각성자 말고 각성자들로 인력을 구하면 되는 거지?"
유안이 해민을 빤히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해민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각성한 헌터를 특수건설현장 인부로 쓴다고?'
*
게이트 제한구역에 들어가기 직전, 유안은 제 왼손에서 반지를 빼냈다.
곁에 있던 해민이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놀랐다.
"···중요한 반지 아니었냐?"
"중요하긴 하지."
핵을 가공하여 만든 반지는 누나들과 세트로 맞춘 것이니.
그래도 지금은 해민에게 빌려줘야 했다.
각성자인 자신은 괜찮지만, 비각성자인 강해민에게는 마나 저항 아이템이 필요하다.
"일단 맞는 손가락에 끼워."
"······이 반지를, 나 준다고?"
"당분간은."
주는 건 아니고 빌려주는 거지만.
유안은 멍하니 선 해민에게 연보라색 반지를 가볍게 던졌다.
이제 제한구역에 들어갈 준비가 끝났다.
헌터를 건설노동자로 쓰겠다는 유안의 의견에 해민은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법이 그것밖에 없으니 시도라도 해보겠다 밀고 나가는 유안 때문에 강해민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이유안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겠지.'
그래서 일단 카페 부지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볼 겸 유안과 함께 중앙 던전 근처로 왔다.
이유안은 강해민을 이끌고 오늘치 영업을 막 마친 중앙 카페에 들어섰다.
직원들이 퇴근하기 전이라 해민을 바로 소개할 수 있었다.
"이쪽은 해강특수건설 사장님입니다. 강해민 사장님, 여기는 제 카페 직원들이에요."
유안이 해민을 사무적인 말투로 소개하자, 해민도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해강특수건설 사장이 왜?'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장님이 뭔가 계획하고 계신 거 아닐까요?'
그사이 더 친해진 김주현, 홍소라, 서정원이 눈빛만으로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의문이 더해지기 전에 유안이 입을 열었다.
"중앙 카페 건물을 지어주실 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강해민 사장님."
"···야, 내가 일단 부지만 보러 온 거라고 했지."
"게이트 앞에 건물 올릴 수 있는 건 해강밖에 없단 말입니다."
해강특수건설 이후로도 많은 특수건설업체가 생겨났으나, 해강을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게이트가 생겨난 직후부터 사업을 시작했으니 그 노련함이 남달랐던 탓이다.
유안은 가장 안전하고 튼튼한 건물을 지어줄 건설업체에 중앙 카페를 맡기고 싶었다.
"해민아, 사람은 내가 어떻게든 구해볼게. 몇 명 정도면 돼?"
유안은 중앙 카페 직원들 앞에서 해민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일부러 직원들 있을 시간을 노린 이유가 이거였다.
강해민은 보는 눈이 많을 때 본연의 까칠함을 숨기고 착하게 구는 편이다!
유안은 해민과 십 년 가까이 친구 하면서 배운 점을 거침 없이 써먹었다.
"······한 달 안에 지어달라며. F급 헌터로만 구한다치면 최소 서른 명은 필요해."
역시.
강해민이 슬슬 넘어오고 있었다.
"서른 명? 너무 많이 필요한데···. 상급 헌터로 구하면 인원 좀 적어도 괜찮을까?"
"물리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어떤 상급 헌터가 건설업 하러 오겠냐."
강해민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B급만 되어도 던전 공략하러 다니기 바쁜데, A급이나 S급 헌터를 구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유안은 생각했다.
'카페 알바하는 A급 헌터도 있는 마당에.'
유안은 서정원을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상급 헌터라면 하지 않을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A급 헌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니 채용 공고를 올리면 서정원처럼 독특한 상급 헌터 몇은 관심을 가질 것이다.
유안은 일단 중앙 카페 헌터그램 계정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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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카페
❀던전에 지친 헌터들의 유일한 쉼터❀
중앙 던전 게이트 앞
⊙am 9:00 ~ pm 6:00
|11 게시물|4,860 팔로워|1 팔로잉|
홍소라가 헌터그램 계정을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자 많은 헌터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매일 몇 번씩 다른 던전까지 배달은 안 되냐고 문의가 들어왔고, 포장 예약도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덕분에 전국 각지의 헌터들이 중앙 카페를 찾아오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비각성자들도 헌터 지인에게 부탁해 중앙 카페의 음식을 어떻게든 맛보려 했다.
다방면으로 넓게 중앙 카페의 유명세가 퍼져가고 있으니 구인도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카페 알바를 모집했을 때 몇백 명이 지원했던 것처럼.
"홍소라 씨, 헌터그램에 글 올립시다."
유안은 소라를 향해 말했다.
홍소라가 기다렸다는 듯 헌터그램에 올릴 글 내용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사장님~ 기왕이면 생판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얼굴이 더 믿음직스럽지 않을까요?"
오늘도 검은 마스크를 푹 눌러 쓴 최선진이 눈웃음치며 말했다.
*
진 선은 약 일주일 만에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수창 길드 빌딩에 몰래 잠입하기 위해 인벤토리의 최상급 아이템만 몇 개를 썼는지 모른다.
어쨌든 모두의 눈을 피해 얌전히 숨어 들어왔으니 됐다.
빌딩 최상층의 길드장 사택에 무사 입장한 진 선은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F급 몸뚱어리는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해지니 문제였다.
각성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도 안 난다.
"던전 공략하러 들어간 녀석들 빼고··· 요즘 한가한 애들이 누구누구 있더라?"
진 선은 수창 길드원 명단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길드장 권한으로 강제 노역을 시킬 인원을 추리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공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실 쪽이었다.
"제일 한가한 건 길드장님이시지 않나?"
"미, 미정아···?"
"길드 빌딩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F급 몸으로 용케 들어왔네? 이제 다시 나가면 되겠다."
최미정은 여전히 화를 머금은 목소리로 진 선을 다그쳤다.
선은 손에서 길드원 명단을 내려놓고 변명 아닌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미정아. 내 말 좀 들어 볼래, 응?"
"길드장님, 요즘 카페에서 일하더라? 헌터 길드 운영하는 것보다 카페 일이 더 적성에 맞나 봐. 이 기회에 그쪽으로 아예 전향하는 건 어때? 지우한테서도 연락 왔어. 얌전히 지내라고 했는데 아주 살판 났지, 응?"
"지우 걔는 또 왜···!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지우한테 들킨 건 진~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그래서 여긴 왜 왔는데. 등급 돌아올 때까지 오지 말랬잖아!"
머리 끝까지 화난 최미정을 진정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진 선은 포기하지 않고 중앙 카페의 상황을 설명했다.
최미정은 진 선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삐딱하게 되물었다.
"그 카페 음식에 버프 효과가 있는데, 그걸 수창에만 납품하게 만들려면 지금 도와줘야 한다고?"
"그치, 그치! 호감도를 미리 쌓아두자는 거지~!"
조그마한 진실 위에 달콤한 거짓을 덧씌운 허위매물이었으나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오늘만 사는 헌터, 진 선은 뒷수습을 미래의 자신에게 맡기며 최미정을 구워 삶을 방법만 궁리했다.
다행히 버프 이야기를 꺼냈더니 슬슬 넘어오는 기색이었다.
"몇 명이나 필요한데."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