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37)

해강특수건설

"수창 길드장님, 이제 아주 돌아버리셨습니까?"

"아이~, 쉿, 쉿! 크게 말하지 말라니까~!"

"하······."

류지우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진 선이 담배를 냉큼 빼앗았겠으나, 지금은 제 잘못을 아는지 얌전히 류지우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류지우는 웬 검은 마스크 인간이 제 손목을 붙잡고 구석진 곳으로 끌어당길 때부터 쎄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눈앞의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풍기는 기운이 왜인지 익숙했던 탓이다.

역시나.

마스크가 살짝 내려가고, 얼굴이 드러나자 류지우가 알던 그 외형으로 바뀌었다.

공식적으로는 해외 던전 답사를 갔다고 알려진 수창 길드장.

진 선.

"예정에도 없던 던전 답사를 떠났다기에 무슨 꿍꿍이가 있겠구나 싶긴 했는데, 여기서 정말 뭐하시는 겁니까?"

"으음··· 던전 답사?"

선이 지우의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둘러댔다.

일단 던전 게이트 근처이기는 하니까···.

류지우가 지끈거리는 제 머리를 꾹꾹 누르며 제 헌터 디바이스를 켰다.

그리고 헌터 협회 관리자 권한으로 특수 어플에 접속했다.

지우의 디바이스 끝에서 푸른 빛이 쏘아져 나와 선의 몸에 닿았다.

띠릭.

F급.

특수 어플은 빠르게 진 선의 현재 등급을 표시해주었다.

"등급이 왜 이 모양이십니까?"

"아, 등급 측정기 쓰는 건 반칙이지!"

"쓰라고 있는 어플인데요."

지우는 자신의 헌터 디바이스를 다시 집어넣고 선을 노려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S급이던 헌터가 하루아침에 F급이 되었으니 그 설명을 들어봐야 했다.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지우의 태도에 선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일시적인 거야! 영구 하락은 절~대 아니고!"

"일시적이어야죠. 영구 하락이면 헌터 협회에서 수창 길드를 압수 수색할 겁니다."

"···미정이한테 아무 얘기도 못 들었어?"

"길드장이 해외 던전 답사로 부재중이니 다음에 연락하라고만 하던데요."

"그게··· 내가 사실 던전 공략하다가 저주에 걸렸거든? 아니, 근데! 잠깐, 잠깐, 수갑 꺼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F급 진 선은 지우를 말리느라 진땀을 쏙 뺐다.

그리고 [식욕귀의 다이닝 테이블] 던전 공략을 하다 저주에 걸린 경위와 지속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술술 불기 시작했다.

전후사정을 다 듣고서도 류지우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저주는 수창 길드장님이 부주의해서 걸린 거라 쳐도, 왜 하필 여기서 알바하고 계셨던 겁니까?"

"당장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니야···. 미정이가 엄청 화났는지 내 이름으로 된 카드도 다 막아버렸다니까? 권력 남용이야, 진짜~."

"재무 관리 귀찮다고 최미정 부길드장에게 다 떠넘긴 당신 잘못이죠."

"그건 그렇지··· 아니~, 하여튼! 저주 사라지기 전에는 길드 빌딩에도 못 들어가니까 잠잘 곳은 구해야 하잖아. 그럼 또 돈이 필요하고. 이 카페가 은근 쏠쏠하다니까?"

진 선은 서빙과 설거지만 하는 잡일꾼이었다.

카페 음료나 디저트 제조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데도 일급을 꽤 두둑히 받고 있었다.

덕분에 노숙자 신세를 면했을 뿐만 아니라 번듯한 호텔에 장기 투숙까지 할 수 있었다.

저주가 풀릴 때까지는 중앙 던전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진 선 길드장님께는 안타까운 소식이겠네요."

"응? 뭐가?"

진 선은 반쯤 타다 만 류지우의 담배를 자연스럽게 빼앗으며 되물었다.

선과 지우는 오랫동안 알아온 사이로, 이런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대형 길드 길드장과 헌터 협회 직원이라는 애매한 관계가 되기는 했으나, 쌓인 세월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카페 문 닫게 만들 거거든요."

"뭐? 왜!"

"헌터들이 지나치게 몰려들고 있습니다. 상급, 하급 관계 없이 말입니다. 상급 헌터들을 한 곳에 모아뒀을 때 좋은 일이 생기는 꼴을 본 적이 없어요."

"야아~, 여기 안전해! 싸움 난 적 한 번도 없다고! 손님들은 카페 음식에만 정신 팔려 있지 옆에 누가 서 있는지는 신경도 안 써!"

"여태까지는 그랬겠지만, 사고는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류지우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리고 중앙 카페가 있는 쪽을 흘깃 눈짓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저게 뭡니까. 지붕이며 벽 하나 없이 테이블이랑 의자만 달랑. 무허가 건물이 차라리 낫겠습니다."

"그럼 정식으로 건물 세우고, 점포 등록도 하고, 카페 전체를 전투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면 돼?"

"그게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아무리 던전 부산물로 튼튼하게 건물을 지어도 게이트 근처에서는 서서히 부식된다는 거 모르십니까?"

게이트가 강하게 뿜어내는 마나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진 선이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선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우를 박박 긁었다.

"부식하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거지? 응?"

안전성 적합 판정을 받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진 선이 재차 확인했다.

게이트 근처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수창 길드장은 어쩐지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

헌터 협회 관계자는 별말 없이 카페만 둘러보다가 돌아가버렸다.

살짝 긴장하고 있던 유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온 거지?'

그래도 관계자가 돌아가기 직전, 최선진 알바생이 빠르게 나서서 카페 음식을 바리바리 챙겨주어 다행이었다.

자고로 헌터 협회에 잘보여서 나쁠 것 하나 없었다.

선진은 대형 길드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런 쪽에 빠삭했다.

어수선한 사건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몇 시간 후.

유안의 헌터 디바이스가 길게 진동했다.

헌터 협회에서 보낸 문자 한 건이 도착해 있었다.

-

[Web 발신]

[헌터 협회]

이유안 님이 '저주받은 세계수 던전' 게이트 근처에서 운영 중인 카페에 대한 정식 승인 절차가 필요합니다.

헌터 협회의 승인을 받지 않은 무허가 상점의 경우 영업 정지 통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정식 승인을 받으려면 아래와 같은 문서를 구비하여 헌터 협회 던전 관리 파트로 직접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헌터 등록증 사본 1부

-특수건물 등록증 사본 1부

-특수건물 안정성 적합 판정서 1부

-특수음식점 영업 허가서 1부

-전투 금지 구역 인증서 1부

※ 서류 제출 기한은 안내 문자를 받은 시점부터 한 달입니다.

(헌터 협회 던전 관리 파트장 류지우 KHA-DMD-D1)

-

"······."

유안은 미약한 현기증을 느끼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헌터 협회 관계자가 말없이 돌아갈 때 고이 보내줄 게 아니었다.

공기업에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유안은 문자를 다시 천천히 읽어보았다.

'제출해야 할 서류가 뭐 이렇게 많아!'

현재 유안의 수중에 있는 거라곤 자신의 헌터 등록증 사본뿐이었다.

나머지 네 개의 문서를 한 달 안에 준비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쉬운 문서가 없었다.

'특수건물 등록증 사본··· 건물도 아직 없는데 이걸 무슨 수로 구하지.'

특수건물은 던전 부산물만 사용해 지어야 했다.

유안은 지끈지끈한 머리를 부여잡고 일단 의자에 앉았다.

'하나씩 해결해 보자.'

어차피 하려던 일이었고, 기한이 살짝 당겨지기는 했으나 아예 못할 것도 아니었다.

손님을 응대하느라 바쁜 직원들을 두고 유안 혼자 고민에 빠졌다.

던전 게이트 첫 출현으로부터 20년.

대한민국은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뒤바뀐 환경에 대한 적응이 빨랐다.

국민 전체가 공통적으로 가진 성향 탓도 있었고, 던전을 비교적 수월하게 공략해낸 초기 각성 헌터들 영향도 있었다.

덕분에 한국에는 일찌감치 던전 관련 산업 붐이 일었다.

헌터 용품을 만드는 업체부터 던전 부산물로 특수건물을 짓는 건설업체까지.

많은 기업이 생겨났으며 몇몇 기업은 순식간에 대기업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이유안은 던전 산업을 하는 기업 중 하나를 떠올렸다.

던전 게이트가 생긴 직후 특수건설업부터 시작해 지금은 던전 산업 곳곳에 가지를 뻗은 대한민국 최대 기업 중 하나.

해강.

유안은 헌터 디바이스의 문자 수신함을 나가서 연락처에 들어갔다.

오랫동안 쓰지 않고 묵혀둔 번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강해민···. 회귀 전에는 결국 연이 끊어졌었지.'

3년 가까이 연락을 하지 않았더니 자연스럽게 멀어진 인연 중 하나였다.

그런나 지금은 달랐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강해민과의 마지막 연락은 고작 몇 개월 전이었다.

유안이 E급 헌터로 각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거기에서 강해민과의 채팅이 끊겨 있었다.

[강해민: 뭐하냐 ㅋㅋ]

[이유안: 해민아.]

[강해민: 저녁 아직이면 우리집에서 같이 먹을래?]

[강해민: 어 왜?]

[강해민: 무슨 일 있어?]

[이유안: 나 각성했다. E급.]

채팅은 거기서 끝이었다.

해민은 유안의 메시지를 읽어놓고도 답장하지 않았다.

'바빠서 그런 거겠지.'

유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강해민의 어머니가 해강 그룹의 대표이사라서 해민 역시 성인이 되자마자 바빠졌다.

해민이 회사 일을 웬만큼 배우자, 해민의 어머니는 해강 그룹 산하 해강특수건설을 자신의 외아들에게 덜컥 넘겼다.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기분 좋은 티를 내던 강해민을, 이유안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유안은 해민과의 일대일 채팅창에서 손을 움직였다.

[이유안: 해민아.]

*

"서정원 씨,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바로 연락하셔야 합니다."

"무슨 일 없을 거예요, 사장님. 친구분 만나는 거라고 하셨죠? 이거 챙겨가세요."

"아, 감사합니다."

유안은 중앙 카페에서 가장 오래 일한 정원에게 일일 매니저를 맡겼다.

그래도 얼마 전에 방재이와 최선진을 고용해서 일손이 넉넉하니 다행이었다.

'김주현도 연락하니까 바로 와 주었고.'

투투리코 가죽으로 고급 소파를 완성한 주현은 유안이 연락하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덕분에 유안은 걱정을 좀 더 내려놓고 볼일을 보러 갈 수 있었다.

직원들이 예쁘게 포장해준 선물용 디저트 세트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직원들이 든든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게를 종일 비우기에는 마음이 쓰였다.

그러나 직원들은 사장과 생각이 다른지 오히려 유안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오랜만에 쉬시는 건데 카페 생각하지 말고 재밌게 놀다 오세요. 마감도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마, 맞아요. 저희는 휴일이라도 있는데··· 사, 사장님은 매일 출근하시잖아요···."

직원을 더 뽑은 후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쉴 수 있게 해주었다.

사장인 유안만 빼고.

원래 장사는 사장이 가장 열심히 일해야 망하지 않는다.

게다가, 목숨 걸고 던전 파밍 다니던 회귀 전에 비하면 편안하고 안정적인 근무 환경이었기에 유안은 불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휴일 없이 일하는 유안을 은근히 걱정하던 직원들이 이때다 싶어 등을 떠밀었다.

강해민을 만나는 것도 결국 일의 연장선이긴 했으나, 유안은 일단 거기까지 밝히진 않기로 했다.

'해민이가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으니까.'

해강특수건설 사장 강해민과 연락이 닿은 건 오늘 아침이었다.

[강해민: ?]

너무 오랜만에 연락하기는 했지.

유안은 해민이 당황스러울 것을 충분히 이해하며 일단 만나자고 했다.

[이유안: 만나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강해민: ···너 카페 일 하느라 바쁜 거 아니었냐?]

[이유안: 응? 어떻게 알았어?]

해민과는 몇 달 전에 연락이 끊겼는데, 중앙 카페를 알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데 해민은 휴튜브 영상 링크 하나만 띡 보냈다.

[강해민: 여기 너 나오잖아.]

[이유안: 아···. 나도 나오는 줄은 몰랐네.]

태양TV에서 업로드한 영상에는 카페 음식과 정태영의 얼굴만 비춰지는 줄 알았는데,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간 카페 풍경에 자신의 모습도 찍힌 모양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기에 유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일단은 강해민과 약속을 잡는 게 중요했다.

[이유안: 시간 언제 괜찮아?]

[강해민: 나 요즘 되게 바쁘거든?]

[강해민: 요새 우리 회사랑 건설업체 하나 M&A 진행 중인 데다가]

[이유안: 기다릴 수 있어.]

[이유안: 시간 언제 괜찮아?]

[이유안: 너 괜찮은 시간에 내가 맞출게.]

유안은 해민이 약속을 거절할세라 다급하게 덧붙였다.

'제발,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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