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영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된다.
[고대 포식자의 핵]이 묻힌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유안뿐이었으니 크게 서두를 건 없었다.
"막내, 이제 출발하자."
"유안아, 준비 다 됐지?"
"응. 중앙 던전··· 저주받은 세계수 던전 근처로 가면 돼."
유안은 누나들을 이끌고 자신의 첫 가게를 향해 출발했다.
숙제를 검사받는 것 같아서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
서정원은 좋은 알바생이다.
늘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그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정원에게 오픈을 맡긴 중앙 카페는 평소와 다르게 이런저런 장식이 가득했다.
던전산 꽃과 나무를 이용해서 아름다운 화원처럼 꾸며놓은 모습에 깜짝 놀랐다.
누나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예쁘게 해 놓고 지내네."
"유안이 미적 감각은 저기 심해에 있는 줄 알았는데···."
서정원이 꾸민 거긴 하지만, 유안은 잠자코 있었다.
중앙 카페의 모습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칭찬한 유경과 유월은 가장 넓은 테이블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가족 분들이시죠?"
아주 훌륭한 알바생이 다가와 부드럽게 인사했다.
오늘따라 그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 유안은 만족했다.
자고로 사람은 화가 나다가도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가라앉기 마련이다.
과연, 카페 바로 앞에 보이는 던전 게이트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던 누나들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일단 저희 카페에서 판매하는 음료와 디저트를 하나씩 준비해봤어요.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사장님 가족 분들이니 얼마든지 더 가져다 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정원이 커다란 테이블 위를 빠릿빠릿한 동작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서정원은 오늘따라 고급스러운 잔에 담은 음료를 기가 막히게 세팅했고, 뒤이어 다가온 홍소라가 먹음직스러운 빵과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현실감 없이 아름다운 것들로만 가득 채워진 테이블에 카페의 다른 손님들이 소리 없이 감탄했다.
"막내도 앉아."
"언니, 유안이는 일하러 가봐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사장이 제일 바쁘다던데."
"···그러니, 막내야?"
큰누나 유경의 목소리가 쉬폰케이크보다 부드러워졌다.
불길한 낌새를 눈치챈 유안이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기면 좋을지 고민했다.
"오, 오늘은 괜찮아요! 그, 도와줄 인원이 한 명 오기로 했거든요···."
"맞아, 누나. 오늘 누나들 온다고 해서 일 도와줄 사람 불렀어요."
유안은 소라의 지원을 냉큼 받았다.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못박은 뒤 유경의 옆자리에 앉자, 큰누나의 시선이 평소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것으로 변했다.
화가 풀렸다는 신호였다.
그 후에도 몇 번 위기가 찾아오기는 했으나 서정원과 홍소라의 재빠른 대처로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테이블 위의 음식은 대부분 유안의 입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지만, 누나들한테 혼나는 것보다는 과식하는 게 나았다.
유경과 유월은 막내를 많이 먹이는 데만 집중하며 정작 자신들은 카페 메뉴를 즐기지 않았다.
'누나들은 완전 한식파였지···.'
큰누나는 그나마 커피라도 마시는데, 작은누나 유월은 카페 메뉴를 한 입씩만 맛보고 손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유경과 유월이 카페에 출입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음료와 디저트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카페 말고 한식당을 열었어야 했나.'
유안은 제 인벤토리를 흘깃 확인하며 생각했다.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가게가 카페라서 선택했던 건데, 나중에 사업이 커지면 음식점을 추가하는 것도 염두에 두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밥 제대로 안 챙겨먹고 빵만 먹는다고 잔소리 듣기 싫었다.
테이블이 거의 비었을 때 타이밍 좋게 김주현이 도착했다.
선물을 준비했다는 게 진짜인지 주현은 곧장 유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무언가 꺼냈다.
'저게 뭐야!'
유안은 주현이 직접 만들어온 아이템의 형태를 보고 경악했다.
던전화
김주현은 요새 [고대 포식자의 핵]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었다.
유안이 의뢰한 다른 아이템이야 참고할 제품들이 시중에 있으니 만들기 어렵지 않았다.
분해 몇 개 해 보면 기계 구조를 익힐 수 있었고, 그것을 잘 기억해 던전 부산물로 재구현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고대 포식자의 핵]은 아니었다.
그나마 참고할 자료는 보석 쪽이었는데, 그마저도 원석이 아예 다르기 때문에 주현이 독창적인 가공법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우면서도 재밌어서 자꾸 손을 대게 되었다.
이번에 유안의 누나들이 카페에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핵으로 무언가 만들어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목걸이와 짝을 이루는 악세사리라 함은,
역시 반지였다.
유안은 웨딩 링 수준으로 화려한 세 개의 연보랏빛 반지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아이템 정보를 확인해보니 이것도 목걸이만큼이나 강력한 성능을 갖고 있었다.
'둘 중 하나만 착용해도 마나는 완전히 차단되는데···.'
그러나 누나들은 반지를 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목걸이를 줬을 때보다 더 호의적인 시선이 오래 머무른다.
"핵을 예쁘게 세공한 다음에 부쉈어요. 좀 아깝긴 했지만··· 그렇게 해야 세공된 핵의 성능을 가진 가루가 만들어지더라고요!"
주현은 처음부터 [고대 포식자의 핵]을 반지 모양으로 만들어보려 했지만, 그래서는 좀처럼 좋은 능력치가 붙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목걸이야 세공한 핵을 통째로 사용했으니 문제될 게 없었지만, 반지는 그렇지 않았다.
커다란 핵을 박은 반지는 평상시 끼고 다니기 불편할 것 같고.
고민을 거듭하던 주현은 시험삼아 한 번 세공을 마친 핵을 부숴보았다.
몇 시간 동안 세공한 핵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은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으나, 가루의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순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핵을 부순 가루를 다른 던전산 광물과 함께 녹이고 모양을 잡았어요. 주조는 처음이라 좀 헤매긴 했지만···. 공방에 작은 용광로 하나 만들어두니 편하더라고요!"
그 용광로도 유안이 준 의뢰금 덕에 설치할 수 있었다.
중앙 카페의 사장은 김주현에게 있어서 여러 모로 은인이었다.
유안 덕분에 만들 수 있는 물건의 폭이 얼마나 넓어졌는지 모른다.
"일단··· 감사합니다. 잘 받아두겠습니다."
유안은 주현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인벤토리에 넣고 빼낼 일은 없···
"유안아, 지금 껴 봐. 잘 맞는지 확인해야지."
"······."
반지를 인벤토리에 낼름 넣으려던 유안의 손이 멈추었다.
유월은 유안의 왼손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장님 호수를 잘 몰라서 제 감으로 만들었어요. 잘 맞는 손가락에 끼우시면 돼요! 자체 살균 효과가 있는 광물도 섞어서 오래 끼고 있어도 깨끗하답니다-."
덧붙여 요리할 때 끼어도 문제될 게 없는 반지였다.
중앙 카페의 전담 요리사는 유안이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니 그런 기능도 넣었다.
꼼짝없이 반지를 끼게 된 유안은 하필 또 왼손 약지에 딱 맞는 사이즈 때문에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보니 누나들도 이미 왼손 약지에 반지를 하나씩 끼우고 있었다.
"우와! 다들 잘 어울려요!"
주현은 삼남매의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인다며 칭찬했다.
'그렇겠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나눠 끼는 가족이 또 어디 있겠어.'
그래도 김주현의 반지 선물 덕에 누나들의 노기가 완전히 풀린 점은 다행이었다.
'누나들 없을 때는 빼고 있어야지.'
유안은 그렇게 다짐하며 유경과 유월을 게이트 제한구역 바깥까지 배웅했다.
목걸이와 반지 덕에 마나를 완벽히 차단한 누나들은 비각성자임에도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중앙 카페의 음료와 디저트에 기본으로 붙은 피로 회복 효과도 한 몫 했다.
헤어지기 직전, 유안은 누나들에게 서정원의 특제 스무디를 한 병씩 건넸다.
그러자 유경과 유월이 유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주 놀러 올게."
동시에 말하는 목소리에 유안은 잠시 간담이 서늘해졌다.
헌터 협회에서 불심검문을 나온다고 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
카페로 돌아온 유안은 정신적으로 녹초가 되어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홍소라가 치즈타르트를 가져다주었다.
"우유로 치즈도 만드셨습니까···?"
언제 또 이런 메뉴를 개발했지.
유안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뚝딱뚝딱 신메뉴를 개발하는 알바생들이 기특했다.
번개 뿔소의 우유를 가공해 만든 치즈는 유독 고소했다.
문베어의 숨겨둔 식량도 첨가했는지 은은하게 단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아, 아직 대량 생산은 못 하고요···. 사장님이 좀 피곤해 보이셔서 만들어 봤어요."
"요거트도 있어요, 사장님."
서정원이 귀여운 시리얼컵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김주현이 심심해서 만든 컵 컬렉션 11호에는 신선한 요거트가 소담히 담겨 있었다.
"여러분 저 몰래 밤에도 출근해서 신메뉴 개발하는 건 아니겠죠."
유안은 농담을 중얼거리며 요거트를 받았다.
작은 나무 숟가락으로 가운데를 파헤치니 붉은 잼이 나왔다.
"그 잼은 어제 만들었어요. 독성이 강해서 생으로는 먹을 수 없는 [위브 덤불 열매]가 마침 인벤토리에 있더라고요. 익히면 독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미약한 마나 회복 효과가 생겨요."
잼과 요거트를 섞으니 예쁜 복숭아색이 되었다.
그것을 한 입 맛보니 탈탈 털렸던 정신력이 천천히 채워지는 것 같았다.
"맛있습니다. 둘 다."
유안이 담담하게 칭찬했다.
그런데 홍소라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서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왜 저러나 싶어서 지켜보자, 잠시 후 소라가 평소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 잼··· 위브 잼··· 아, 아직 많이 남았어요?"
"네. 남은 건 냉장고에 넣어뒀-"
홍소라는 서정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방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주현이 만들어준 주방 기계들이 한데 모인 공간.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 문을 벌컥 연 소라가···
잼 통을 통째로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저거 저렇게 많이 먹어도 괜찮은 겁니까?"
"소라 씨가 잼을 많이 좋아하나 보네요. 독성은 전혀 없으니까 괜찮아요. 만드는 게 어렵지도 않고. 잼이야 다시 만들면 되죠."
서정원도 홍소라의 기행에 당황한 눈치였으나 자연스럽게 상황을 포장했다.
유안은 정원의 사회성에 감탄하며 주방 쪽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손님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잼 먹방을 순식간에 끝낸 소라가 이번에는 머그잔을 손에 쥐었다.
김주현이 심심해서 만든 컵 컬렉션 6호였다.
"더, 던전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홍소라가 자신이 가진 유일한 스킬명을 읊었다.
그러자 머그잔 안에서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텅 비어 있던 투명한 잔에 던전에서만 볼 수 있는 푸른색 흙이 담겼고, 그 위로 작은 떡잎이 하나 올라왔다.
"아··· 아, 드디어 됐어···!"
자신의 헌터 인생이 망했다고만 생각하던 홍소라가 기쁨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이 행복을 가장 먼저 나누고 싶은 사람들에게 머그잔을 들고 다가갔다.
"사, 사장님! 서정원 씨, 김주현 씨···!"
옹기종기 모여서 치즈타르트와 위브 잼 요거트 시식회를 열던 그들이 홍소라를 돌아보았다.
한 번 스킬을 사용하니 마나는 바닥났다.
하지만.
이곳 중앙 카페와 함께라면 앞으로 스킬을 무궁무진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울컥한 소라는 떡잎이 솟아난 머그잔을 조심스레 유안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게이트 근처에서 식물이 자랄 수는 없을 텐데···."
그 순간, 유안은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오레오 쿠키 흙과 이파리 젤리를 떠올렸다.
디저트를 굳이 화분에 담아서 파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헌터그램에는 이런 게 잘 통할 수도 있지!'
유안은 이제 SNS 홍보에 있어서만큼은 홍소라의 안목을 전적으로 믿었다.
요거트를 먹던 숟가락을 들어서 쿠키 흙을 듬뿍 펐다.
"사장님! 흙을 왜 퍼먹으려고 하세요!"
홍소라가 말도 더듬지 않고 소리쳤다.
파악!
숟가락을 거칠게 빼앗긴 유안이 눈을 깜빡거렸다.
"···디저트 아니었습니까?"
"아녜요! 무, 물론 디저트를 이렇게 만들어도 잘 팔리긴 했겠지만··· 이건 진짜 던전 흙이라구요!"
"그럼 이 풀은 뭡니까? 던전산 흙에 일반 식물이 자랄 리 없고··· 던전산 식물도 던전 밖으로 나오면 키울 수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제, 제 스킬이에요."
홍소라는 헌터 디바이스에 등록된 자신의 스킬을 보여주었다.
[던전화(F급-성장형)]
주변 환경을 던전처럼 변화시킨다.
"지금은 F급이라 이 정도 범위에만 쓸 수 있어요. 마나가 더 있었으면 반복해 사용할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위브 잼도 더 없고요. 던전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마나를 충전할 수도 있을 텐데···. 저, 마나 저항력이 너무 낮아서 던전에 들어갈 수 없거든요."
홍소라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유안은 소라가 왜 카페 알바생에 지원했는지 깨달았다.
'던전 게이트 근처에 있으면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충전할 수 있으니까. 그걸 노린 거겠지.'
무려 성장형 스킬을 가졌는데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다면 아쉬워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것이다.
'잠깐, 마나 저항력이 낮다고?'
유안은 소라가 한 말에서 중요한 내용을 캐치했다.
"홍소라 씨, 마나 저항력이 낮으면 게이트 근처까지 오기 힘들지 않았습니까?"
중앙 카페에는 [고대 포식자의 핵]을 박아 두었으니 괜찮지만, 그 범위가 던전 제한구역 전체를 감싸지는 못한다.
그리고 설치와 해체를 반복하는 가게 특성상 인벤토리에서 핵이 박힌 바 테이블을 꺼내기 전까지는 마나 저항 효과를 받을 수 없다.
그런데 홍소라는 그것쯤 견딜만 하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더, 던전 들어갔을 때보다는 훨씬 낫거든요···. 사, 살짝 어지럽고 숨 쉬기 힘들어지긴 하지만 카페 근처에 오면 바로 나아지니까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