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37)

김주현도 마찬가지로 웃으며 자신도 한 번 아이스티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섰고,

몇 번의 손놀림으로 유안이 만든 것보다 훨씬 나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심지어 김주현이 만든 아이스티는 외관상으로도 완벽했다.

싱그러운 자몽색 액체가 잔 바닥에 심해처럼 가라앉아 있고, 그 위로 층층이 쌓인 얼음은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테이크아웃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의 갯수까지 조화롭게 맞춘 것처럼 한 점의 예술품을 보는 것 같았다.

이건 음모였다.

"주현 씨는 공방 주인이셔서 그런지 확실히 손재주가 좋으시네요. 지금 바로 카페 알바 시작하셔도 되겠는데요?"

"그쵸? 가게 더 바빠지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이 사장님!"

둘은 언제 서먹했냐는 듯 편을 먹고 유안을 놀리기 바빴다.

'···사장은 전반적인 경영만 잘 하면 돼.'

이유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

본격적인 장사가 시작되고, 서정원과 김주현은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손님들의 입과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서정원이 완벽한 비율의 배합으로 만들어낸 음료에 김주현이 가니시를 해서 판매하자 손님들의 만족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진짜 예뻐요! 먹기 너무 아까운데요!"

예술품에 가까운 아이스티를 손에 들고 찬양하던 손님들은.

"허어··· 이게 진짜 아이스티예요?"

그 맛을 보고 나서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미 아는 맛처럼 느껴지면서도 묘하게 색다른 감각을 주는 음료였다.

던전산 과일만이 낼 수 있는 특유의 맛을 잘 살린 덕분이었다.

무더운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아이스티가 압도적으로 잘 팔리기는 했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라떼가 안 나가는 건 아니었다.

중앙 던전에서 힘들게 파밍을 마치고 나온 헌터들이 주로 카페인을 찾았다.

"크으-! 이 맛에 중앙 던전 파밍하러 오지!"

그들은 커피 한 잔을 원샷하고 최상급 포션이라도 마신 것처럼 기운을 얻어가고는 했다.

음료에 만족한 손님들은 이전보다 훨씬 큰 돈도 턱턱 지불했고, 유안은 쌓여가는 헌터 디바이스 속 잔고를 바라보며 웃었다.

많은 손님이 오갔으나 카페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대부분 음료를 들고 던전으로 파밍하러 들어가거나, 파밍을 끝내고 온 사람들은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테이블 자리는 비교적 한산했는데, 조금 눈에 띄는 손님 한 명이 나타났다.

'뭐 저렇게 두리번대지···?'

안경을 쓴 손님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카페 전체를 둘러보고 있었다.

유안이 중앙 던전에 카페를 시작한 이후 처음 보는 유형의 손님이었다.

메뉴를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지도 않고, 그저 카페만 계속 살펴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저기, 손님?"

결국 사장인 유안이 나서서 말을 걸었다.

안경 너머로 매섭게 치켜 떠져 있던 눈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이, 이 카페 사, 사장님이신가요?"

손님은 짐짓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말을 더듬었고, 유안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이상한 손님의 이상한 행동에도 당황하지 않은 유안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제가 사장입니다."

"···으, 그, 그러니까··· 이 카페, 어떻, 어떻게··· 한 거죠?"

손님이 갑자기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을 했다.

이유안도 이번에는 표정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예? 무슨··· 말씀이시죠?"

유안이 그렇게 묻자, 손님은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러다가 쓰읍- 하고 크게 심호흡한 뒤 자신이 준비해둔 말을 탈탈 쏟아냈다.

"저, 저는 F급 헌터예요. F급 중에서도 F급, 그, 그래서 마나 저항력이 거의 없거든요. 비, 비각성자 수준으로요! 그래서··· 원래 게이트 근처에 오면 머리가 아프고 속도 메스껍고 어지러운데······."

손님의 말을 들은 유안이 그 안색을 살폈다.

'지금은 딱히 이상 없어 보이는데.'

눈에 띄게 아파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손님은 유안이 그렇게 생각한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덧붙여 말했다.

"그, 그래서 이상한 거예요! 분명, 분명히··· 게이트 근처 제한구역에 들어왔을 때는 몸이 안 좋았는데······. 이 카페 근처에 오니까 멀쩡해졌다구요!"

"···아."

"비법을 알려 주세요! 특별한 수를 쓰신 거죠? 저한테도 그 방법이 정말, 꼭 필요하거든요···!"

안경을 고쳐 쓴 손님은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F급 헌터 손님이 자신의 양손을 꼭 맞잡고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홍소라

던전 출입 불가.

그것이 홍소라가 각성하자마자 통보받은 내용이었다.

"더, 던전에 출입할 수 없다구요?"

소라가 헌터 협회 직원을 향해 외쳤고, 직원은 사무적인 태도로 홍소라의 헌터 분석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여기 보이시죠? 마나 저항력 측정 불가. 이 측정 불가라는 게, 수치가 높아서 측정 불가인 게 아니거든요. 이 그래프를 보세요."

협회 직원의 볼펜 끝을 따라가자 밑바닥에 처박힌 그래프가 하나 보였다.

다른 수치들은 비등비등하게 평범한 F급 헌터 수준인데, 딱 하나만 0에 수렴하다 못해 마이너스 값으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기계로 측정하면 소수점 두 자리까지 정확하게 나오는데··· 홍소라 헌터님은 수치가 워낙 낮아서 측정 불가가 떴어요."

마나 저항력.

그것이 홍소라의 발목을 잡았다.

"아, 안 돼···."

홍소라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아까부터 켜두고 있던 상태창이 흐리게 보이는 듯했다.

헌터 각성은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소라 역시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상태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 세계 인구의 10% 정도라는 확률을 뚫고, 운 좋게 각성자가 된 것이다.

등급은 F급.

흔하디흔한 최하급 헌터였다.

그래도 안전하게 던전 파밍만 꾸준히 하면 먹고사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각성자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리고 홍소라에게는···

하나 더 주어진 것이 있었다.

[던전화(F급-성장형)]

주변 환경을 던전처럼 변화시킨다.

마나 저항력 부족으로 던전 게이트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처지에 성장형 스킬이 하나 따라붙었다.

홍소라가 가진 유일한 스킬은 말 그대로 계륵이었다.

스킬을 성장시키려면 여러 번 반복적으로 사용해 숙련도를 높여야 한다.

성장형 스킬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싹 뒤져보니 '반복만이 답'이었다.

그러나 마나 저항력도 부족한 홍소라에게 그만큼 스킬을 반복할 마나는 없었다.

체내 마나 보유량이 턱없이 부족해서 그 좋은 성장형 스킬을 제대로 써본 적도 없었다.

마나가 많이 분포해 있다는 게이트 근처로 가면 저항력 부족으로 자꾸 기절했다.

'흑···, 헌터 인생 망했어!'

마나 저항력을 높일 방법은 없는 걸까.

그 방법만 일 년 넘게 찾아다니던 홍소라는 지쳐갔다.

마지막으로.

기절하더라도 좋으니 딱 한 번만.

던전 게이트 근처에 가서 스킬이라도 마음껏 써 보자고 생각했다.

가장 만만한 게 중앙 던전이었다.

다른 던전에 비해 유동인구가 많으니 자신이 쓰러져도 누군가 바로 신고해줄 것 같았다.

던전 게이트 근처로 다가가면 갈수록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마나 저항력 부족의 기본적인 현상이었다.

그래도 홍소라는 정신을 다잡았다.

'아직 쓰러질 수는 없어.'

체내 마나가 조금만 더 쌓이면 스킬을 쓸 수 있게 된다.

홍소라는 이제 지척에 보이는 중앙 던전 게이트를 향해 다가갔고.

게이트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이상함을 느꼈다.

'어, 어어···? 왜 자꾸 몸이 가벼워지지?'

믿을 수 없는 기현상의 끝에는, 간판도 벽도 없이 영업 중인 카페 하나가 있었다.

*

"영업 비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유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구구절절 듣게 된 홍소라의 사정은 참으로 딱했으나, 그렇다고 [고대 포식자의 핵]을 넘겨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아이템은 3년 후에도 밝혀지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은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다.

던전산 커피콩이나 아이스티 재료들은 눈치 빠른 헌터라면 이미 그 출처를 짐작했겠지만, [고대 포식자의 핵]은 절대 아니었다.

유안이 운영하는 중앙 카페의 가장 큰 영업 비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아이템을, 방금 처음 만난 손님에게 홀랑 밝힐 수는 없다.

이유안이 몇 번이나 안 된다고 말하자, 홍소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단념하는 듯했다.

"그, 그럼 저 따뜻한 라떼나 한 잔 주세요···. 마시고 갈게요."

"예, 손님.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홍소라가 이제야 평범한 손님답게 주문을 했다.

유안은 영업용 미소를 입에 걸고 커피를 내리러 갔다.

오늘 팔려고 손질해둔 아이스티 재료는 진작 다 떨어졌지만, 커피콩은 항상 부족할 일이 없었다.

드륵, 드르르륵.

주현의 야심작인 대형 커피 머신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정원이 나서서 깨끗한 머그잔 하나를 가져다주었고, 유안이 거기에 커피를 담았다.

에스프레소 원액에 고소한 던전산 우유를 섞자 금세 라떼가 완성되었다.

그 짧은 사이 홍소라는 자신의 헌터 디바이스를 살펴보고 있었다.

'헌터그램인가···!'

유안은 이제 헌터 디바이스만 보면 기대감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오늘도 벌써 수십 명의 손님이 헌터그램에 중앙 카페 사진을 업로드했다.

따로 부탁한 것도 아닌데 손님들이 알아서 홍보해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서정원 씨 얼굴 찍어가도 되는데.'

유안은 중앙 카페의 세일즈 포인트 중 하나인 정원을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눈치 빠른 알바생이 모델처럼 씨익 웃으며 라떼 잔을 집었다.

"제가 갖다드리고 올게요, 사장님."

"예, 좋습니다."

유안은 바 테이블 안쪽에 남아서 정원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현도 오늘 하루 서정원의 얼굴 활용도를 지켜봤으니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바생 잘 뽑긴 하셨네요."

"예. 일을 아주 잘합니다."

"···그래도 기계 같은 건 못 만들죠? 아니면 뭐어, 던전 부산물로 만드는 생활용품이라든가?"

김주현은 계속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잘 팔아주는 고정 거래처가 사라질까 봐 걱정인 거겠지.'

유안은 그렇게 판단하고 주현에게 확실히 말해두었다.

"만물 공방과 거래를 끊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서정원이 아무리 팔방미인 A급 헌터여도 제작 능력만큼은 김주현을 따라갈 수 없다.

그 어떤 헌터를 데리고 온다 하더라도, 주현을 쉽게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주현이 어디까지 성장하는지 알고 있는 유안이었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계속 거래해주신다니 너어무 기쁘네요."

기쁘다니 다행이다.

유안은 이제 다시 시선을 서정원 쪽으로 옮겼다.

긴 다리로 홍소라에게 쭉쭉 다가간 정원이 라떼 잔을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놓고 있었다.

서빙을 완료하고 곧장 카운터 쪽으로 돌아오려던 정원은 소라에게 붙잡혔다.

홍소라가 무어라 이야기하며 자신의 헌터 디바이스를 가리켰다.

'헌터그램이다!'

디바이스 화면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유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허둥대는 손짓.

묘하게 긴장한 듯한 표정.

저런 태도를 보인 손님은 백이면 백 서정원과 함께 사진을 찍어 갔다.

'이번에는 또 어떤 포즈를 취하려나.'

유안은 은근히 기대하며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참 시간이 지나도 홍소라와 서정원은 헌터 디바이스로 사진을 찍지 않았다.

서정원은 갑자기 구부렸던 허리를 바르게 세우더니 유안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얼굴에는 곤란과 당황이 맺혀 있었다.

평소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 아니자 유안 역시 놀랐다.

'뭐지?'

"무슨 일 생긴 거 아녜요?"

주현도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인지하고 유안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얼른 가 보라는 의미였다.

결국 사장인 자신이 출동하자, 정원 역시 유안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홍소라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에서 서정원이 속삭인다.

"사장님, 저분이 여기서 알바하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예?"

"며칠 전에 올리셨던 알바 구인 글이요. 그걸 읽었나 봐요."

"예···?"

알바생 모집 글을 삭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국의 헌터들이 모두 쓰는 자유 게시판에 올린 글이라서 벌써 다른 글들에 밀려 묻혔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유안이 쓴 글은 몇백 페이지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서정원은 정말 운 좋게 글을 올리자마자 확인했던 것이고, 정원 이후에 새로운 지원자는 없었다.

"그걸 어떻게 찾았지···."

이유안이 홍소라의 검색 능력에 감탄했다.

그때, 유안의 유니폼 포켓에 들어가 있던 헌터 디바이스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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