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하면 되는 거죠?"
똑똑하고 훌륭한 알바생은 곧장 완벽한 커피를 만들어냈다.
이제 보니 손도 빨랐다.
유안은 A급 알바생을 바로 칭찬했다.
"잘하셨습니다."
"머신 사용법이 복잡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비교적 큰 머신임에도 작동법이 간단한 이유는 순전히 주현의 덕이었다.
처음 만들어보는 커피 머신이라 다양한 기능을 탑재하기 힘들었기에, 만물 공방의 주인은 최대한 단조롭게 머신을 설계했다.
'나중에 좀 더 공부해서 기능 이것저것 추가해드릴게요! 이 사장님한테만 평생 무료 업그레이드!'
주현은 시원하게 그런 약속까지 했다.
커피 머신 여러 개를 분해해 볼 작정인지 만물 공방에는 요새 기계 부품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마 빠른 시일 내로 스팀 밀크 기능이 추가될 것 같았다.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하겠는데요?"
유안이 잠시 만물 공방을 떠올리는 사이, 머신 조작법을 완전히 익힌 정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유안은 중앙 카페를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여러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혼자서는 그것을 실행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빠르게 만들어 줄 바리스타 한 명.
바리스타가 카페 업무 전반을 담당하는 동안, 유안은 사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처음이니까 가게 같이 봐 줄게요."
"네. 보통 하루에 몇 잔 정도 나가나요?"
"오늘 팔아야 할 건 백 잔씩이에요."
이곳 게이트의 수요가 어디까지 받쳐줄지 모른다.
그래서 유안은 판매량을 단번에 확 올리기보단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늘려가는 쪽을 택했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이 더 늘어나고, 단골도 생긴다면 고정 판매량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안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정원이 무언가 생각하는 기색을 보였다.
"흐음."
어느덧 서정원의 시선은 급조한 메뉴판 쪽으로 향해 있었다.
아메리카노.
라떼.
작은 암녹색 칠판에는 두 개의 메뉴만 달랑 적혀 있었다.
"사장님, 제가 카페를 엄청 자주 다니는 건 아닌데요."
"네."
"아메리카노랑 라떼만 파는 카페는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 50년 전통 국밥집 컨셉, 그런 건 아닐 테고."
"······."
정원의 말에 정곡을 찔린 유안은 입술을 살짝 말아 물었다.
안 그래도 메뉴를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유안 역시 카페에서 다양한 음료를 시도하기보단 '카페인' 자체를 섭취하는 것만 중요시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라떼 말고 다른 메뉴는 마셔본 기억이 별로 없다.
'카페에서 보통 뭘 팔더라.'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만 봐도 메뉴가 이것저것 많았던 것 같은데.
무엇보다 메뉴 추가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유안의 카페 지식이 소박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쓸 만한 재료를 구하기 힘들었다.
여기는 중앙던전 게이트 바로 앞이다. 당연히 평범한 식재료는 오래 버텨주지 못한다.
어떻게든 빨리 소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더라도, 그 많은 재료를 게이트 앞까지 끌고오는 것도 문제였다.
차가 다닐 수 없는 제한구역이기에 순수 힘만으로 재료를 이고 지고 와야 하는데.
인벤토리에 들어가지도 않는 일반 재료를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게이트 앞까지 올 자신은 없었다.
인력 낭비이기도 했다.
지금은 정글 던전산 원두를 쓰는 아메리카노, 마찬가지로 던전산 우유를 쓰는 라떼만 팔고 있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재료는 전부 인벤토리에 들어갔고, 유안은 가볍게 몸만 와서 그것들을 꺼내기만 하면 됐으니까.
혹시 몰라 인벤토리를 살펴보았지만 당장 카페 재료로 쓸 만한 던전 부산품은 없어 보였다.
'안 그래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던 참인데.'
알바생이 먼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사장님, 커피 못 마시는 사람들이 카페 가면 뭘 제일 많이 주문하는지 아세요?"
서정원이 갓 내린 에스프레소 한 잔을 살랑살랑 흔들며 물었다.
옅은 미소를 띤 알바생을 지켜보던 유안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음···, 우유?"
우유라면 얼마든지 있으니 스팀 밀크를 메뉴에 추가해도 좋을 것이다.
유안은 꽤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하며 당장 메뉴판에 '우유' 두 글자를 추가했다.
하지만 서정원은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아이스티예요."
시원하고 달콤한 음료의 이름이 나오자 유안은 본능적으로 탄식했다.
'맞아, 아이스티네.'
여러 이유로 카페인을 섭취할 수 없는 사람들은 아이스티나 에이드류를 많이 주문하게 된다.
유안은 대충 머릿속으로 아이스티에 들어갈 재료를 가늠해보았다.
···시판되는 가루형 아이스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레몬과 복숭아,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산품을 쓰지 않고 말이다.
유안은 일단 제 인벤토리를 빠르게 스캔했다.
'중앙 던전에서 얻은 마지막 잎새, 이건 필요 없고. 늪지대의 푸른 고사리··· 도 지금은 필요 없고. 문베어의 숨겨둔 식량? 이건 좀 괜찮네. 이거랑 또······, 어?'
커다란 꿀단지를 꺼낸 유안이 인벤토리 구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곳에는 가지각색의 통통한 열매가 있었다.
채집한 즉시 인벤토리에 넣었기에 신선도를 유지한 상태.
국내 던전에서 구할 수 있는 과일이란 과일은 다 따고 다녔기 때문에 그 가짓수는 스물을 넘어갔다.
종류에 따라 수량 차이는 있었으나, 파밍에 미친 놈이었던 유안은 세는 단위부터 달랐다.
백, 이백, 삼백.
어떤 것은 천 단위를 넘어가기도 했다.
유안은 던전산 과일을 종류별로 하나씩만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기다란 카페 테이블 위에 오색빛깔 과육이 수놓아지자 서정원이 반색했다.
과육을 하나하나 들어 상태를 확인하고, 인벤토리에 잠시 넣어보며 아이템 설명까지 읽었다.
그리고 만족했다는 듯 씨익 웃으며 유안에게 짓궂게 말했다.
"사장님,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씀하셨어야죠. 혼자 다 드시려고 안 보여준 거예요?"
"그런 건 아닌데··· 던전산 과일이라 재료로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맛의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당장 과즙을 낼 기계도 없고요. 생긴 건 그렇게 안 보여도 껍질이 무척 단단합니다."
던전에서 나는 것들이 대체로 그랬다. 강력한 마나에도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하고 단단하게 짜여 있다.
그래서 던전 부산품으로 만든 특수 기계를 사용해야만 쉽게 손질할 수 있다.
"괜찮아요."
그러나 서정원은 별것도 아닌 걸 걱정한다는 듯 굴더니 샛노란 과일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제 인벤토리에서 작은 단도 하나를 꺼냈다.
서걱.
레몬과 망고를 닮은 노란 과일이 부드럽게 반 토막났다.
'아.'
너무 평범하게 대화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서정원은 A급 헌터였다.
아이스티
서정원의 손에서 얇게 포가 떠진 과육은 새콤한 향을 풍겼다.
"아이템 정보 확인해보니까 독 같은 건 없었어요. 이대로 과일청을 만들어서 써도 좋긴 하겠지만, 그건 숙성되기를 좀 기다려야 해서··· 지금은 다른 방법을 쓸게요."
"무슨 방법 말입니까?"
여기는 던전 게이트 앞. 허허벌판이다.
주현이 있다면 무언가 뚝딱뚝딱 만들어내 순식간에 과일을 가공할 기계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만물 공방의 주인은 지금 여기에 없었다.
그러니 당장 과일을 가공할 방법은 없어 보이는데, 정원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자꾸 눈을 찡긋거렸다.
'뭔데···.'
유안이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그를 바라보자.
화아아-.
서정원의 손바닥에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장 테이블 위의 노란 과육 위로 쏟아졌다.
마력이 깃든 스킬이라 일반적인 열기보다 훨씬 빠르게 과일이 말라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던전산 과일이 건조기에 오래 말린 것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든 것은.
그래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보기에 좋은 형태였다.
"전투에서는 크게 쓰일 일이 없었는데, 이 스킬을 이렇게 쓸 줄은 몰랐네요."
정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스킬 정보를 유안에게도 공유해주었다.
유안은 제 헌터 디바이스로 들어온 서정원의 스킬을 꼼꼼히 살폈다.
[사막의 열기(E급)
시전자의 손으로부터 모래 사막처럼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다.]
'···인간 건조기!'
스킬 설명을 읽은 유안이 입가에 미소를 걸며 생각했다.
A급 헌터에게 E급 스킬이라니, 전투 중에는 정말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음료 재료를 만드는데 건조기만큼 유용한 스킬이 또 있을까.
유안은 정원의 앞쪽으로 나머지 과일들도 슬쩍 밀어주었다.
*
마나가 넘쳐나는 A급 헌터 서정원에게 E급 스킬을 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기에, 서정원은 순식간에 테이블 위의 모든 과일을 바싹 말려버렸다.
모양과 색은 다양했으나 기본적으로 먹음직스럽게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게다가 [사막의 열기] 스킬을 쓰면 약한 독 정도는 함께 제거되었다.
몇몇 독성을 품은 던전산 과일도 정원의 스킬이 닿자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변했다.
"이건 왠지 달콤할 것 같은데요. 초콜릿 색이네."
정원이 다크 초콜릿 색으로 건조된 과육 한 조각을 손에 들었다.
원 형태는 포도처럼 하나의 줄기에 작은 알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과육 하나하나가 네모난 것이 독특했다.
말리고 나니 작은 큐브 초콜릿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 진짜 초콜릿 맛이랑 비슷해요! 과일향도 조금 나네요."
서정원이 먼저 맛을 보았고, 한 조각을 집어 유안에게 건넸다.
"이건 디저트로 팔아도 될 것 같은데. 사장님도 한 번 드셔보세요."
정원의 제안에 따라 마른 과육을 입에 집어넣자,
쌉싸레하면서도 진한 달콤함이 입안 가득 감미롭게 퍼졌다.
'맛있잖아?'
웬만한 생 초콜릿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맛있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끝맛은 정원의 말대로 과일향이 났고, 다 녹아 사라진 후에도 찝찝함 대신 상큼함만 남았다.
본질이 과일이라 그런 것 같았다.
유안이 초콜릿 과육 몇 개를 집어먹는 동안 정원은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말린 과일을 종류별로 맛보더니 잘 어울리는 것끼리 조합한다.
하나의 테이크아웃 잔에 두세 종류의 과일이 함께 들어갔다.
"사장님, 꿀단지 좀 이쪽으로 주실래요?"
유안은 여태 한 팔로 안고 있던 '문베어의 숨겨둔 식량'을 정원에게 건넸다.
어린아이 머리통 크기의 단지 안에는 맑고 투명한 색의 꿀이 가득했다.
"이거 훔치기 힘들지 않으셨어요?"
정원도 이 아이템을 알고 있었다.
허니비 던전이라 불리는 C급 숲 지형 던전에서 채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서정원은 가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C급 던전을 돌고는 했다.
허니비는 던전 치고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종종 산책하던 곳이었는데···
문베어의 숨겨둔 식량을 훔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던전 곳곳에 포진한 벌집만 파괴하면 클리어할 수 있는 던전이기도 했고,
문베어를 건드리는 순간 던전의 난도가 확 올라가기 때문에 굳이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문베어는 자신의 식량을 빼앗아간 사람을 던전 끝까지라도 쫓아온다.
단순히 비유적 표현이 아니었다.
정말 끝까지, 쫓아온다.
거리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벌리면 어그로가 자동으로 풀리는 다른 마수들과 다르게, 식량 뺏긴 문베어는 결코 온순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평소에는 항상 잠에 빠져있으니 건드리지만 않으면 얌전한데.
이유안의 인벤토리에는 문베어의 숨겨둔 식량이 몇백 개나 더 있었다.
"파밍하고 나서, 게이트 닫히기 전에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던전 밖까지 따라오지는 못하니까요."
"사장님, 헌터 등급이 어떻게 되세요?"
"E급입니다."
"······."
화난 문베어의 공격은 A급 헌터의 움직임으로도 피하기 힘들다.
정원 역시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식량을 훔쳐본 전적이 있기에 그 속도를 잘 알았다.
그런데 E급 헌터의 몸으로 어떻게?
단순히 민첩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특별한 스킬이 있거나, 아니면 정말···
'타고났거나.'
가끔 등급은 낮아도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난 헌터들이 있다.
정원은 유안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생각했다.
"재료 부족해지면 직접 파밍하러 가셔도 되겠어요."
정원은 유안의 실력을 인정하며 그렇게 말했고,
이유안은 정색하며 곧바로 부정했다.
"아뇨, 무슨 말입니까. 던전은 절대 안 들어갈 겁니다."
유안은 자못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라, 정원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네···. 좀 힘들기는 하죠, 던전이. 신경 쓸 것도 많고."
"무엇보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안전 제일입니다."
"네, 사장님 말씀이 맞아요."
"그러니 서정원 씨도 저와 함께 일하는 동안은 최대한 안전하게 지내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