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37)

  

게이트에서 카페라도 할게요

던전 싫어

'헌터로 각성한 게 내 인생 마지막 행운이었나.'

굳게 닫힌 게이트를 보며 유안은 생각했다.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나갈 시간이야 충분히 있었다.

파밍에 정신이 쏠려 나가지 못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탓이긴 했으나···

'등급이라도 높았으면 어떻게든 공략하고 나갔겠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유안은 평범한 E급 헌터였고, 이 던전은 B급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유안은 우선 파밍한 재료를 전부 인벤토리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마주했다.

무기? 없었다.

체력 회복 포션? 그런 건 애초에 구매해본 적도 없다.

유안은 오로지 던전 부산물 파밍만 주로 하던 헌터였으니 그에게 전투를 위한 아이템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필 늑대형 몬스터가 많이 출몰하는 던전이라 팔다리가 뜯어먹히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덩치 큰 놈 하나가 마침내 목을 물어뜯었을 때, 유안은 제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마지막 생각은 이것이었다.

'던전 들어오지 말걸.'

*

회귀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안은 눈을 뜨자마자 날짜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고, 달력은 분명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날로부터 3년 전을 표시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확인한 건 인벤토리였다.

회귀하면서 인벤토리도 텅텅 비지 않았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유안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유안은 각성자이기에 인벤토리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인벤토리에 보관 가능한 아이템은 무기나 포션, 던전 부산물 등으로 제한적이다.

그러나 유안은 늘 인벤토리를 꽉꽉 채워 다녔다.

그는 위험성 높은 전투 대신 파밍을 주로 하여 던전에서 얻은 부산물을 판매하는 헌터였다.

그렇기에 유안의 인벤토리에는 남들이 보기에 쓸모 없어 보이는 잡템도 한가득 들어 있었다.

'언젠가 다 쓸 데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하나둘 모은 것이 태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어쨌든 회귀하며 인벤토리가 리셋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유안은 자신이 깨어난 곳이 본가임을 확인했다.

"누나들도 집에 있으려나."

어떤 시간대로 돌아온 것인지는 알았지만, 그 당시의 정확한 상황까지 기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헌터 일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지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라는 건 알았다.

'이때 한창··· 누나들이 날 뜯어말리고 있었지.'

비각성자인 유안의 누나들은 던전과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갖고 있었다.

날마다 던전 공략 중 목숨을 잃은 헌터들이 뉴스에 나오니 당연한 일이었다.

누나들은 유안이 막 각성했을 때부터 던전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말렸다.

굳이 헌터 일을 하지 않아도, 다른 일을 열심히 하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고.

'누나들 말 들어서 손해 볼 거 하나 없다는 게 맞았어. 역시 던전에는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유안은 자신의 죽음을 다시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때.

벌컥!

유안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유안! 너 또 던전 들어갈 궁리 하고 있었지!"

다짜고짜 들이닥쳐 유안을 다그치는 사람.

작은누나 이유월이었다.

회귀 전, 본격적으로 던전에 출입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일부러 누나들 얼굴을 안 보고 살았다.

마주치면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하니까.

그래서 회귀 전부터 따지자면 작은누나의 얼굴을 거의 3년 만에 보는 것이었다.

"누나는 그대로네."

절연한 것처럼 지냈다고는 해도 유안은 누나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연락만 안 하고 지냈다 뿐이지 늘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유안이 새삼 추억에 잠겨 작은누나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자, 유월이 인상을 팍 구기며 말했다.

"요 며칠 계속 집에만 붙어 있었으면서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냐, 아무것도. 그보다 누나, 나 던전 들어갈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응···? 뭐?"

유월은 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어 되물었다.

이제 회유책을 쓰면서 살살 설득할 생각인지 의심까지 했다.

유안이 지금 입은 옷은 헌터 전용 재킷과 바지로, 던전에 들어가기 안성맞춤인 모습이었다.

그런 꼴을 하고 던전에는 안 들어가겠다고 하니, 유월로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간 동생이 보여준 행실을 생각하니 더 그랬다.

E급 헌터니까 던전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말을 착하게 듣는가 싶었는데,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멋대로 게이트 근처에 가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유경과 유월은 막냇동생을 철저히 감시하며 던전 근처에 가려는 기색만 보이면 잡아다 집에 구금했다.

"유안이 너, 며칠 전에도 유경 언니한테 붙잡혀왔잖아. A급 던전 게이트 근처에서 얼씬거리다가."

"응, 그랬지."

"근데 오늘 갑자기 던전에 안 들어가겠다고 말하면 믿을 것 같아? 이러고 또 언니랑 내가 방심한 틈에 빠져나가려 하지!"

"진짜 아니야. 던전 위험해서 싫어. 안 들어갈 거야."

바로 몇 분 전에 죽음을 맞은 것처럼 모든 기억이 생생했다.

던전에 들어가서 나대다가 개죽음을 당했는데 똑같을 짓을 반복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유안은 회귀 전과는 아주 다른 길을 가보기로 했다.

"누나, 나 용돈 좀 줘."

"···응?"

유월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동생을 살펴보았다.

던전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들었을 때보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유안은 그런 작은누나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누나들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성인이 된 후에는 한 번도 용돈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각성 전에는 던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으니 어떻게든 꾸역꾸역 알바를 해서 학자금을 갚아나갔다.

기본적인 생활비와 용돈 역시 스스로 벌어서 해결했다.

누나들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 죽어보니 왜 그렇게까지 요령 없이 살았는지 모르겠다.

유안의 누나들은 둘 다 직장생활을 10년 넘게 한 사회인들이었고, 이미 충분히 자리를 잡았기에 막냇동생에게 용돈 정도는 넉넉히 줄 수 있었다.

유안은 아예 작은누나 쪽으로 양손을 공손히 내밀며 요구했다.

"용돈 줘. 많이."

"어어···? 그, 그래?"

유월은 동생의 변화가 달가우면서도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애가 좀··· 너무 갑자기 달라진 것 같다.

분위기나 말투도 그렇고, 평생 달라는 말 없던 용돈을 요구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나 유월은 순순히 지갑을 열었다.

막냇동생이 처음으로 용돈을 달라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유월은 다 큰 동생에게 용돈을 얼마나 줘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그냥 지갑에 있는 현금을 통째로 넘기기로 했다.

마침 월급을 받은지 얼마 안 돼서 지갑 사정이 넉넉했다.

"다 써도 돼. 나는 카드 쓰면 되니까, 그건 그냥 편하게 써."

"응. 고마워, 누나."

"어어···, 야, 근데 너 혹시 이 돈으로 헌터 용품 사려고 하는 건 아니지? 그럼 진짜 수갑 채워서 방에 가둘 거야!"

유월은 최악의 수를 가정하며 동생의 손을 꽉 쥐었다.

유안은 작은누나의 아귀힘에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헌터 용품 살 생각도 없고, 던전 들어갈 준비하려는 것도 아니니까 이것 좀 놔 봐."

"정말이지? 너 이거 녹음해둔다."

"하든가···."

유월은 정말 동생의 약속을 휴대폰에 녹음하고 몇 차례 확인까지 했다.

던전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 순순히 방에 갇히겠다는 살벌한 내용의 계약이었다.

마음이 든든해진 유월은 이제야 동생의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

"근데 용돈은 갑자기 왜? 먹고 싶은 과자라도 생겼어?"

"···작은누나, 나 스물여섯이야."

회귀 전에는 삼십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직도 세 살짜리 취급을 한다.

"아니, 평소에 물욕 없던 애가 갑자기 용돈을 달라니까 그러지. 던전 들어갈 준비하는 것도 아니면 대체 어디에 쓰려고?"

"던전에는 안 들어가더라도, 평생 누나들한테 빌붙어 살 수는 없잖아. 그냥 소소하게 사업이나 해볼까 싶어서."

"사업? 갑자기?"

유월은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업하기에 그 돈은 많이 부족하지 않아?"

"아냐, 큰누나한테도 용돈 좀 받으면 충분해."

"대체 무슨 사업을 하려고···."

"있어. 자본금 많이 안 드는 거."

유안은 머릿속의 계획을 유월에게 전부 밝히진 않았다.

성공한 이후에 알려줘도 늦지 않을 것이다.

유월은 굳이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냇동생이야 늘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었고, 던전에만 안 들어간다면 뭐가 됐든 괜찮았다.

"위험한 일만 아니면 돼. 열심히 해 봐."

"응, 알았어."

유안은 작은누나에게 얌전히 대답하며 큰누나에게도 용돈 받을 계획을 세웠다.

*

주현은 진열대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한숨지었다.

"휴···. 이제 월세도 더 미뤄달라고 할 수 없는데. 진짜 관두고 다른 일 시작해야 하나."

'만물 공방'에는 팔리지 못한 재고가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평범한 생활용품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던전 부산물로 만든 것이다.

주현은 공방에서 헌터 전용 생활용품을 만들어 파는 장인이었다.

그러나 헌터들은 그냥 일반 제품을 쓰지, 굳이 비싼 돈 줘가며 던전 부산물로 만든 것을 사지는 않았다.

그것이 훨씬 튼튼하다고는 해도 큰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한 것이다.

헌터 관련 사업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주현의 포부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수요는 턱없이 적었고, 이제는 신제품을 만들 던전 부산물을 구할 돈도 없었다.

"하다못해 E급 헌터라도 됐으면 던전에 직접 들어가서 재료를 구해오는 건데."

주현은 흔하디흔한 F급 헌터였다.

각성하여 마나 저항력을 가지기는 했으나 신체 능력은 비각성자와 크게 차이가 없는.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라도 잘못 만나면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죽을 것이다.

주현은 제 자식 같은 공방의 물건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딸랑.

맑게 퍼지는 종소리에 주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 달 만의 손님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헌터 복장을 한 사람이었다.

꽤 번듯하게 생겼는데··· 한쪽 가슴에만 뭔가 잔뜩 넣어둔 것처럼 두둑한 모양새가 좀 웃겼다.

'그냥 지나가다 궁금해서 들른 헌터인가?'

주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일단은 손님이니까.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물건 있나요?"

손님은 잠시 대답 없이 있다가, 주현을 올곧이 바라보며 주문했다.

"던전 부산물로 만든 테이블이 필요합니다. 사이즈가 좀 컸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정도 크기면 될까요? 지금 만들어둔 것은 저기 있는 책걸상이 다라서···."

주현은 공방 구석에 배치해둔 책걸상 세트를 가리켰다.

어린 나이에 각성한 헌터들을 겨냥하고 만든 공부용 책걸상이었다.

그러나 각성한 이상 책상 앞에 얌전히 앉아서 공부하는 헌터는 없었기에 팔리지 못한 재고 중 하나가 되었다.

주현은 허둥지둥 먼지 쌓인 책상을 닦기 시작했고, 손님은 책걸상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그것도 주시고, 큰 테이블 하나 주문 제작 의뢰하고 싶습니다. 재료는 제가 드리겠습니다."

"재, 재료를, 던전 부산물을 제공하신다고요?"

"예. 세계수의 묘목이면 될까요?"

"네에?! 무슨 묘목이요?"

"아, 이건 단단해서 자르기 힘드려나."

손님은 제 인벤토리를 살펴보며 혼잣말했다.

그사이 주현은 이게 지금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제 볼을 꼬집어보았다.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아팠다.

그래도 정신이 번쩍 든 주현은 주먹을 불끈 쥐고 손님에게 외쳤다.

"할 수 있습니다!"

인벤토리를 살펴보던 손님, 이유안이 김주현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김주현이라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만물 공방

유안은 연신 감탄하는 중이었다.

[세계수의 묘목]은 일반적인 나무의 묘목과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이다.

세계를 떠받치는 나무라는 전설이 있듯, 그 묘목만 해도 몇백 년은 족히 산 은행나무처럼 굵고 단단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스윽스윽.

주현이 아무렇지 않게 톱질하고 있었다.

F급 헌터이지만 만물 공방을 운영하며 힘 하나는 장사가 된 주현이었다.

"후우···, 확실히 다른 나무보다 톱이 뻑뻑하게 들어가긴 하네요. 그래도 좋아요! 오랜만에 일하는 기분도 나고."

"···역시 괴력이······."

"네? 뭐라고 하셨나요? 톱질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요."

"아니,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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