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94화 (194/196)

모든 준비는 끝났다.

간혹 명함 뒷면을 보면 족적을 빼곡하게 채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라이온스 클럽 지구회장. 명예소방의용대. 명예경찰. OO조기축구회. OO산악회 총무. 상가번영회 회장. XX갈비 대표 등등

그런 사람들 중 상당수는 명함 앞면에, 유력 정치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박아 놓기도 한다.

명함과 타고 다니는 자동차. 사는 집이 자신의 지위와 인품을 말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윤재는 체질적으로 이런 사람들과 거리가 멀었다.

문어발식 확장으로 숱한 회사의 대주주이면서 대표직을 겸임하고 있었지만, 윤재는 명함에 자신의 소속회사와 직함을 새기는 일을 중단했다.

그냥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명함이 되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2011년 6월 윤재는 오하루와 미팅을 가졌다.

오하루가 컨트롤 타워를 맡은 후, O2 그룹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고 그녀 역시 오진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속승진을 하고 있었다.

“지난주 위클리 비즈니스에 실린 윤재 사장님 특집 기사 잘 봤어요.”

이젠 전무로 진급한 오하루.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 윤재에 대한 친근함과 신뢰, 존경의 기색이 묻어났다.

“대학생들이 존경하는 기업가 1위로 꼽히셨어요. 대단합니다.”

40대 미만의 젊은 기수 중 재벌2세나 3세들을 제치고, 윤재가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것이었다.

오성그룹이나 NC그룹, 형제자동차보다 높은 순위였다.

“그런 설문조사라는 것이 엄청난 신빙성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그래도 그 조사에서 1등을 유지하기 위해, 잡지에 광고하고 기자들에 스폰하는 대기업과 CEO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하하. 저는 진짜 그런 건 관심 없습니다. 실질이 중요한 법이죠.”

“....”

쓸모없는 1등보다 실질적인 기업의 내실과 성장을 중시하는 윤재의 태도.

오하루는 이런 모습이 오늘의 52 Corp의 성공의 열쇠 중 하나라 생각했다.

“그나저나 회장님은 요즘 좀 어떤가요?”

“갈수록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 이젠 지팡이 짚고 일어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재준은 의료진의 헌신과, O2 소프트의 재활프로그램 등의 도움으로 건강상태가 계속 호전되고 있었다.

“김사장님! 큰 오빠 소식 못 들었죠?”

“네. 오진탁 사장 신변에 변화가 생겼나요?”

“교도소에서 폭행사건을 일으켜 형량이 추가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안양교도소에 수감 중인 오진탁은 운동시간에 노가은을 우연히 마주쳤다.

원래 다른 교도소에 있던 노가은이 안양교도소로 이송된 것이었다.

오진탁은 쌍욕을 하며 노가은에게 달려들었고, 엄청난 구타로 노가은의 콧뼈를 부러뜨린 것이다.

그 결과 오진탁은 폭행치상죄로 3년의 구형을 추가로 받게 된 것이었다.

“오진탁 사장! 그러다가 형량이 계속 늘어나는 거 아닌가요? 자칫 잘못하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지도 모릅니다.”

“....”

오하루는 물론 오재준도 이미 마음속에서 오진탁이라는 존재를 지운 상태였다.

오빠에 대한 짖궂은 농담이었지만, 오하루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녀의 대범한 일면을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전무님! 오늘은 추가적인 제휴 사업 건을 논의할까 해서 뵙자고 했어요.”

혜진과 선희의 유튜브 채널에 O2 엔터 소속의 연예인을 1명씩 출연시키는 등 이미 우호적 관계에 있는 윤재와 오하루.

“사업제안서입니다. 검토 부탁드려요.”

“HMB(Home Meal Box)를 통한 배송 자동화 시스템 구축?”

“태우건설 주택사업부에서 시공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오하루는 원래 영특한 여자.

멀티태스킹이 된다는 장점이 그녀의 특기 중 하나였다.

보고서를 정독하면서도 윤재와의 대화를 놓치지 않는 재능이 있었다.

“HMS는 가정간편식(HMR)에 이어 52 F&B가 추진하고 있는 핵심 미래 먹거리입니다.”

보고서를 읽는 내내 오하루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엄청난 인재를 놓치게 만든 오진탁이 새삼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이젠 52 Corp보다 저평가 받는 회사가 되고 말았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에어컨 실외기 정도 되는 사이즈의 밀박스(Meal Box)에 냉장고 기능이 들어가고, 아파트 베란다에 내장형이나 빌트인으로 설치한 뒤, 드론으로 배송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모델입니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미 저희의 레이저 센서 기술과 GPS 기술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합니다.”

오하루가 보고서를 읽으면서 계속 고개를 끄덕거렸다.

“관련 법규에 대한 검토는 끝났어요. NC전자가 밀 박스 제작을 담당키로 했습니다. 드론은 52 메카닉이, GPS와 레이저 센서는 콤파스라는 내비게이션 업체와 52 골프의 센서사업부가 담당하게 될 겁니다.”

“정말 엄청난 비즈니스 모델이군요! 이 제안서대로 실현된다면, 한국의 식생활 문화 자체를 바꿔버릴 파급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하루는 역시 인사이트가 있는 사람이었다.

Home Meal Box 사업이 불러올 파장을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GPS와 지도 데이터는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는데, 현재 레이저 센서가 GPS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가로수나 정원수 문제가 있는 아파트 저층은, 당분간 사람이 배송하는 게 불가피 해요.”

“음...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현재 52 Corp에서 52퀵 서비스와 배송사업을 키우고 있지만, 전국의 모든 배송을 커버할 수는 없죠. 그래서 한국통운과도 협업을 했으면 합니다.”

한마디로 HMB 사업의 성공을 위해, 태우건설과 한국통운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52 Corp 정도의 자금동원력이면, 독자적으로 사업추진도 가능했다.

하지만 빠른 시작과 안착을 위해서는, 제휴와 협력이 훨씬 좋은 대안이라는 것을 윤재도 오하루도 잘 알고 있었다.

태우건설의 개인 최대주주 역시 윤재.

오하루 입장에서 윤재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힘들었지만, 실익을 따져도 태우건설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한국통운도 마찬가지.

게가다 O2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홈쇼핑도 52 F&B의 사업에 도움이 되는 영역이었다.

오진탁이라는 장애물이 사라지자, 52 Corp와 O2 그룹은 마치 형제처럼 긴밀한 사업 파트너로 발전해 가는 중이었다.

“충분히 검토한 뒤 그룹 대 그룹으로 임원진 회의를 추진할게요.”

“네. 전무님과 O2 그룹의 현명한 선택 기다리겠습니다.”

오하루가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져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과 영화 등의 일을 하며, 연애도 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오진탁이라는 망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오하루.

이젠 O2 그룹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끌어안고 있었다.

‘정략결혼 같은 건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인데...’

고독한 CEO라는 말이 있다.

오진탁처럼 회사를 말아먹지 않기 위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오하루의 삶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온다.

52 Corp와 윤재가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듣는 얘기 중 하나였다.

세계 최고의 푸드테크 회사를 향해, 순항 중인 윤재와 52 Corp!

지난 8년 동안 착실히 준비했기 때문에 52 Corp의 모든 제품과 서비스는, 시장의 호평과 고객의 사랑을 받는 비즈니스로 자리 잡았다.

2004년 윤재가 최초로 투자하기 시작해 지속적으로 지분을 늘이고, 투자를 단행해 온 지도서비스 업체 콤파스(Compass) 역시 마찬가지였다.

빅애플의 하이폰과 구글의 안드로이드폰 모두에 제공되고 있는 내비게이션 앱 콤파스!

앱 장터 구매 후기는 물론 오프라인 상에서도 스마트폰용 내비게이션 ‘콤파스’에 대한 호평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콤파스 버전의 파도파도 미담만 나오는 사례였다.

=> 월 1달러라는 미친 가격에 이 서비스 실화냐?

┖ 자동차 회사 순정 내비게이션은 옵션 장사로 백만 원도 넘는데... 연간 1만원 조금 넘는

금액이니까 미친 가격 맞아요.

┖ 자동차 회사 내비게이션 쓰다가 속 터져 죽을 듯! 길 다 지난 다음에 방향 바꾸라는 경

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심심찮게 먹통 발생하고, 돈 값을 못하는 내비에요.

┖ 반면 콤파스는 턴바이턴 서비스라. 진짜 내비게이션이죠. 정밀한 지도! 엄청난 반응속

도! 진짜 21세기 최강의 내비게이션입니다.

┖ 내비게이션 살 돈으로 스마트폰 용 거치대 하나 사면 끝이니까 훨씬 경제적임.

소비자들은 환호했지만, 연간 1만원으로 이 모든 서비스를 구현하다보면 당연히 적자가 불가피했다.

윤재는 기존 주주, 대표이사, 직원들의 우려를 이렇게 달랬다.

“콤파스의 지도데이터가 필요한 기업들에 유료로 지도정보를 제공하면 됩니다.”

실제 세계 각국의 인터넷 포털이나, 기업 홈페이지, 스마트폰 용 앱 회사들에 콤파스의 지도데이터를 제공해 수익을 창출했다.

물론 적자를 커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서비스와 지속적인 투자가 가능했던 것은 신규 투자자들의 힘이었다.

매크로소프트(MS)와 워렌 버핀, 빅애플과 페이쓰북 같은 회사들이 거액을 지분투자 했던 것이다.

물론 가장 큰 투자액은 윤재의 몫이었다.

7년 동안 콤파스에 유입된 윤재와 주주들의 자금만 4조원이 넘었다.

이렇게 막대한 투자로 연구개발과 데이터 수집을 했기 때문에, 서비스의 질이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온라인 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소비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지도 확대할 때 반응 속도 봐! 미쳤다! 어쩜 이렇게 유려하고 빠르게 반응하지? 지린다!”

“그게 벡터 기반이라 그래. 속도 빠르고, 데이터 소모량도 훨씬 적지.”

“어쩐지 반응 속도 예술이더라!”

내비게이션 앱 ‘콤파스’는 2008년부터 하이폰에 서비스를 개시했고, 2009년 부터는 안드로이드에도 서비스가 개시됐다.

당연히 카테고리 킬러로 등극했다.

앱 스토어에서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내비게이션 앱 부분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시중에는 이런 말도 떠돌았다.

“콤파스 내비게이션 앱을 쓰기 위해 스마트 폰을 산다!”

그렇게 콤파스는 빅애플과 구글이라는 양대 마켓을 넘어, 은하계 최강의 내비게이션 회사로 성장하게 됐다.

◈          ◈          ◈

콤파스가 2005년부터 시작한 로드 뷰(Road View) 서비스 역시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미담제조기로 등극했다.

4조 원 중 무려 3조원이 넘는 금액이 세계의 로드(Road)를 촬영하는데 이용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길거리나 집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모두 블러 처리했어! 콤파스가 개인의 사생활 보호에 얼마나 적극적인 줄 알 수 있어.”

“진짜 이 놈들 미친놈들이다. 수천억 장 되는 사진의 사람 얼굴, 자동차 번호판 등을 모두 블러 처리했잖아. 그 인건비만 해도 대체 얼마야?”

길거리 촬영하는데도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지만, 그 사진을 일일이 검수해 사생활 보호에 문제가 되지 않게 하는데도 천문학적인 자금이 소요됐다.

모두 윤재의 선구안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고, 소비자들의 열광적인 호응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최근에는 방대한 사진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알고리즘 개발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었다.

이런 투자와 개발 덕분에 2008년부터는 세계적으로 ‘로드 뷰’ 놀이란 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집이나 사무실에서 세계 각지의 로드 뷰 사진을 보는 것이, 하나의 문화현상이 돼 버린 것이었다.

로드 뷰 세상은 세계 여행과 길거리 관광을 구현시키는 가상세계가 돼 버린 것이다.

콤파스의 로드 뷰와 관련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은, 미국 FBI의 미제 사건을 ‘로드 뷰’ 서비스를 통해 해결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미국 오리건 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행현장이 ‘로드뷰’ 촬영차량에 의해 찍혔다는 것을 다들 몰랐다.

그런데 콤파스 팀에서 사진 정리도중 문제의 사진을 발견했고, 이를 FBI에 제보해 살인범을 검거하게 된 것이었다.

‘개인의 사생활은 엄격하게 보호하면서, 개인의 안전까지 지켜주는 서비스!’

당시 콤파스의 ‘로드뷰’가 세계의 유저들에게 받은 호평 중 가장 유명한 문장이었다.

이렇듯 콤파스는 내비게이션과 로드 뷰, 그리고 정밀한 지도 데이터로 명실상부한 지도 서비스 업계의 최강자가 됐다.

2011년 말 콤파스의 CEO 말콤은 전 세계 소비자를 열광케 하는 소식을 발표했다.

“2012년부터 내비게이션 ‘콤파스’ 앱은 양대 마켓에서 무료로 제공됩니다.”

이미 연간 1.2만 달러라는 초저가였는데 그마저 없애겠다는 발표였다.

“몇몇 자동차 회사들에 저희 내비게이션을 공급하는 방안을 협상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수익모델 중 일부는 여전히 유효하죠. 앞으로 우리 콤파스는 지도기반 광고, 보험 및 정비회사와의 제휴로 수익기반을 넓혀 갈 계획입니다. 앞으로도 저희 콤파스를 많이 애용해 주십시오.”

타도 콤파스를 기치로 개발과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는, 세계의 GPS, 네비게이션, 지도 업체를 좌절케 하는 발표였다.

콤파스로 대표되는 GPS, 내비게이션!

드론과 레이저 센서!

밀박스 외주 제작에서 유통업체 인수에 이르기까지.

푸드 테크의 성공을 위한 준비는, 이렇게 차곡차곡 빌드 업에 성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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