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89화 (189/196)

통첩(2)

루머를 이용한 정보전. 세력을 규합한 내부자 거래. 분식회계를 통한 가치조작!

주가조작의 3박자를 모두 갖췄건만, O2 Data & System 주가조작 사건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비자금으로 산 미술품을 팔아 마련한, 종자돈 대부분을 잃었고 구속까지 되고 말았다.

처절한 패배였다.

사건은 2008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O2 DNS 주가조작은 증권가의 루머에서 시작했다.

[ O2 DNS 태양광 모듈사업 박차! 계열사 태우건설과 시너지 극대화 가능할 것. 미국계 사모펀드 리자드 펀드 O2 DNS의 성장성에 베팅! ]

[ O2 그룹 S.I 업체에서 범 오성계열의 통합 S.I 업체로 거듭날 것. 한성. 세영 그룹 등 O2 DNS 시스템 이용키로 했다고. ]

[ O2 DNS의 종착지는 그룹의 지배회사! 오진탁 사장-O2 DNS로 이어지는 기업 지배구조 완성할 것! ]

루머가 터질 때마다 상한가를 기록한 O2 DNS.

당연히 O2 DNS는 공시를 통해 루머를 부인했다.

하지만 작전주는 루머를 부인할수록 오르는 습성을 갖고 있다.

O2 DNS의 1대 주주인 오진탁은 그런 식으로 루머와 내부거래를 통해 주가를 부양했던 것이다.

승리가 목전에 있었다.

“사람들은 기업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DNS를, 어떻게든 키워낼 거라 믿게 될 겁니다.”

“좋아! 30%만 더 오르면 조금씩 물량 털어내자고. 내가 부각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예. 걱정마십시오.”

처음 몇 달은 오진탁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그동안 사들인 미술품 전체를 처분해 1천억, 그리고 DNS 주가조작을 통해 1천억을 조달할 계획이었다.

“O2 푸드 비영업용 부동산, 한국통운이 갖고 있는 터미널부지 매각하면 추가로 3~4천억 조달할 수 있어. 건설과 통운도 2~3년 버티면 다시 예전처럼 이익기조로 돌아갈 거야. 그때까지만 버티자!”

“사장님 말씀처럼만 되면, 결국 서브프라임 사태도 해결될 거고! 태우건설 주가도 3만원까지는 아니더라도 2만원은 넘길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최소 3년... 길어야 5년이야! 이 꽉 깨물고 버티자고.”

하지만 일장춘몽이었다.

오진탁의 주가조작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내부에 배신자들이 넘쳐나서 정보전에서 밀렸고, 내부자거래로 동원할 돈도 윤재에게 형편없이 밀렸다. 15위권 재벌이 윤재 단 한명에게 돈질에서도 밀린 것이다.

결정적으로 미전실 대외협력팀장이었던 성수용의 내부제보가 대기하고 있었다.

“뭐? O2 DNS에 공매도 세력이 결집했다고?”

“네. 매일같이 미친 듯이 공매도를 때리고 있습니다.”

“어떤 간 큰 놈들이 감히?”

“52 Corp의 김윤재 사장이 배후에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기...김윤재?”

“2조 5천억의 총알을 준비했다고 하더군요.”

“2조 5천억!”

오진탁의 종자돈 1천억보다 25배 많은 금액이었고, 오진탁이 마지막 베팅으로 벌려고 한 금액보다도 5배가 큰 금액이었다.

한마디로 해볼 수가 없었다.

Easy Come Easy Go 라고 했다.

오진탁은 비자금으로 사들인 미술품 대금을, 그렇게 쉽게 털어 먹고 말았다.

미결수 신분으로 서울구치소에서 잠들어 있던 오진탁!

윤재가 100달러짜리 지폐를 자신에게 소나기처럼 퍼붓는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깨어났다.

“헉! 헉!”

‘정신 차리자. 자칫 삐끗하면 태우건설과 한국통운을 통한 체질 개선은 말할 것도 없고, 그룹 승계 자체가 물거품이 될 수 있어!’

오진탁은 식은땀이 식으며 한기를 느꼈다.

‘일단 건탁이와 이사진 위주로 비상경영체제를 꾸린 다음 버틴다. 건탁이 그 놈이야 내 꼭두각시나 다름 없으니까. 어떻게든 집행유예를 받은 다음 출소하면 재기할 수 있다!’

어떻게 자신이 구속됐고,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저 일장춘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비몽사몽 상태로 해매고 있을 뿐이었다.

◈          ◈          ◈

오진탁이 구속된지 3주가량 지난 9월 5일 토요일.

윤재는 오재준 회장의 집을 찾았다.

오진탁의 부재기간 그룹의 방향타를 잡기로 한, 오하루 상무가 오재준과 함께 윤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부침을 겪었지만 오재준은 건강은 제법 호전됐다.

병상에 누워있는 수준에서 휠체어에 오를 정도는 됐던 것이다.

뇌 손상 때문에 여전히 언어 구사는 일반인이 알다듣기 힘든 수준.

하지만 52 소프트와 와콤사가 함께 공을 들인, 태블릿 시스템으로 제한적이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이 모든 일은 극비리에 추진됐고, 오진탁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재준이 여전히 와병중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면목이 없군.

자신을 위해 별도로 제작한 터치스크린에, 오재준이 더듬더듬 지판을 누르자 모니터에 글자가 표시됐다.

“....”

2003년도에 왜 자네 말을 듣지 않았는지, 몇날 며칠을 후회했네.

오재준의 의식회복과 제한적이나마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가장 큰 요인은 한국의 높은 의료 수준이었고, 그 다음은 52 소프트의 재활 프로그램 영향이었다.

나란희 팀은 오재준의 시험치를 주기적으로 피드백하며 시스템을 개선시켜 왔던 것이다.

의식은 회복했다고 하나, 여전히 정상수준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오재준과의 대화는 느리게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통해 자네의 제안에 대해 모두 확인했네.

다시 오재준은 침묵에 들어갔다.

70년 넘은 회사의 역사가 단 3년 만에 몰락하게 생겼으니 왜 회한이 없겠는가?

버크셔 해서웨이, 페레레 그룹이 자네를 지지한다고?

“예. 그렇습니다. 미미하지만 한국 론스타도 지분을 조금 확보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론스타도 자네 편이란 말인가?

윤재는 힘겨워하는 오재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시 침묵이 흐른 뒤 오재준이 힘겹게 터치스크린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우리사주 조합장과 노동조합장도 자네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윤재는 말이 없었고, 오하루가 대신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얀라면 [꼬끼오면] 출시를 앞두고 동고동락했던 청주공장의 지부장이, 현재 O2 F&B의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돼 있었다.

당시 윤재를 좋게 봤었고, 오진탁의 파행에 신물이 나 있기도 했다.

게다가 현 노조위원장은 윤재의 아버지와도 인연이 있었다.

노조위원장은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면 윤재를 지지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한마디로 오재준 일가는 사면초가에 빠져 있는 것이다.

진탁이 그놈이 얼마나 모질게 했으면, 다들 돌아섰단 말인가?

“....”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왜곡된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하루에게 모든 결정권을 위임해 놨네.

“....”

윤재 대리! 이렇게나마 자네 이름을 부를 수 있어 기쁘군. 미안하네. 그리고 고맙네.

오재준의 얘기는 그걸로 끝났다.

“포기하지 마시고 꾸준히 재활하시면 조금 더 차도를 보일 수 있을 겁니다. 이미 기적을 만드셨는데, 한 번 더 만들지 말라는 법 없습니다. 힘 내십시오.”

오재준과의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그의 건강상태를 고려해 오재준의 방에서 나왔다.

거실에는 오재준의 부인과, 막내딸 하나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제 모든 게임은 끝났다.

오재준에게서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은 오하루의 컨펌을 받고, 실무적인 절차만 정리하면 끝나는 수순이다.

O2푸드는 복잡한 순환출자와 상호출자로 얽혀 있었다.

오재준 일가의 지분은 탈탈 털어도 15%가 조금 안됐다.

그룹 계열사가 갖고 있는 지분도 20% 수준으로, 과반에 한참이나 부족했다.

가장 중요한 키는 지난 30년 동안 백기사 역할을 해온 고려건설이었다.

8%의 지분을 갖고 있는 고려건설은, 최종적으로 의결권 포기를 선언했다.

고려건설의 의결권 포기는 사실상 윤재에 대한 지지선언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고려건설마저 김윤재 사장님을 지지할 줄 몰랐군요.”

“고려건설은 처음부터 오진탁 사장이 태우건설과 한국통운 인수하는 걸 반대했습니다. 주주가치가 하락할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죠.”

“결과가 이런 상황이다보니 반론하기도 오렵긴 하네요.”

자신의 친오빠였지만 오하루의 판단은 냉정했다.

나머지 주주들은 대세에 영향을 미치기 힘들었다.

국민연금과 국내 기관은 지분이 너무 낮았다.

주요 외국인 투자자들은 모두 윤재의 편에 서 있었다.

만약 주총에서 표 대결을 펼쳤다면, 윤재 진영이 46 정도.

오재준 일가는 40을 넘기기 힘들었다.

이미 윤재의 결정에 따르는 것으로, 오재준과 얘기를 마쳤건만....

오하루는 왠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현재 상황에서 임시주총을 개최해도 우리가 패배할 게 뻔한데, 기회를 주는 이유가 뭔가요?”

“광해군이나 연산군 등 조선시대 왕들은 폐위됐어도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하더군요. 예우라 생각해 주세요.”

“....”

“오상무님도 스웨덴의 발랜베리 가문 아실 겁니다.”

왜 발랜베리 가문을 모르겠는가?

어릴 적부터 총명했고 개방적이었던 오하루.

그녀의 오랜 소신도 소유와 경영의 분리였다.

“O2 F&B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는데 동의하신 만큼, 앞으로 회장님 일가의 지분은 유지할 수 있습니다.”

O2 계열사들이 복잡하게 보유하고 있는, O2 푸드의 지분을 윤재가 사들일 계획이었다.

태우건설 지분 일부도 인수키로 돼 있었다.

그렇게 되면 태우건설 바이아웃 옵션에서 시작된, O2 그룹의 자금부담이 해소될 수 있었다.

“길고 멀리 보시면 나쁜 딜이 아닐 겁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아빠도 저도 김사장님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한 겁니다.”

O2 푸드를 떼어내도 태우건설과 한국통운은 O2 그룹에 남게 된다.

그리고 기존의 계열사들이 있고, 오진탁보다 수십 배는 유능한 오하루가 전면에 나설 예정이었다.

“오상무님께서 그룹을 이끈다면, 몇 년간 힘든 시기를 겪긴 하겠지만 분명 체질개선에 성공할 겁니다.”

“죽어라 노력해야죠.”

“그럼 임시주총 때 뵙도록 하시죠!”

“알겠습니다.”

이제 윤재와 파트너들이 요구한 임시주주총회의 안건은 바뀔 것이었다.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될 상황은 피하게 된 것이다.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까지 따라 나온 오하루.

어머니와 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가 물었다.

“혹시 오빠가 제 차량을 일부러 파손시킨 것도 알고 계셨나요?”

1년 전 있었던 자동차 고장의 배후에, 오진탁이 있다고 오하루는 확신했다.

자동차 교체를 권한 것도, 렌터카 회사도 모두 오진탁과 그의 라인이었다.

“그건 몰랐습니다.”

“그랬군요.”

오진탁이 인간쓰레기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친동생도 제거할 음모를 꾸밀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진탁은 오하루를 여동생이 아니라 라이벌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제대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군요. 아빠도 도와주시고, 제 목숨도 구해주셨는데. 감사합니다.”

그녀의 얘기는 진심이었다.

오재준의 투병 과정에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준 유일한 외부인은 윤재밖에 없었다.

윤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오재준의 집을 나섰다.

“이제 O2그룹과 52 Corp는 선의의 경쟁관계가 되는 건가요?”

“멋진 경쟁이 되겠군요. 그럼 이만!”

“52 Corp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오재준이 2층 서재에서, 휠체어를 탄 채 윤재와 오하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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