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첩(1)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광복절을 하루 앞둔 저녁시간, 전국의 시청자들을 짜증나게 하는 속보가 전국에 방송됐다.
“에이! 또? 진짜 선진국 되려면 멀었다니까!”
“맞아. 선진국에서 재벌총수가 저런 범죄를 저질렀다면, 최소 200년형이라고 하던데. 우리나라는 재벌에는 한없이 관대하다니까!”
“저놈 새끼 봐.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디가 아프다고 마스크쓰고 휠체어 타는 건지!”
“김씨는 그런 것도 몰라? 재벌 일가는 마스크 쓰고 휠체어만 타면, 무조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공식도 있잖아?”
“에잉. 쯧쯧쯧! 유전무죄 무전유죄여... 드러운 세상이다니께.”
“좋은 특허는 미국, 독일, 대만이 죄다 갖고 있는디, 우리나라 재벌이 확실한 특허를 하나 갖고 있는디, 그것이 뭐냐면 마스크 쓰고 휠체어 타는 거라고 하더라니께!”
“안타까운 일이여!”
“아니 김씨는 지금 범죄자를 두둔하는 것이여?”
“그것이 아니고, 저 이쁜 아나운서들 말이여. 이쁜 얼굴로 저런 험한 뉴스나 전해야 허니께 안타깝다는 것이제.”
“자네 걱정이네 해 이 사람아! 자네가 지금 안수애 아나운서 걱정할 판이여?”
광복절 전날 O2 F&B의 대표이사인 오진탁이 전격 구속됐다.
검찰의 발표에 의하면 주가조작을 통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법 위반, 비자금 조성 과정에서 회사와 고객 돈을 빼돌린 횡령죄, 회사 돈을 빼돌려 선물 투자에 전용한 혐의, 폭행교사 혐의까지 굵직한 죄목은 4개였다.
검찰은 징역 7년을 구형했고, 법원은 법정구속으로 화답했다.
시민들은 비아냥댔지만 오진탁은 구속됐다.
그것만 봐도 그의 죄질에 대해 검찰과 법원이 엄중한 판단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포토라인을 지나 호송차에 올라타는 오진탁에게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임프레션 갤러리와 수배중인 노가은 관장을 통해, 천억 원이 넘는 미술품을 사들였다는 게 사실입니까?”
“미래전략실 팀장을 겁박하기 위해 조폭을 동원한 사실 인정하십니까?”
“태우건설 인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주가조작을 했다는 발표 사실입니까?”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대답 좀 해 주십시오.”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세례에 오진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호승 차에 오를 뿐이었다.
그룹의 콘트롤 타워의 수장에 오른 지 7년만의 일이었고, O2 푸드의 CEO가 된지 1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호송차가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자들의 얘기가 들려왔다.
“검찰에서 그러는데 실형을 피할 길이 없다고 하더군.”
“그러게. 내부 제보자가 빼도 박도 못할 증거들을 제출했다나 봐.”
“오재준 회장이 버리는 카드로 썼다는 얘기도 있어.”
“오재준 회장은 병상에 누워 있다고 하지 않았나?”
“O2그룹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송기자! 자고로 연예인 걱정하고, 재벌 걱정은 안하는 거라고 했네.”
기자들이 주고받는 대화와 서초동 일대의 소문을 종합해 봤을 때, 오진탁은 중형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 ◈ ◈
남 부러울 게 없는 재벌3세의 몰락.
오진탁의 구속이후 O2그룹과 오진탁에 대한 기사들이 며칠간 계속됐다.
비자금. 폭행교사. 연예인 성상납 등 대부분 좋지 않은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불과 8개월 전만 해도 만 40세 재벌총수의 등장을 보도하기 바빴던 언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제는 오진탁을 인간쓰레기로 만드는데 분주했다.
자업자득이었기 때문에 언론의 하이에나 습성을 탓할 것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한때 O2 그룹 미래전략실 대외협력팀장이었던 성수용.
그가 윤재의 사무실에서 뉴스를 보다 물었다.
윤재의 답변은 지극히 건조했고, 사무적이었다.
“오진탁 사장보다는 형량이 낮겠지요. 최악의 경우라도 집행유예일 겁니다. 하지만 미전실 팀장들 역시 법의 심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
“각오하신 일 아니었나요?”
“물론이지. 각오 없이 저지를 수 없는 일이니까. 미우나 고우나 한때 내가 모신 사람 아닌가?”
검찰이 얘기한 내부제보자는 과거 미래전략실 핵심멤버였던 성수용 팀장이었다.
그렇다면 성수용 팀장은 어떻게 오진탁을 배신하게 됐고, 윤재와 손을 잡게 됐을까?
사건은 성수용이 미전실에서 짤렸던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O2그룹은 계열사 임원들 명의로 차명계좌를 관리해왔다.
국내 몇몇 재벌의 오랜 관행이었다.
성수용의 부인 명의로 관리한 금액은 5억.
오진탁에게 버림받은 후, 성수용은 차명계좌 5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됐다.
“회사에서 성공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재테크 같은 건 생각도 안했네. 계열사 CEO 한 번 해보겠다고, 가족과 친구도 잊고 충성을 다한 세월이 한스러울 뿐이야.”
윤재는 2006년 조폭들에게 빨래질 당할 뻔 했던 성수용을 구해준 적이 있다.
그때 성수용은 거의 울먹이며 얘기했었다.
“나를 내쫒으면서 불명예 해고 처리로 만들어 퇴직금까지 주지 않았네. 다른 회사처럼 엄청난 퇴직금도 아니고, 고작 1억 조금 넘는 금액이었건만.”
성수용이 오진탁에게 앙심을 품을 만도 했다.
어디까지나 미전실의 책임자는 오진탁.
하지만 그는 성수용을 내쫒으면서, 퇴직금까지 주지 않는 폭거를 자행했던 것이다.
“오진탁은 성팀장으로 끝내지 않을 겁니다.”
“?”
“성팀장님을 놓쳤으니 다음엔 사모님과 아이들을 노리겠죠? 어차피 차명계좌 명의도 사모님이라면서요?”
“오진탁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과천의 공사장에서 성수용을 구해준 다음, 윤재가 했던 얘기들은 모두 현실이 되고 말았다.
결국 성수용은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윤재의 손을 잡게 됐던 것이다.
윤재는 52 소프트 미국지사를 통해, 성수용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왔다.
“명심하세요. 제 얘기가 모두 맞다는 걸 확인하면, 그때는 제 의견을 따르는 겁니다.”
“알았네.”
“과거의 과오는 그렇다 쳐도, O2그룹의 그 많은 직원들은 아무 죄가 없어요. 팀장님 하시기에 따라 동료들이 사느냐 죽느냐가 갈릴 수도 있습니다.”
“명심하겠네.”
윤재의 제안은 심플했다.
“2010년이 가기 전에 O2푸드와 태우건설 인수를 제안할 겁니다. 만약 오진탁이 거부한다면, 그때 성팀장님께서 검찰에 출두해 주시면 됩니다.”
“자네가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미래전략실에서 그토록 죽이려 노력했던 윤재.
누를수록 윤재는 오히려 더 커졌고, 이젠 역으로 회사 매입을 얘기할 정도로 거물이 돼 있었다.
“앞으로 길어야 4년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들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해 보세요. 그리고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알았네. 그런데 있잖아. 나는 물론이고 아내와 자식들까지 구해준 사람에게 염치없는 부탁이네만.....”
성수용의 부탁은 듣지 않아도 알만한 것이었다.
“이미 조 단위 재산을 가졌다고 들었네.”
“제 부탁을 들어줬으니 호구지책을 마련해 달라는 얘기시군요?”
“.....”
“미국까지 김삼식이라는 친구가 동행할 겁니다. 그 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어보세요. 그럼 알려줄 겁니다.”
그 방법이란 것은 52 Farm의 양계장과 양돈장에서, 돼지 똥과 닭똥을 치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52 Corp에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뭐 꼭 뭔가를 대가로 원하는 건 아닐세. 그런 게 없어도 오진탁 그 인간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생각이야.”
성수용은 그렇게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 뒤 3년 동안 윤재의 예언은 모두 현실이 됐다.
결국 윤재가 오진탁에게 제시한 딜은 무산됐고, 성수용은 약속대로 한국에 들어와 오진탁의 일체의 비위에 대해 제보를 했던 것이다.
성수용의 자수 이후 오래지 않아 오진탁의 내연녀였던 노가은이 국내로 송환됐다.
필리핀에 숨어 지냈지만, 결국 국제공조의 수사망을 비켜갈 수 없었다.
그녀는 법정에서 오진탁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 ◈
2004년 3월.
윤재는 회사 신입사원 민태홍을 은밀하게 만났다.
“오진탁 그 더러운 인간 때문에, 형님 같은 인재가 회사를 관두시다니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야.”
2003년 신입사원 채용 설명회에서 만난 민태홍.
전생에서도 민태홍은 유난히 윤재와 쿵짝이 잘 맞는 후배였었다.
윤재가 상무급 대리로 명성을 날리던 시절, 윤재를 추종하는 일군의 신입사원 무리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추종자가 민태홍이었다.
“태홍아! 미래 전략실에서 조만간 신입사원 충원이 있을 거다. 꼭 지원해! 너라면 충분히 미전실 팀원이 될 수 있을 거다.”
그때만 해도 민태홍은 왜 윤재가 자신에게 미전실로 가라고 권유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퇴사한 뒤에도 윤재는 민태홍을 최소 3개월에 한번 씩은 만나며 관리했다.
“회사가 삼오어묵 인수한 거 알지? 이재민 사장 딸이 KLPGA프로야. 이지은이라고... 걔가 내년에는 KLPGA를 휩쓸 거다. 두고 봐라!”
그렇게 시작된 윤재와의 만남.
민태홍 역시 노스트라다무스보다 뛰어난 윤재의 예언에 놀라게 됐다.
그럴수록 민태홍은 윤재를 신앙에 가깝게 숭배했다.
오진탁이 중국사업에 실패할 것이라는 얘기.
쓰레기 만두사건이 나라를 뒤숭숭하게 만들 거라는 얘기.
윤재가 창업한 회사들에서 유니콘이 나올 것이라는 얘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이르기까지.
윤재의 예언은 거짓말처럼 적중했던 것이다.
그렇게 윤재는 민태홍에게 정보를 제공했고, 그의 재테크에도 엄청난 도움을 줬다.
“태홍아! 머지않아 회사는 오진탁 때문에 망할 거다.”
“그런 걱정 하는 선배님들이 많더라구요.”
“회사 직원들이 무슨 죄가 있냐? 다들 공부 열심히 해서, 그래도 괜찮은 회사라고 입사한 죄 밖에 없잖아.”
“그렇죠.”
언젠가 민태홍은 윤재에게 울분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계속되는 오진탁의 패악 질에 대한 분노였다.
구성원들이 희망을 잃어버릴 정도로, 오진탁의 패악 질은 오랜 기간 이어졌고 강도가 지나쳤다.
“형님! 아무리 형님이 밉보였다지만, 인간이 이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유능한 인재들을 무려 4년이나 인사로 물 먹이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습니까? 진짜 이래서는 안 됩니다.”
윤재와의 만남이 지속되면서, 민태홍은 그런 식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윤재의 정보원이 됐다.
민태홍 외에도 장동석. 차명수. 오석진. 한송이 등의 동료들과 뉴스를 틈틈이 체크했다.
덕분에 윤재는 미전실과 오진탁의 동태를, 손바닥 보듯이 파악할 수 있었다.
성수용이 앙심을 품고 미전실을 나왔다는 사실도 그렇게 알게 됐다.
오진탁이 성수용의 부인 앞으로 돌려놓은 차명자금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미리 알 수 있었다.
윤재는 오진탁의 필연적인 몰락을 예상했다.
그리고 퇴사한 이후로 무려 6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왔던 것이다.
덕분에 성수용을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오진탁을 완벽하게 옭아 맬 수 있었다.
다시 2009년 8월.
성수용과 헤어진 윤재는 창밖의 야경을 보며 다짐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오재준과 오하루를 설득하는 일만 남았어!’
윤재는 자신의 절충안을 오재준과 오하루가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